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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준비된 이들에게 은혜를 주심 (행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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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이들에게 은혜를 주심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사도행전 10장은 선교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10장에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만 임하였던 성령의 은혜가 이방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곧 성령의 역사가 유대인들에게만 전속(專屬)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제일먼저 적진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있습니다. 그 화살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화살을 ‘효시(嚆矢)’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보편적인 은혜의 역사의 효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I. 본문의 배경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 위대한 성령 부으심의 효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두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다름 아닌 ‘베드로 사도’와 ‘고넬료’라고 하는 이달리야대의 군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품게 되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담당한 자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택하셔서 이방 선교의 효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장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의 역사를 봅니다.

이방 선교라는 특별한 소명을 주어서 그 역사를 이뤄갈 사람은 바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대신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문을 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머리였고, 그리고 가장 유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회심은 하였으나 아직 예루살렘 교회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도 바울을 이 사역에 사용하셨다고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이방인 선교를 외치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유대적인 사람, 가장 구약적인 사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인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파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와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의 중대한 편견이 깨트려지게 됩니다. 첫째는 유대인들만이 역사의 주인공이며, 나머지 모든 이방인들은 엑스트라에 불과하다고 믿는 구약적인 사상에서 온 인종적인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사실 구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둘째는 신학적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구원자라는 신학적인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이렇듯 인종적, 신학적 편견이 깨트려진 베드로가 직접 사도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 하였더니 모두가 믿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방 선교의 새 장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기도의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

우리는 이방 선교를 문을 열기 위해 베드로를 사용하신 이유를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이방인인 고넬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들을 사용하셨을까요?

A.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심

첫째로, 이방 선교를 문을 여시기 위해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선 성경은 이 고넬료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질만한 두 가지 모습이 언급되어 있는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구제한 것과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넬료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인 동시에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효시가 된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열어주신 환상으로 시작됩니다. 큰 보자기가 내려와 펼쳐지는데 그 속에는 율법이 지정한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구속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바로 그때에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베드로와 간절히 기도하는 고넬료, 이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기도 중에 서로 통하게 하시고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첫 장을 연 도구가 되었던 사도 베드로도 영광의 막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거니와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영광을 펼치는 디딤돌이 되었던 고넬료 역시 구속사적으로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큰 역사를 이루실 때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무디(Dwight Lyman Moody) 같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도 사용하시고, 조나단 에드워즈나 오웬(John owen)같은 세기의 천재들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와 같이 설교를 한 편 하고 나면 엄청난 피를 토해야만 하는 약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60 여 년 동안 한결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났던 요한 웨슬레(John Wesley)와 같은 건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바울과 같이 논리적인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베드로와 같이 열정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그들이 남자든 여자든, 지성인이든 지성이 좀 모자라든, 건강하든 질그릇같이 연약하든 그들의 모든 인격을 관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바로 그 사람,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기도 속에 나타나면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그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 드높은 지위와 명예는 없으나 그가 기도할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매우 소중히 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기도하려고 엎드린 사람들의 등을 밟고 지나가신 하나님의 발자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기도의 중요성은 똑같습니다. 끊임없는 무릎 꿇음으로 일평생 깊고 진실한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에 열심을 내었던 때도 있는가 하면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잔꾀를 부리던 때도 많았습니다. 은혜 많이 받고 창공을 높이 날 때가 있었는가 하면, 받은 은혜를 모두 소진하고 깊은 수렁에서 신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인생의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구함으로써 영적인 돌이킴의 기회를 기도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기도를 하던 그때마다 우리 인생의 전환기가 이루어졌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은 비록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고 있으나, 인생의 기로에 서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자기를 다 쏟아 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기도를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에 그 때에 기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배를 몰고 바다를 항해한다고 합시다. 커다란 암초가 배를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핸들을 감아서 키를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핸들은 돌리지 않고 그냥 ‘정지’만을 외친다면 그 배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뭔가 큰 난관을 만나거나 전환점이 오려고 할 그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실제적인 돌이킴을 위한 기도 없이는 암초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배를 향해 ‘정지!’만을 외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실제로 핸들을 감아서 방향을 돌리십시오. 그 일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인생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실 기도하는 일은 굉장히 힘듭니다. 정말이지 땅 파는 일보다도 더 힘듭니다. 땅은 그냥 힘을 들여서 흙을 퍼내면 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기초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여태까지 자기 사랑으로 펄펄 살아 왔는데, 그러한 마음으로 조아리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암초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도 핸들을 돌리지 못하고 부딪혀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참으로 완고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한사람이 살아가고자 하는 인생의 갈 길을 돌이키는 것은 공전하는 지구의 궤도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기도가 이러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줍니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기도해야 할 순간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늘 기도하지 않는 사람,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서 생애적 어떤 전환점들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역사가 아직 없었을 때에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고 성령 부어주시는 영광스러운 역사는 바로 기도의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저들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결심하게 되는 이 엄청난 전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두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깊이 기도하게 하시며,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선교의 계획들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영광스러운 비전을 보여주셔서 그것을 마음에 품게 하십니다. 그것을 이루는데 필요한 자원들도 공급해 주십니다. 꿈이 부족하면 꿈을 꾸게 하시고, 물질이 모자라면 물질을 채워주시고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셨습니다. 재능이 부족하면 도울 일꾼을 보내주시고, 복음을 전할 영혼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강력하게 붙들리어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도 긴 인생을 산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많은 자원과 좋은 계획을 가지고 긴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강력하게 붙들리어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가 성취한 하나님의 뜻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크기가 곧 인생의 의미의 크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단지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려는 착한 열망을 가지고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자기의 삶을 합치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뤄 가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각자 하는 일은 달랐으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거룩한 생활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소원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외에 그들의 기도하는 심정 안에 다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징검다리 삼아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선교의 위대한 장을 여실 것입니다.

