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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사랑으로 마감하는 2006년 (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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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입니다. 누구나 해마다 이 날이 되면 한번쯤은 자신의 살아온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에 잠길 것입니다.
과연 내가 바르게 잘 살았는가, 올해 내가 이룬 일은 무엇이고 이루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뻤던 일은 무엇이고 슬펐던 일은 무엇인가 나름대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룬 일에 대한 성취의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의 미련이 더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감사가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과 새로운 각오와 결의가 주님 앞에 새롭게 이루어 질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할 때 올해도 우리들은 새로운 일을 계획하여 내년에 그 일을 이루고자 하실 것입니다.

한해가 우리에게 이렇게 지나가고 다가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도 지난 주간에는 나름대로 삶을 한 번 정리해 보셨을 것입니다. 내 생활의 주변도 정리하셨을 것이고 삶의 소품들도 나름대로 정돈하셨을 것입니다. 마음도 준비하셨을 것이고 무엇인가 삶을 정리해서 또 새로운 한 분절을 맞이하자하는 마음이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한 분절을 마감하면서 삶에 대한 특별한 마감 재료,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모든 일을 다시 한 번 정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결국 어떤 일이 결과로 주어졌어도 그 결과 자체가 우리들에게 누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면 그 결과를 해석하여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가를 우리는 그때 비로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한 해의 결실이 있어도 이 결실을 가지고 귀하고 기쁜 일이다 라고 여기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 이룬 똑같은 결실에 대해서도 참 이건 슬픈 일이고 정말 안됐다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마음에 슬픔이 올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항이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 해석을 통해서 의미를 지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006년을 보내며 마지막에 서 있을 때 우리가 생각하기를 내 한 해를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받아들이겠는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심정을 가지고 2006년을 결산할 때 우리 마음에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새로운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여 무한히 베푸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사랑해 주셔서 그 백성들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죄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고 사랑과 용기와 소망과 기쁨을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인간들에게 두 가지 가장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요점은 결국 사랑입니다. 두 가지는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느냐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성령안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들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게 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들을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 마음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조차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보니까 일 년에 수십 차례 결혼주례를 서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새로 결혼하는 두 젊은이들을 꼭 권면합니다. 무엇이냐면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하겠습니다하는 예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전개되는 것은 무엇이냐면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에 대한 노력과 의지를 통용하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그냥 마음 흘러가는 대로 돼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의지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각오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에게 ‘나를 이해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순간 그 사랑은 깨지는 법입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하겠습니다 하고 마음에 각오하고 결심해서 이해하기로 노력하고 이해해야만 우리는 이해하고 결국 이해함으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함을 고백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고백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를 악물고 따라서 합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죠? 당신은 이해받지 못 할 인간이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하는 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하십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로 결심해야만 이해하지 저절로 이해가 안돼요.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만두면 죄 짓기 합당하구요 이해받을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라고 각오하고 이해해야만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힘을 발휘하여 의도적으로 사랑을 이루고 베풀고 살기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7절>말씀을 가지고 2006년 한 해를 보내며 그 모든 것을 의미 짓는 이 시간에 우리는 사랑으로 의미 짓고 한 해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참고 믿고 기대하고 견디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우리의 2006년도의 삶을 마지막으로 포장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은혜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은 가진 것이 없어서 지옥이 아니고, 이 세상은 내가 무엇인가 이루지 못해서 지옥이 아니라, 이 세상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는 것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아무리 척박하고 곤고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 성경을 보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상대방에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감내하고 서로에 대한 보호와 방어와 방패가 되어주며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며 덮어주고 방어해주는 것입니다.
기분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에 의해서 우리가 휩쓸리게 되면 우리는 참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이 있다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 혹은 행동에 모든 생활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참고 인내하여 사랑을 이루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건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건, 아내와 남편의 사랑이건, 아니면 어떠한 관계의 사랑이건 이러한 어려움을 감내하는 즉, 참는 역사가 없을 때 그 사랑은 유지되고 존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하며 특별히 오늘 본분을 묵상하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꺾고 감내하기 어려운 것을 감내하며, 보호하고 방어하며 지켜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 시원한대로 말해 버리고 행동하고 유지되거나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하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상대의 허물과 죄가 보이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한 것이 아니라 거래했을 뿐입니다.
