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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수고의 짐을 내려 놓으라 (시 38:1~4,21~22, 갈 5:1,13~14,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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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시편 38:1~4, 21~22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주님의 화살이 나를 꿰뚫으며, 주님의 손이 나를 짓누릅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므로, 나의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의 뼈에도 성한 데가 없습니다.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빨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  아멘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5:1, 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1:25~30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으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수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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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한 농경시대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쟁기나 마차를 몰려고 할 때 소나 말을 혼자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지고 마차를 끌고 가기도 하고 밭에서 쟁기를 몹니다.

근데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나 근동지역에 관습 중에 하나가 소 두 마리를 멍에를 같이 끌라고 할 때 소 두 마리가 균형이 맞지 않아서 하나가 빨리 가려고 하고 다른 하나가 늦게 가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먼저 소 두 마리를 싸움을 시킨답니다.

싸움을 시켜 이기는 쪽 소하고 진 쪽 소하고 같은 멍에를 메고 이기는 쪽 소는 마부 입장에서 보면 오른쪽에 놓고 진소는 왼쪽에 놓고 마부는 회초리 들어가지고 이긴 쪽 소만 잘 다스리면 왼쪽 소는 잘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 두 마리가 또는 소 두 마리가 쟁기도 끌고 마차도 끌고 가는데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근농에 살던 사람들은 같은 멍에를 지고가자 하는 말이 어려움을 같이 지자 하는 뜻도 있지만 우리는 공동의 운명체임으로 한 배를 타고 간다.

그러니까 멍에지고 가는 것은 꼭 어려움만이 아닙니다. 기쁨도 함께 지고 멍에를 짊어지고 가자.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인도 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힘도 있고 더 많이 알고 베풀기도 하는 사람이 강자가 돼서 약자와 함께 멍에를 지고 갑니다. 그런 뜻이 있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고 당시 소를 두 마리를 끌던 농경사회 관습을 따 와가지고 선생님이 제자한테 가르치기 시작할 때 첫마디 하는 인사말 겸 결단의 말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이제부터 그대가 제자가 됐음으로 나 선생한테 와서 나와 함께 내가 멘 멍에를 함께 매고 그담에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한테 와서 배워라.

이제부터 제자는 스승과 한 멍에를 멘 동반자다 이런 뜻입니다. 특별히 나하고 어려운 일 같이 하자 보다도 나와 이제 공동 운명체이니 함께 가자. 혹시 스승이 되신 여러분 제자를 향해서 내가 주는 멍에는 별로 무겁지 않으니 나와 함께 멍에 메고 함께 가자.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또는 아내가 남편한테,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와서 배워라, 그럴 정도로 선생님이 스승이 위대하시면 제자는 따라오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인생을 살 인생에 반려자가 될 각오가 돼있습니다. 나한테 와서 제가 주는 멍에를 같이 메고 살아가면 여러분이 메야 할 멍에는 가볍고 제가 함께 걸머져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키우는 선생님의 멍에를 다시 메겠다고 하면 여러분이 혼자 끙끙대면서 메 왔던 멍에는 벗어 버리십시오. 혼자 인생을 살려고 바동댔던 것을 버리고 이제 나와 함께 새로운 멍에를 맵시다. 인생에 앞날은 열려있습니다.

이래서 멍에 멘다는 말은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연말이 왔습니다. 마지막 주일이 왔습니다. 혹시 여러분 일 년 동안 걸머졌던 멍에가 무겁습니까. 그 옷 벗고 나와 함께 질 멍에로 교체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와 함께 합시다. 저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된 기쁨을 어떻게 고백하고 싶냐 하면 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항상 같이 살아주십니다.