B. 기도로 선교함

둘째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선교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고넬료 집안의 부흥은 이방 선교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모습은 이런 전환점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이 고넬료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간절히 은혜를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의 시간들 중 많은 부분들이 비효율적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몇 시간을 기도하였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싫증을 간직한 채 능력을 상실한 기도를 너무나 많이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실질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마음을 다 바쳐서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간직하면서 사는 그것, 그것이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중의 하나입니다. 일단 영혼에 싫증이 들어오게 되면 열렬함이 사라져갑니다. 영혼의 싫증은 기도의 열렬함으로 이겨야 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육체의 게으름은 부지런함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는 마음이 이제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간절함이 우리 마음 속에 꽉 차있으면 단번에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옵니다. 고넬료와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베드로를 청해왔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베드로가 여기에 왔고, 그리고 이제 그 집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부어졌던 그 비범한 성령 강림의 역사와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재현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비범한 성령의 역사가 부어지는 준비치고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것은 현수막을 내걸고 신문잡지에 광고를 내보낸 수만 명이 모인 대형 집회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집안 식구 몇몇이 모여서 예고도 없이 이루어지는 가정 사경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그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모든 이방의 사람들이 성령 부어주심을 경험할 때마다 성령의 그 놀라운 은혜는 항상 말씀을 타고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마음속에 아로새길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찾아보면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에도 영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생기기 이미 오래 전에 신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동양에 전파되기 오래 전에도 중국의 고서를 찾아보면 성령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처럼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적인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선교의 역사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시키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부패한 삶을 고쳐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죄와 타락으로 인해 병든 본성을 선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오직 인간의 영혼과 본성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에 의한 선교의 역사는 마치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습니다. 기차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철로가 깔린 곳으로만 달립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기도의 레일을 따라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섬김의 계획이 있다면 우리는 세운 계획만큼 더 많이 마음을 바쳐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섬김의 계획들은 궁극적으로는 선교를 위한 것이며, 선교는 성령님의 함께 하시는 역사 없이는 일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만이 이러한 선교의 목적을 성취하게 합니다. 마음을 바쳐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III. 은혜 받을 준비

그렇다면 그 성령의 역사를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를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A. “주께서”

첫째는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고넬료 집안에 성령을 물 붓듯 부으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교할 때 나타나는데, 그들이 모인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하사 성령을 부어주시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들이 모인 집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조금 길어지니까 청년들이 안절부절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연극표를 사놓고 일찍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일어납니다. 분명히 극장구경을 가려고 했는데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극장이 재미있습니까, 하나님을 뵙는 게 더 재미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극장표를 찢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우리 자신을 잘 예비하지만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는 것과 같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주권은 주님이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B. “당신에게 명하신 바”

둘째는 고넬료의 집안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일어난 일인데, 이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먼저 말씀하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계시를 보이시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보여주시지 베드로에게 먼저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한 공동체로 묶으시는 조건이 이 땅에서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임이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잡지에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지금의 교인의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 그림을 게재했습니다. 먹자골목처럼 교회가 쭉 펼쳐져 있는데 그 교회 앞에서 배가 잔뜩 튀어나온 교인들이 ‘꺼억’ 하면서 이빨을 쑤시면서 걸어 나오는 그림이었습니다. 먹자골목에 펼쳐진 교회는 저마다의 간판을 붙이고 있었는데, 찬양전문교회, 훈련전문교회, 선교전문교회, 설교 전문교회, 봉사전문교회, 구제 전문교회 등등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잘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마다 교인이 돌아다니면서 각기 개별적으로 어디서든지 간에 은혜를 받고 주일이면 모입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이면 각자 흩어집니다.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함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항상 개별적으로 가가호호 방문하셔서 당신을 만나게 하시지 않고, 그들 모두 모으고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의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이 집에 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전달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그 음성을 전달해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사경회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C. “듣고자 하여”