사랑한다면 이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당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 말은 이해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난 당신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라고 라고 말하지 말고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의지요 노력이요 애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비극은 사랑하지 못하고 거래하다 결국 사랑 한 번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랑의 법을 터득하셔서 우리의 삶 전부가 사랑이 된다면 우리는 성도로서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는 선언은 많지만, 그 선언을 실천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실천하지 못하기에 선언이 더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은 참고 인내하고 받아주며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세상을 탓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참지 못하는 것은 내 연약함과 내 인내의 부족이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힘과 새 은혜를 얻는 것이 더 옳습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참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먼저 상대에 대한 존중입니다. 내 생각의 기준과 상상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판단치 않고 존중할 때 상대에 대한 이해와 기대와 힘을 줄 수 있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국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의 법을 터득하면 우리의 삶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우리는 사랑에 미숙하며, 챙길 것 없는 세상에 얼마나 챙기겠다고 챙기며, 시원할 것도 별로 없는 세상에 얼마나 시원하겠다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해하고, 얼마나 이겨보겠다고 우리는 안타깝게 동동거리고 다니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우리 마음속에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어떤 계획이 있고, 나를 용서하고, 나를 섭리하셔서 최고의 아름다운 일을 이루실 것처럼 하나님은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존중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존중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이해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참고 인내하여 그의 모든 삶을 세워주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마음 시원한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심정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는 멀리 떨어져 결국은 사단이 만들어놓은 구조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참는 것은 아픔이나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즐거움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위한 참음과 보호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즐거운 고통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고 사단이 주는 것은 마음의 분요입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없을 때는 어떤 생각하든지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내 마음이 평화로울 때, 평강할 때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셔야 됩니다.

내 마음이 분요로울 때, 평강이 없을 때,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 것은 나중에 크게 후회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분요로운 심정에서 원수 갚으려는 마음 뒤틀린 정서를 사람에게 투사하여 보상받으려는 죄악의 심리만 남게 되면, 결국 내면이 파면되고 다른 이들까지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아서 죄가 아니고,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아서 죄가 아니고, 우리 마음이 주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우리에게는 가장 어려운 죄악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섭섭함과 미움과 분노가 생기면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완성해 갈 수 없으니 우리는 언제든지 돌을 쪼아 조각을 만드는 심정으로 우리 마음의 섭섭함과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여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인격의 완성이며, 주님의 은혜와 믿음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믿으며 믿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뢰가 사랑입니다. 믿어주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믿음과 신뢰가 부족한 것이고 결국 이것은 상대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믿을 수 없을 것 같아도 믿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믿을 것 같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믿어질 때 그것이 우리들에게 사랑이 있는 징표입니다. 내가 믿을 것은 믿고 믿지 못할 것은 못 믿겠다는 것은 단순한 사랑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지는 겁니다. 사랑은 창조입니다. 사랑은 거짓말을 진실로 바꾸어갈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변변치 못한 사람을 우아하고 유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믿을 만하지 못해도 자식을 믿어줍니다. 왜냐하면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 없으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하니까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원하고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하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 조금 더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고 이와 같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완성해 가며 결국 주님의 사람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삶의 작품이 어떻게 한 획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수많은 아픔과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조금씩 완성하여 하나님 앞에 사랑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믿기로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기 때문에 그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의 삶을 인도하고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믿을 만한 존재라서 우리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믿어줄만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시고 따라서 그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압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앞에 보여 질 일을 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고 다 무서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심지어는 그중에는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만찬을 베푸셨고 끝까지 나를 기념하라고 포도주와 떡을 떼어주며 그들에게 성찬의 아름다운 예식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주었기에 제자들은 후에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게 되고 주님을 위하여 모두다 순교의 자리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사람은 평가하고 믿어준 대로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 평가하고 그렇게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들을 믿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안 되는 것, 실수하여 약점만 보면 어떻게 믿겠습니까? 