다만 어려움은 제가 그것도 모르고 혼자 꿍꿍이를 알면서 제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만 했습니다. 자 이제는 혼자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의 같이 하심으로 이제부터는 새 일을 함께 행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같이 지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들이 지었던 멍에는 강압적 명령이나 강박관념 때문에 자기 자신의 운명이나 세계의 운명이나 가정의 운명을 나 홀로 지며 고생했지만 내가 함께 지자고 하는 멍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는 멍에이고 절반만이라도 나한테 멍에를 다오. 내가 인도자가 될 테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멍에를 지고 인생의 길 삶의 길 역사의 길을 같이 가보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제안하시는 배경에는 나와 함께 멍에를 지면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지면 반드시 여러분은 쉼을 얻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짐을 다 내려놓고 나와 함께 아름다운 길을 가십시다. 수고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하는 능동적인 수고입니다. 무거운 짐 졌단 말은 원치 않는데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 저한테 떠맡겨준 수동적인 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원해서 결단해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그러면서도 어려움을 당한 수고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함께 맡아 주시겠다. 까닭도 없이 저한테 주어진 질병이나 어려움이나 고통이나 이것도 예수님께서는 함께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 년의 결산표를 놓고 함께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저 자신이 잘하겠다고 수고를 자처해서 한 모든 일들이 얼마나 힘든 건지 자율적인 결단의 수고나 타율적으로 지어진 무거운 짐이나 예수님께서는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아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스승이 하는 말. 내 멍에를 함께 메고 함께 공동운명체가 돼서 가자.

그러면 내 수하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학문의 길을 삶의 길을 같이 가겠느냐. 제자는 스승에 대한 확신이 없이 멍에를 멜 수가 없을 겁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 제자에 대한 스승의 믿음. 이 두 가지가 함께 합쳐져야 멍에를 같이 멜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역사 가운데 작지만 아주 큰 반향을 일으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해방정부까지 그 이후까지 평양에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다고 누구나 자타가 이정하는 분이 계십니다.

조만식 선생님 이십니다. 이분은 정치적으로도 조선민주당도 만드셔서 정치를 하려고 했고 독립운동도 했고 또 본인은 평양에 있는 산정현 교회 만드셔서 장로님으로 봉직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첨엔 오산학교 교장도 하셨는데 교장으로 계실 때 똑똑한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 이름이 유명한 순교자 목사님이신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이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돼서 부임한곳이 자기 스승인 조만식 교장선생님이 장로님으로 계신 산정현교회 였다고 해요. 하루는 아주 평범한 일화입니다. 예배를 인도해서 주기철 목사님이 설교가 시작됐는데 저 뒤에서 십분 늦게 수석 장로님이신 조만식 장로님은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예전에는 우리 교회는 안 그렇습니다만 맨 앞에 장로님 자리가 있습니다. 늦게 오시면 큰일 납니다. 그 자리가 비거든요. 조만식 장로님이 늦게 들어오시니까 설교하시다 말고 소리를 꽥 지르면서 조 장로님 앞으로 나오지 마시고 그 뒤에 서서 예배 보십시오.

아마 당시 사정으로 보아선 목사 장로 관계이긴 합니다만 제자 목사가 스승 장로님한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참 분위기상 옳았을까. 장로님이 어땠겠습니까. 엉겁결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꼼짝 못하고 뒤에 서서 예배를 보십니다. 그때 설교를 듣던 청중들이 어땠는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나고 축도하기 직전에 주기철 목사님이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장로님 축도하기 전에 회계할 겸 은혜를 들을 겸 마지막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목사님 그러시니까 장로님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내용은 하도 길어서 인용 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주님 용서하십시오.

제가 주님 만나는 일보다 제 정치적으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십분 늦어가지고 주님께 손해 끼친 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일로 인해서 설교가 중단되면서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사죄드리고 우리 교인들이 그 일로 인해서 상처 받은 거 사과드립니다, 하면서 장로님이 흐느껴 우셨대요.

그랬더니 모든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같이 울었답니다. 그 얘기입니다. 지금 그 얘기 간단한 얘기 같은데 그 장면을 다시 재현 할 수 있을까. 저는 이날 산정현교회가 두 가지 부분에 설교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통상대로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고 그건 그것대로 은혜를 끼쳤을 거고 또 하나 설교는 기도하는 설교 조만식 장로님 설교입니다.

목사님 설교에는 가슴에 감동을 주었을 거고 조만식 장로님의 기도 설교는 울음과 함께 사람들을 뜨겁게 했습니다. 체면을 뒤에 하고 제자인 목사가 이렇게 면박을 줬을 적에 그걸 다 수용하고 오히려 감사와 회계 기도를 했던 조만식 교장선생님. 장로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입니다. 아마 제자와 스승 간에 이런 관계가 있는 건 오늘 우리가 옛날의 이야기로나 들을 수 있을지.