셋째는 믿음이 있는 곳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의심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는 자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사람들 속에 심어주는 도구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아코오’라는 단어인데 단순히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할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할 때에는 물리적으로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 알아들으면서 순종을 안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표현도 동일한 것입니다. 순종할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에 참석해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장 강력한 후보자가 누구인가 하면 내적인 복종의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제가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데 교회가 작을 때는 모든 교인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예배시간에 조는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상 교회는 출석하지만 도대체 변화가 없는 한 성도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그 사람은 실은 불신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불평은 설교가 너무 길다는 것과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딱 한 가지 처방을 내렸습니다. 네 번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되 설교가 끝이 날 때까지 제 얼굴을 보고 정신을 집중하여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말씀을 들리지 않으면 그때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렇게 제가 실험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적으로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듣는 사람만이 깊은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꼭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은혜를 주십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몇 해 전, 우리 교회에 복사기를 고치러 왔던 한 분이 간사들의 권유에 못 이겨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전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신자라 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렇게 준비되지 못한 그분에게도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준비가 은혜를 받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거의 떠밀리다시피 사경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보다는 미리 마음을 낮추고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은 훨씬 높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며, 은혜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아파하며, 영혼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고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거기에 명정한 반성이 있고, 참회를 향한 마음의 준비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씨 뿌리기 전, 기경된 밭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 그 마음의 밭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심령에 떨어진 말씀으로 싹이 나고 잎이 돋게 합니다. 그래서 황폐하기 그지없던 그들의 심령과 삶에 우거진 은혜의 계절이 오게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믿음은 말씀을 듣는데서 비롯되며, 그러한 들음의 작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D. “모든 것을”

넷째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은 내 영혼을 치료하시는 주님의 손길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목사님, 요즘 제게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해요” 이것은 마치 병원에 가서 아픈 증세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약을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환자의 의무는 의사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진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기를 진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선명하게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구나.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이것이구나.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이 내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주님이 보내신 칼이요, 내 상처에 부으시고자 하는 포도주와 기름이로다’라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모든 가족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유대인들도 아니었지만, 유대인들 중에서도 보기 어려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체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산 50년의 인생보다는 5일 동안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산 사람을 통해서 더 영광을 받으십니다. 대체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산 일만 명의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두세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는 있으나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말씀을 미리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 “다”

다섯째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큰 행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큰 아들은 사업이 바빠서 참석할 수 없다고 하고, 작은 딸은 자식들 때문에 못 온다고 하며, 또 작은 아들은 약속이 있다고 못 온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구심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비결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때에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을 함께 나누어가지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 장소에서 모두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그것도 정 싫으면 테이프를 사서 들으면 얼마나 편합니까? 게다가 요즘은 설교요약본까지 나오니 이런 생각을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제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함께 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는 것 자체가 한 교회의 성도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손이 닳도록 사정해야 합니까? 이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종합건강진단을 받은 제 동생의 이야기 입니다. 건강의 중요성을 늘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신경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기검진을 받은 동생이 지나가는 말처럼 자신의 친구에게도 이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 검진으로 위암 초기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참으로 시기적절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결코 망가지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고장 날 요인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며, 또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가 고장 났고, 어디를 치료받아야 하는지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온 가족 여름 수련회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가 되면 교역자들은 노심초사하며 밤잠을 설칩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은혜의 동산에 올라가는지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거기 모두 모이는 것이 아닙니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인생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물론 우리의 일상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급한 것부터 먼저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할까요?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개인의 삶이 확장된 것이 교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교회도 같이 고난을 당합니다. 교회가 연단 받으며 성숙해 나가는 것은 우리의 성숙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모두는 함께 이 자리에 서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그분은 아주 유명한 설교자이셨는데,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 않고 설교 테이프만 잔뜩 사서 들으니,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모두 회수하여 교회 마당에서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바로 그 시간에 게으름을 피우니 모두 태워버려야겠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거기에 서있는 것, 그 자체가 성도의 의무입니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접어 버릴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도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F. “하나님 앞에”

여섯째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빽빽한 구름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에 저들이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장엄한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시간을 단순히 즐겼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16). 싫은 것은 아닌데 좋으면서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간절히 부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저 빽빽한 구름 사이로 올라가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오십시오.” 그들은 모세에게 애원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떨림이 그들의 마음 안에 공존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더 이상 고칠 태도나 자세가 없는 것 같이 그렇게 온전히 그분을 인식한 사경회의 준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들을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러한 모습이 있는지 한 번 돌아봅시다. 정말 거의 없습니다.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왜 사경회에 참석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늦게 집회에 나타나고, 마치는 기도가 끝이 나지 않았는데 급히 예배당을 빠져 나가며, 설교 시간 내내 조는 사람들. 이 모든 행동들은 모두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드리고 있다는 생각과 의식의 부족이 아닐까요? 그래서 뛰어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선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고넬료의 가족들 앞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까? 이들 앞에는 베드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유대인인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주님 앞에 서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망했고 이미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사모함을 부어주시길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이번 사경회가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시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여 또 다시 충성되게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있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IV. 결론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주권으로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진리에 선포되는 그곳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사람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을 떠나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모으고 자신을 향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삶들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였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향해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헛된 것들에 대한 기대와 상념들을 떨쳐 내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에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계속하게 되고 이러한 교만과 불순종은 내면세계의 무질서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고 또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여 지혜 없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는 그 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분의 뜻을 좇아 사명을 완수하며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람 있는 삶을 통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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