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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자기 신앙의 결산 (딤후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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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무엇일까요? 단순한 은유적 표현인“인생은 나그네 길 이다”는 식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찾자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찾아보면 세 가지의 뜻으로 인생을 풀이합니다. ①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②이 세상에서의 인간생활 ③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말들로 표현합니다. 정리하자면“목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을 인생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목숨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존재가치, 의미, 목적을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곧 그 사람의<인생관>이요 참된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관이란 천차만별로 다양하고 다 각각입니다.

자라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일찍 똑똑한 모습을 보인다고 신기해서 좋아합니다. 한글도 알고, 뭐도 알고 신기해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조금 일찍 깨는 것은 조금 일찍 약아진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똑똑하다 싶은 사람들 보면 반드시 그 속에는 약삭빠른 모습이 있습니다. 가끔씩은 그런 모습은 아주 보기 싫거든요. 그런가하면 때로는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도 가만히 보면 그 생각이 무척이나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진국>인 사람이 똑똑해 보이는 사람보다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 가운데 있단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조금 일찍 깨는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오늘만 보면 모릅니다. 남들보다 조금 뒤쳐진다고 해서 끝까지 늦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조금 앞선다고 해서 끝까지 앞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 원리와 함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사람에게는 대개 두 가지 인성이 있다고 합니다. 마이너스적 인성과 플러스적 인성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왠지 모르게 만날수록 부담되고, 가까이 하기에는 힘들어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해서 자기 기분에 민감하며, 자기 기분에 항상 남이 맞춰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참 부담스럽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관계를 함에 있어서 자기사람 만드는데 목적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이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질 때는 냉정하게 돌변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을 마이너스적인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만나도 싫증이 나지 않고 또 만나고 싶고, 같이 있으면 헤어지고 싶지 않아 계속 있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자기 자신 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남의 기분을 생각해 주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자기 사람을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운 교제에 의미를 두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플러스적인 인성을 가진 사람이입니다. 자, 이 두 사람 가운데 어 떤 사람의 인생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부정적인 사고로 시간이 지날수록 퇴보하는 마이너스적인 인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긍정적인 사고로 시간이 지날수록 향상하는 플러스적인 인성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이런 플러스적인 인성을 확대시키며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세 명 나옵니다. 모두 사도 바울과 함께 사역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울에게로부터 멀어지는 다른 신앙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년을 뒤돌아보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을 가만히 보노라면 우리들 중에도 마지막이 언제나 아름답지 못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2006년의 마지막 날이자 주일인 오늘이 자기의 신앙을 결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오늘 본문의 데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몬1: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가리켜“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럴 만큼 바울의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고 바울의 칭찬을 듣던 데마가 어느 날 갑자기 야속하게도 바울을 떠나 버리고 맙니다.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실제로 본문4:10을 보면 사도 바울의 섭섭한 표현이 그대로 묻어나옵니다.“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데마는 데살로니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도로 옛날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가버렸다는 얘깁니다. 오늘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시작했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년 초에는 큰맘 먹고 신앙으로 출발 했는데 마지막 도착점에 와 보니 신앙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신앙은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보다는 그 다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 순리를 거슬러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나중이 갈수록 좋아지는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의 마가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13:13을 보면 전도 초기에 마가는 실패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복한 집 아들이 뜨거움만 가지고 따라 바울을 따라 나섰다가 중도에서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2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다가 결국 따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바나바는“젊은 사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말했고 바울은“팀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안된다.”고 잘라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를 신뢰하지 못할 청년으로 여겼습니다. 여기까지는 실패한 마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마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내게 필요하니라.”바울은 마가를 용서했고 결국 마가는 바울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마 마가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을 참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한 초라한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 한심한 자신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 즈음에 바울로부터 기별이 온 것입니다.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는 더 이상 무익한 자가 아니라 유익한 자로 살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인생은 야구타자와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입니다. 아무렇게나 휘둘러댄다고 공이 와서 맞아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잘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야구선수입니다. 비록 마가는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다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오늘 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인성이 부족합니다. 비록 잘못 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돌아가고자 하는 깨끗한 본성이 필요한 것이요 더 나아가 그 잘못의 지적을 약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에 대한 지적을 하면 그것을 독으로 여겨 그것을 도로 내뿜으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가는 나중에 바울의 좋은 선교 파트너가 되고, 바울의 곁에서 함께 동역하면서 마가복음을 직접 기록함으로써 실패했던 삶에 대한 보상을 합니다. 이렇게 나중이 갈수록 향상되는 사람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인생은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은 인생 일 것입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누가의 인생이 그러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믿음직한 것 같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이 표현 하나로 바울에 대한 누가의 충실함이 드러납니다. 전도자의 고달픈 길에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다 떠나갔지만 누가만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 끝까지 바울과 동행하면서 누가복음을 기록했으며, 바울 대신 글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죠. 뿐만 아니라 연약한 육체로 고생하던 바울의 주치의 역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누가라는 존재는 얼마나 훌륭한 존재였습니까? 꾸준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과 가치의 상징뿐만 아니라 신앙의 돋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과 꾸준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꾸준한 것은 아무나 안 되는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달려 온 여러분의 신앙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일시적인 헌신으로 순간을 모면해 왔는지 꾸준히 오늘까지 달려왔는지를 결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항아리에 조화와 생화가 함께 꽂혀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다. 조화는 얼핏 보기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생화는 항아리의 수분이 줄어들면 점점 시들어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생화는 비를 맞아 싱싱해지고 철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 그윽한 향기까지 피웁니다. 하지만 조화는 색깔이 바래지고 찌그러져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맙니다. 일시적인 것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깊은 마음의 세계까지는 움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화인생>과<생화인생>이 가려지는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과<조화신앙>과<생화신앙>이 판가름 날 때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조화처럼 살아온 인생은 무참히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성전 재료로 사용했던 나무가 나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입니다. 왜 이 나무로 성전을 짓는지는 아십니까? 백향목은 꾸준함과 단단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무는 썩고 좀먹고 벌레 먹어도 백향목은 오래 갑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백향목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나 신앙생활을 할 때 백향목처럼 견고한 관계를 나누십시오. 이용 가치가 있으면 사귀었다가 이용 가치가 없으면 외면하는 그런 인간관계는 절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신앙인이었다가 내 필요에 유익하지 않다고 신앙을 버리는 그런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백향목처럼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줍고 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행여 또 이런 있을까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녀 그만 이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데 큰 취미가 생겨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 일생이 결국 <넝마주의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자는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일년 동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살았습니까? 신중히 결산해 보시고 마음의 결심을 새롭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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