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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께서 합력하시는 삶 (롬 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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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06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52주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과 삶을 붙들어주심으로 여기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줄 믿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음식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남녀노소가릴 것없이 좋아합니다.
바로 비빔밥입니다. 갖가지 산나물과 고추장과 기름을 넣어서 비벼서 먹는다 하여서 비빕밥이라고 합니다.비빔밥은 한국의 대표적인 요리요 이미 세계적인 요리가 되었습니다.

2006년 7월말 베이징 여우이(友誼)호텔에서 중국 상무부산하 중국요리협회와 서양요리협회(비중국요리부문)가 공동 주최한 세계미식(美食)대회에서 한국의 전주비빔밥과 한정식이 1등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비빔밥이 불고기나 김치 등을 제치고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자리매김 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가장 인기있는 기내식이 비빔밥이며, 외국의 저명인사 중에서도 비빔밥을 한국의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이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비빔밥이 인기가 좋은 것일까요? 사람들이 비빔밥을 좋아하는 것은 고기보다는 채소류를 한번에 맛있고 편하게 먹을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채소류를 섭취할 수 있으면서 풍성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종류의 나물과 재료를 합력하여 맛을 내는 비빕밥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매일같이 다양한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그 다양한 인생을 섞어서 하나의 인생으로 만들어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 인생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맛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않은 이미와 아직의 중간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햇지만 아직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불란서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불란서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불란서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습니다.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불란서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합니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과 죄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그날까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해의 마지막 주일 우리가 한해를 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합력하여서 다스리는가를 살펴보기를 소원합니다.

1.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합력케하십니다.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연약함을 밝히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연약하다고 합니다.
본문의 저자인 사도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고후4:7에서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은 너무 약해서 쉽게 깨어집니다. 조금만 충격이 주어져도 깨어져 못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루밤만 잠을 제대로 못주무셔 보십시오.아마 다음날 정상적인 삶을 살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루만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해보십시오.온통 먹는 것밖에는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몸이 조금만 아파 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낙도 없고 오직 병낫기만을 고대할 것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도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같은데 고난 앞에서 넘어지고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시험에 빠져서 헤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마디 말 때문에 낙심하고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신앙 생활하여서 아주 강하신 분같은데 사소한 죄에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다윗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결국 범죄하여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습니까? 그러나 나중에 결국 신앙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종종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큰 일을 행하시던 분들이 범죄로 인해서 넘어지는 예들을 우리가 목도합니다. 정말 우리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요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고후4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약하게 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역사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가 슈퍼맨처럼 다루어가시기 않습니다.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사처럼 되고 우리가 슈퍼맨처럼 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 내버려두셨습니다.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허용하셨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이 연약함이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연약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성도들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땅의 약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우리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요14:16에서는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라는 의미는 ‘함께 담당한다’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거운 통나무를 들때 혼자서는 들수 없지만 다른 한쪽에서 맞잡아 주면 들 수 있는 것처럼 ‘맞잡아준다’는 의미입니다.

종종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줄때가 있습니다. 넓은 운동장에 가서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줍니다. 아이는 혼자서 핸들을 붙잡고 페달을 돌립니다. 그때 뒤에서 어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면 비록 아이가 아직 실력이 없어 넘어질 위험에 있어도 뒤에서 붙잡고 있으면 결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빨리 달리면 빨리 달리면서 붙잡아 주고 커브를 돌때는 함께 돌면서 붙잡아 줍니다.이렇게 약한 가운데 붙잡아주면서 며칠만 열심히 연습하면 어느새 자전거를 잘 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님은 마치 함께 붙들어주는 아버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시고 혼자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치 자전거를 잘 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금방 연약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여서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거나 슈퍼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주시면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까?
먼저 성령님이 탄식함으로 기도하십니다.(26절)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 할 정도로 강조하고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할 때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힘들거나 약하여질때 가장 먼저 오는 신호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영적으로 힘들면 기도가 막힙니다.기도가 어렵습니다.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연약함 가운데 성도들이 힘들어할 때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가운데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친히 기도함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십니다. 여기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농도짙은 탄식입니다.이것은 신비한 탄식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하여서 이런 저런 나쁜 마음,잘못된 마음,굳은 마음을 갖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때 성령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저의 경우에도 가끔 피곤하여서 새벽에 기도가 어렵고 지쳐있을때 갑자기 마음 속에서 탄식하시면서 나를 깨우는 소리를 들을때가 있습니다. 때로 형식적으로 기도할 때 마음 속에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소리를 들을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놀라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기도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고백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이요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마음 속에서 탄식하면서 눈물흘리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찬송을 부르다가 성령님께서 눈물 흘리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할때에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가르침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27절에 보십시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연약하여서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너무 내뜻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기보다는 내뜻대로 기도할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가 내뜻대로 기도할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막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할때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 앞에 나와서 막 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때로는 그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때로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가운데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기도하여도록 돕고 계십니다. 때로는 나는 피곤하여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기도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때로는 감정이 상하여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마음에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힘이 들고 어려울때도 기도합니다. 약하고 상한 감정이 일어도 기도합니다. 저와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합력하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합력하게 하십니다.