장점과 잘 하는 것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임과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우리는 믿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을 알면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믿게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결코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적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상대를 믿지 못하게 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게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는 의지적으로 믿어주고 기대해야 합니다. 믿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사단의 장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믿어주고 신뢰한 것은 끝까지이며 거래가 아니고 체념이 아니라 진실한 기대입니다. 조금만 기쁨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큰 실망거리가 있어도 작게 실망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된다는 것은 내 마음에 얼마나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고 삶의 상황을 바라보고 이 온 세상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온 세상이 따뜻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겠지 라고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믿어주어야만 결과적으로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나는 나를 믿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자신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건 여러분이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섭리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를 못 믿는 사람입니다. 아주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여러분 스스로를 믿으세요. 언제든지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나는 내가 가장 바른 판단을 한다고 믿는다라고 생각하며 자신 있게 결정하세요. 그리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기쁨으로 흔쾌히 결과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늘 우유부단해요.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그러지 말걸 하고 늘 실패자로서 늘 부족하고 안타깝게 살아간단 말이에요.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분을 믿으세요. 그리고 어떤 결과에도 여러분이 그 결과를 최선을 다해서 이룬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본보기라고 믿고 기쁨으로 수납하며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금요심야기도회를 금요일마다 하지 않습니까? 성도님들과 이렇게 다 인사하고 나가면 늘 청년들이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기다려요. 제가 한 번씩 기도해 주거든요. 매주 한 200명 정도씩 남아서 기다리는 것 같아요. 목사가 한 번 더 기도해주는 기도 받으려고 하는데 제가 그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몇 년 째 매주 똑같은 기도를 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 이들이 믿음 안에서 바로 자라고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 앞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자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역사와 사회 속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인물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기도를 하는데 제 마음에는 정말 그렇게 믿어져요. 그리고 우리 청년들도 정말 그렇게 마음에 믿고 기도하는 대로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수년 동안 매주 똑같은 기도를 했는데 지루하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는 순간 마다도 정말 우리 청년들이 믿음의 백성이 될 것 같아요.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일을 보리라.’ 그런 마음의 각오가 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믿는 겁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으로 굳건히 서 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유나 집착이 아닙니다. 자유이며 놓아줌으로 진정한 구속을 이루는 것이며, 품어줌으로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소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를 베풂으로 진정한 끈을 가지고 있고 진정으로 놓아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함께 가는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믿어야 내 품에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언제나 내 품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든 삶인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대하는 겁니다. 자꾸 기대돼야 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하지만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특성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당신한테 실망했어.”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나 당신 사랑하지 않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기대하다 가는 겁니다. 어려움에 빠져도 그것을 구해주지 못한 내 탓을 해야지 ‘그것을 못해’ 하고 상대를 비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대하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제일 훌륭해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가장 훌륭해 보이고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것입니다.
‘아휴, 이 아이가 언제 밥벌이나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백성이 되어줄까? 내가 저 아이를 키웠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 그게 사랑이죠.
‘정말 얘가 제대로 밥벌이나 하려나, 제대로 사람구실이나 하겠나.’ 이건 기대하지 않는 것이에요. 기대하는 것은 정말 그 아이가 아무리 어떤 상황이 있어도, 우리주변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어떤 진흙 탕 같은 상황에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서 은혜가운데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겁니다. 기대 받을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겁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한 번 해 봅시다. 정확히 보시고 “나는 당신을 기대합니다.”