제자와 스승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분은 비록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 통일 하는데 기여를 못하고 순교를 당했고 목사님도 순교 당했습니다만 이분들의 지냈던 일화들이 교회나 우리 사회 전체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일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설교하는 방식은 강단에서만이 아닙니다. 설교하는 방식은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내 맘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한테 와서 배우십시오, 하는 말없는 조만식 장로의 기도와 그걸 유도했던 목사님의 설교 두 개가 합친 합작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연말입니다. 우리 정리를 해야 되겠는데 이 모든 정리를 하면서 오늘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거 다 인정합니다. 벗으란 뜻이 아닙니다. 버리란 뜻이 아닙니다. 왜 홀로 지고 고통 받으십니까. 함께 져줄 사람이 있다는데 아까 조장로님의 겸손한 마음이나 죄인들 끌어안는 마음이나 그리고 또 예수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매 맞는 장면이나 빌라도 총독한테 비난받는 장면이나 사랑하는 제자한테 배신당하는 장면이나 모든 것을 예외로 하고 나는 오직 그대들과 함께 이일을 하고 싶다.

세상에 구원을 위해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오늘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의 짐을 벗어서 예수님에게 주고 그 분이 지었던 짐을 우리가 대신 쌍방의 어깨 속에 한번 걸머져 보십시다. 자기 스스로 만든 함정과 아집 속에서 얼마나 우리 고통당했습니까.

나만이 옳다고 하는 아집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고통을 당했습니까. 딴 얘기 할 것 없이 오늘 어제 뉴스를 봤더니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처형을 당했단 보도를 봤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비극의 한 상징입니다. 이라크가 우리 세상 모두의 진실로 평화를 위한다면 미국은 빨리 이라크를 스스로의 손에 놓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꼭 이겨야 된다하는 강박관념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이제는 들어갈 때가 있으면 내놓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한테 한번 맡겨 봅시다. 세계의 가장 큰 권력자는 이제는 놓아야 합니다. 놓고 스스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스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함께 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신앙 있는 대통령의 결단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스스로의 못 배운 것 이상한 고집과 콤플렉스 때문에 서울 강남의 잘사는 사람 또 이 땅의 많이 배운 사람 또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질시하고 적대하기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이니 많이 쓰십시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선행을 베풀도록 노력하십시오. 환경이 좋은 사람들은 환경이 못 된 사람들한테 어떻게 하면 환경 좋은데서 자식 기를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가진 것을 질시하고 적대하기보다 많이 쓰고 많이 베풀고 그래서 한번 선을 이루어보십시다.

이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고 거기서 배울 거 아닙니까. 우리의 권력자도 외국의 권력자도 혼자만이 가지고 결단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의 멍에를 함께 배우는 결단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자만이 끙끙대면서 이 세상의 역사를 다 지배하겠노라고 내 나름대로의 의욕가지고 세상을 다 다스리겠다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의 이념이나 강박관념에 종의 멍에를 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유 하십시오. 함께 하려고 생각 하십시오.

모든 세상 사람이나 모든 이웃과 함께 멍에를 지려고 하지 혼자만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 못된 일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여러분을 멍에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멍에에서 벗어난 자유는 육체의 정력을 위해서 쓰면 도로 멍에가 됩니다. 받은 자유를 이웃을 위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사랑의 힘으로 활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고 복 받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과 아집과 분노와 질시와 자학, 이 모든 질병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예수의 권력을 믿고 힘을 믿고 함께 멍에를 지고 베풀고 사랑하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함께 나가자고 얘기하십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 우리나라의 권력자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가진 나 자신의 우리들 자신에 혹시 아집이 있으시면 오늘 버리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와 멍에를 함께 지고 사랑으로 서로 함께 복된 생활 이어가는 그런 결단을 금년에는 좀 해보십시다. 오늘 결단은 내 년엔 밝은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한테 오셔서 짐 지겠다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겁니다. 함께 세상을 이끌어가고 싶다.

함께 당신들의 인생의 항로를 함께 가고 싶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내년에는 밝은 희망을 주고 싶다. 예수님이 기다리십니다. 한번 그분과 어깨를 같이 해보십시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진실로 자유 함을 얻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신앙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년에는 좀 밝게 한번 살아보십시다. 기분 좋게 살아보십시다. 그리고 앞을 향해서 살아보십시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볍고 쉼이 있다. 함께 쉬어보십시다. 앞날을 계획하십시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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