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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연말정산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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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006 년 마지막 주일이면서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마무리를 잘해야 새해를 힘차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꼭 해결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질문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잘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죄지은 형제를 어찌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합심 기도하는 것입니다. 푸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푸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에 베드로가 용서에 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의 질문 다음에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도 용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푸는 것이 용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푸는 것은 용서를 뜻하는 것임을 알아챘을까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고, 푸는 것에 대한 말씀은 일찍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 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똑같은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그 때는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추측해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땅에서 매고 풀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이 합심 기도요 용서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였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면 반드시 반복하시거나 잘 풀어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 번 들은 말씀을 다시 듣게 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껏 용서에 대한 범위를 넓혔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그것은 정말 성인군자처럼 마음을 넓혀서 자비를 크게 베푸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일곱 번까지 반복해서 짓는 사람도 지독합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일곱 번까지 참는 사람도 대단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번이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꽉 찬 수입니다. 세상사에서 일곱까지 끌고 간다는 것 자체가 희귀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보통 마음 좋은 사람들은 세 번까지 참아줍니다. 네 번 너머까지 참는 것은 종교적인 용서에 해당합니다.

어떤 강력계 형사가 있었습니다. 강도 살인범을 많이 상대하다가 보니 성격이 포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형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성격이 온순해졌습니다. 전에는 참지 못하는 성미였는데 은혜를 받고 나더니 확 달라졌습니다. 이 형사 부인은 항상 눈치를 보며 마음을 조아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은혜를 받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져서 제주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귀포 옆에 중문단지를 관광하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낙타를 타고 사진을 찍는데 삼천 원을 받는 곳이 있었습니다. 낙타를 타고 중문단지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만이천원이었습니다. 이 형사 부부는 기분이 좋아서 낙타를 타고 한 바퀴 돌게 되었습니다. 낙타에 올라타고 조심스럽게 가는데 몇 발자국 못가서 그만 낙타가 벌떡 일어서 버렸습니다. 그 통에 형사는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때 같았으면 화를 냈을 텐데, 먼지를 털고 나더니 낙타 앞에 가서 손가락 하나를 보이며 ‘한 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낙타에 올라탔습니다. 부인은 이것을 지켜보면서 우리 남편이 정말 변했구나 하며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낙타는 다시 몇 발자국 못가서 또 벌떡 일어났습니다. 역시 나가떨어졌습니다. 이번에도 먼지를 털고 낙타 앞에 가서 손가락 두 개를 보이며 ‘두 번’ 하는 것입니다. 다시 낙타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이 낙타가 이 날은 사람을 태우기 싫었는지 또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나가떨어진 형사는 일어나 먼지를 털더니 또 낙타 앞으로 갔습니다. 갑자기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는 낙타 머리에 대고 ‘빵’ 쏴버리고 말았습니다. 낙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이 남편이 하는 행동이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이 몇 천 만원 하는 낙타를 그렇게 쏴 죽일 수가 있냐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쩐지 사람이 이제 좀 변했나 했더니 역시나 그 버릇 어디 갔냐며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형사 남편, 일절 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부인 앞에 손가락 하나를 내 보이며 ‘한 번’ 하더랍니다.

세 번까지는 봐준다는 것이죠. 세상의 용서는 세 번이 꽉 찬 용서입니다. 경미한 음주 운전도 세 번 걸리면 삼진 아웃됩니다. 면허가 취소됩니다.

세 번이면 족한 용서인데 베드로는 그래도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상상초월이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490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실제 490 번 세면서 용서하긴 어렵습니다. 일곱이란 완전수를 곱했으니 끝없는 용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용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한계로는 그렇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용서입니다. 한 번 용서해 주었는데 또 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은 반성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용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을 넘기게 된다면 죄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반성도 의미가 없고 용서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 무례한 죄인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파렴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감당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주십니까? 어떻게 우리보고 성인과 같은 용서의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해답을 이야기로 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달란트는 무게 단위입니다. 무엇을 재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데 보통 금으로 봅니다. 한 달란트는 40Kg 정도입니다. 금 한 돈이 3.75g입니다. 요즘 금 한 돈에 90,000원 합니다. 일 만달란트는 약 1억 7백 돈, 96조 3천 억 원 정도입니다.
김우중 씨가 대우그룹을 경영하면서 분식회계 조작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97 년 당시에 조작한 액수가 무려 41 조에 달합니다. 그는 얼마 전 징역 8 년 6 개월에, 벌금 천만 원, 추징금 17 조 9253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한 개인이 회사와 국가 경제에 끼친 손해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는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그저 사회적 용서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액수의 빚은 갚을 수 있는 단위가 아닙니다. 그런 빚을 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다름입니다.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끌어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추궁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저 죄인인지라 엎드려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며 절했습니다.