자, 우리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도 나를 기대합니까?” 전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우리는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요. 우리가 꿈을 이룸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함이며 그 꿈을 같이 이루고 싶어 하여 기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방법도
내 방법대로가 아니라 그의 방법대로 도와주는 겁니다. 내 방법대로 ‘이렇게 해’ 하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입니다. 사랑은 이해를 구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내 뜻을 접고 맞추어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차피 한 평생 소리 지르다가 내 뜻 이루기 위해서 고함을 치다 가는 것인가, 아니면 내 앞에 있는 사람 행복하게 해주고 그 행복을 통해서 내가 많은 사람에게 그 행복을 같이 나눠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것은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기적을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이룰 기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삶의 기운이 다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삶의 기운이 남았다면 끝까지 기대하는 겁니다. 끝까지 참고 믿어주고 그리고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의 쓴잔을 피하려고 하시다가 결국은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절벅거리며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우릴 위하여 그의 삶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그리고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는 것이고 참음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진심으로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내의 힘을, 견디는 힘을 줍니다. 고통이 아니라 즐겁고 감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거예요. 끝까지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내 자신의 마음의 생각도 어려움도 주장도 다 참고 의심과 미덥지 못한 불신과 어려움도 다 참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인내는 결국 내 마음의 생각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을 빼앗는 자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을 정화시켜 사단이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가슴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가 아닙니다. 더구나 완성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일반적인 대다수가 아니라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오늘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으로 꽃피워집니다.” 누구든지 뜨거운 마음이 있어서 사랑을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시작해요.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사랑을 시작했으면 그 유지는 내 마음의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열정도 식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지를 가지고 그 사랑을 유지해야 되요. 그리고 유지할 뿐 아니라 헌신적인 희생을 가지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 꽃피워가는 거예요.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의지로 유지해야 되고 마침내 헌신과 희생으로 꽃을 피우고 완성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시작은 할 수 있습니다. 유지하고 완성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디셔야 합니다. 내 마음에 외부적인 어려움을,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아픔들을 품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이루시길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모든 것을 인내하고 견디셔야만 합니다. 사랑은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값을 치루고 이루어지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값없이 받는 것 같지만 값없이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의 피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값없이 받는 것이지 반드시 그것은 값을 치룬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소유의 집착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자유를 누리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대한 사랑을 그를 집착하고 묶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자유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 깊은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고 소중합니다. 따라서 올 한해를 보내면서 사랑의 눈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를 바라보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사로 마감할 수 있습니다. 내게 대했던 모든 사람을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역자들에게 꼭 이런 부탁을 합니다. 우리 사역을 하면서 이 세 마디 외에는 다른 말하지 맙시다. 딱 세 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우리 오늘 따라서 합시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 세 마디면 우리 삶은 다 대변되는 것 같습니다.
구구하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래서 어떻고 저래서 어떻고 구구한 변명은 우리를 더욱 더 누추하게 만들 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여러 가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꾸짖어주셔서 제게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칭찬 받아도 감사하고 꾸짖음을 받아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 다음에는 정말 마음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대이상 이루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상대가 나로 인해서 마음 상했다면 나로 인해서 마음 기뻐하지 못했다면 죄송한 겁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더 노력하고 애써서 잘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내가 여기 아니면 일 할 때가 없어? 내가 당신 아니면 사람이 없는 줄 알아? 이런 마음은 하나님 앞에 쓰일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떤 비난을 받아도 내가 어떤 아픔을 겪어도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용기고 힘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입니다. 상대의 마음이 상했다면 그것은 내가 잘했건 잘못했건 의미가 없어요. 그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고 치료해주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건 놓을 수 없어 하는 것은 반듯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불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뜻을 이루어주는 것,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늘 생각하는데 우리 한 번 오늘 따라서 합시다.
“은혜받기로 작정한 사람은 언제나 은혜 받고 시험받기로 각오한 사람은 늘 시험받습니다.” 이게 은혜세계의 법칙이에요. 은혜받기로 한 사람은 모든 것 다 은혜 받아요. 그런데 시험받기로 한 사람은 시험받기로 작심한 사람이 있어요. 내가 모든 것 다 시험 받으리라. 이런 사람들은 옆의 사람 옷 색깔 때문에도 시험 받아요. 옆의 사람이 머리가 길면 그것 때문에 시험받고 옆의 사람 머리 짧으면 그것 때문에 시험 받아요.

사랑하기로 각오한 사람은 언제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기로 한 사람은 거래하고 집착하고 소유 하려고 하는 사람 늘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돼야 되는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천국, 가정의 천국, 생활의 천국, 지상의 천국, 주님이 영원히 거주하시는 내세의 천국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 될 뿐입니다.
<요한일서 4장 21절>을 보면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으로 꽃피워집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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