28절 하나님께서 합력하시되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합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모든 일’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어떤 낙관론의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사가 결국 선한 것으로 결론날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선과 우리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은 갖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선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십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시련,나쁜일,실패한 일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면 좋을 것을 왜 나쁜 일도 포함하는가?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좋지 않는 일들까지도 연합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의 삶에 일어난 일들 나의 삶에 당하는 현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당한 사건 내가 만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시어서 연합하여 가십니다. 그런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내가 당하는 삶의 현실중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들이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고난과 같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먹는 약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약들 중에는 달고 먹기에 좋은 약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좋은 한약재들을 보면 얼마나 쓰고 먹기에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렷을적 기억이 나는 것은 어머니가 한약을 주면서 몸에 좋으니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쓰고 먹기에 힘이 들던지 몰래 다 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가는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고통이라는 하나님의 쓴약을 이용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약이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환난과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5:3-4에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하나님께서 환난의 환경 환난의 질병 환난의 어려움을 이용하셔서 합력하시어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나 텔레비전의 극을 보십시오.
그 이야기들이 아무런 갈등도 없고 위기도 없고 문제가 없다면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는 극 중에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가 30%이상의 시청율을 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극의 주인공인 주몽이 넘을 수 없는 많은 고난과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너무나 시원하고 멋있게 잘 그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감독해 가시는 우리 감독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갈등과 고난과 어려움을 허용하심으로 더욱 우리의 삶을 허용하십니다.삶의 환경이 어렵고 고난 중에 힘들어도 인내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시련의 배후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시는 감독자이심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한해를 살아오시면서 우리의 삶에 기쁜 일도 있엇지만 슬픈일 낙망이 될말한 일 상처가 되는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당할 때 이런 모든 일들의 시각을 나의 시각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요셉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17살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서 인신매매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상처가 되는 때에는 바로 거부당할 때입니다. 가장 믿었고 신뢰하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거부를 당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그런 상처와 아픔의 벽들은 우리 마음에 깊어서 인생 속에서 많은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그 상처와 아픔의 고통 속에서 원수를 원수로 갚지않고 건강한 삶으로 승리합니다.

창세기 45장 8절에 요셉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형들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환경과 사건을 해석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시각 나의 시각은 부정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은 긍정의 시각입니다.
여러분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긍정의 시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정의 시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긍정적인 시각으로 일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느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까? 때로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들이 자기들의 요구와 뜻을 들어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부모를 원망하고 오해하지만 부모는 언제나 자식들이 잘되기를 소망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2006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비록 인간적으로 고통스럽지만 그 환경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문제를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만나기 싫고 상대하기 껄끄러운 그 사람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만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정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3.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합력하십니다.

29절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행하심으로 합력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형상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이땅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원하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때에 하나님의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죄를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잃어버린 형상을 예수님 안에서 회복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 모든 역사의 결국은 우리가 그분을 닮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서 바울은 이 아름다운 구원의 아름다운 완성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가고 성숙하여 가는 것은 우리들의 열심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5가지 하나님의 일하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아셨다’‘정하셨다’‘부르셨다’‘의롭게 하셨다’‘영화롭게 하셨다’입니다. 그런데 모든 단어가 이미 과거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국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롭게 되어질 것을 창세 전에 미리 계획하여 놓앗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영화의 자리에 들어가도록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여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서 실패로 인해서 낙심할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눈물흘릴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은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합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기회가 되게 할 줄 믿습니다 .

저는 지금 저의 과거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그 당시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원망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실패는 선을 위한 실패였습니다. 그때의 아픔은 선을 위한 아픔이었습니다.
그때의 눈물은 선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좀 실패하여 연약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일이 좀 내뜻대로 안되어도 연약한 지경에 있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질병이 들어서 연약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모든 배후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약한 사람들을 볼때 우리의 눈과 기준을 갖고 함부로 그 사람을 속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계획과 사랑을 갖고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는 말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관하심아래 있습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계속적으로 합력하여 승리케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되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합력하여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약함을 붙잡아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서도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도록 합력하여 삶을 만들어가십니다.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형상을 닯아가시도록 역사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인도하시어서 결국 최후에는 영화로운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로서 합력하여 날마다 선을 이루시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백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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