말로는 갚겠다고 했지만 이것은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임금은 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놓아주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는 엄청나고 놀라운 기적 같은 탕감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탕감을 받고 풀려 나가다가 길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전에 이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백 데나리온도 적은 돈은 아닙니다. 천만 원 정도 됩니다. 이 탕감 받은 자는 이 돈을 받아낼 요량으로 친구의 멱살을 틀어쥐었습니다. 친구는 엎드려 통 사정을 했습니다. 참아 달라, 갚겠다 했습니다. 조금 전에 자기 처지와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처신을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친구를 빚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민망히 여겼습니다. 자기는 큰 은혜를 입어 놓고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적은 은혜도 베풀 줄 몰랐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은 안 임금이 어찌했겠습니까? 노하여 이 사람을 다시 잡아 들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이 이야기 속의 임금은 천부 즉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다 탕감 받았습니다. 우리 죄를 빚진 돈으로 따지면 평생토록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죄 값이 이렇게 큽니다. 우리는 이 죄 값을 치르지 못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다시 사는 방법은 누군가 대신 이 죄 값을 치러주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내가 죄 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내 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가 깨끗하게 씻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죄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어떤 죄를 짓고 살았습니까? 그 죄를 더 이상 짓지 마십시오. 죄를 짓기를 멈추십시오. 그 죄를 그대로 주님께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김대희라는 코미디언이 있습니다. 그가 건강을 체크해주는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담배를 한 갑 반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그의 건강을 체크해서 빨간색 경고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피워 문다고 했습니다. 사회자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었습니다. 본인 입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봐도 쓰레기 같아요.” 그는 그 말로 주변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그러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마당에 웃고 넘어갈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인 줄 알면서 여전히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말립니다. 남편이 말립니다. 아이들이 말립니다. 부모가 말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계속 합니다. 우리는 그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제 멈춰야 합니다. 더 이상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만약 돌아가서 여전히 그 죄를 반복하고 있다면 결답합시다. 새해에는 이 죄의 사슬을 끊겠다고 결심합시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의지와 힘으로 이기게 해달라고 엎드리기 바랍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무한히 용서할 수 있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워낙 큰 죄를 용서받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형제가 내게 짓는 죄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무던히 참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같은 죄를 수백 번도 더 회개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죄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해서 490 번을 넘긴 것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큽니까? 그걸 다 참으시고 여전히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해 줍시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의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기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이렇게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우리의 서약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어야 하나님도 길이 용서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큰 죄를 탕감 받았기에 우리는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내가 용서할 것은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일 만달란트 대 백 데나리온의 비교할 수 없듯이, 우리의 용서도 그렇습니다.

용서 받아 본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냉정해서 남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잊은 것입니다. 이 일을 주변 사람이 볼 때 민망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고발이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35 절 마지막 절의 하나님의 진노는 세상 종말에 있을 심판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비결로 용서와 관용을 꼽았습니다. 그는 청년 때에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액의 공금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좌석이 없어서 통로 바닥에 앉았는데 잠간 조는 사이에 가방이 밖으로 튕겨나갔습니다. 그것도 기차가 개울을 건널 때였습니다. 다급해진 카네기는 기관사에게 뛰어가 호소했습니다. 이해심이 많았던 기관사는 기차를 멈추고 후진시켜 주었습니다. 기차를 멈추는 것도 후진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카네기는 개울가에 떨어져 있던 가방을 찾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기 경영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저지르지 않는 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의 실수를 품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각오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경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절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값싸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매몰찬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진 고통 가운데 이루신 예수님의 용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죄로부터 해방됩시다.
이것이 한 해를 보내기 전에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우리들의 연말 정산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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