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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목숨을 걸고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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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시작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송년주일이 되었다. 입당 봉헌예배를 시작으로 경기연회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며 지낸 지난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성도들의 수고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어떻게 목회하였는가?’ 묵상하였다. 그 때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씀이 바울의 설교였다.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던지는 부탁의 설교 속에 담긴 내용이었다. 거기에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담겨 있다.

1. 겸손과 눈물의 목회자 (행20:19上)
2. 동족의 간계를 인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목회자 (행20:19下)
3. 유익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 (행20:20)
4. 회개와 믿음을 증거한 목회자 (행20:21)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 머물며 목회하는데 목회자로서의 자질과 목회자로서 해야할 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목회가 가능했던 근복적인 태도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짚는다면 목숨을 건 사역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선포하고 있다. 복음이 생명보다 귀하기에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에 목숨을 건 바울, 이것이 바울의 일하는 중심부에 타고 있는 불이다.

복음 증거에 목숨을 건 바울의 삶의 자세는 세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두려워 할 것이 없는 삶 (행20:23)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결박과 환난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 결국은 고통과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목숨을 아까워하고 삶의 안전을 찾아 헤매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안일주의만으로는 결박과 환난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각오가 있을 때에 환난과 결박은 썩은 동아줄처럼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불행은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을 사무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목숨을 거는 희생과 헌신을 비웃는다는 것이다. 대학원 영성 훈련에 가서 개척 교회 할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 하였더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목숨을 버리는 건 고사하고 고생하기 조차도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회가 사명인지, 안전한 직장으로 생각하는지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전도사들은 사례와 대우를 묻는다. 쌀 2말에 목숨을 건 목회자를 찾기 어렵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버지니아 연회 소속 UMC교회의 백인 목사는 5시 이후면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최저 생계비가 보장되다 보니 복지는 있는데 놀고 먹는다. 목숨을 걸고 헌신할 마음이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죽이고 사명을 죽이고 개인을 죽이고 목회를 죽이고 있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내게 맡기신 일의 가치를 깨닫고 목숨을 거는 사역을 하자. 복음이 목숨보다 귀하다는 각오 속에서 속회 부흥에 목숨을 걸자. 기도와 전도에 목숨을 걸자. 무한대의 용기와 도전 정신이 솟아나게 된다.

바울의 일하는 모습을 보라.

고후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바울은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잠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며 굶고 춥고 헐벗는 목숨을 건 일꾼이었다. 새해에는 목숨을 걸었기에 어떤 일 앞에서도 담대한 용기 있는 일꾼이 되자.

둘째,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된다. (행20:27)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우리의 일생을 다 살고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칠 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행20:18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라고 쓰고 있다. 이 말은 한결같은 자세로 울고 섬기고 전하고 가르쳤다는 뜻이다. 얼마나 최선을 다한 모습인가?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삶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한결같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또 행20:31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최선을 다하는 자가 어떻게 참지 못하고 적당히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선교를 관광으로 대체하고 목회를 기도 없이 하고 전도를 말솜씨로 말할 수 있는가? 목숨을 걸면 게으르고 나태할 수 없다. 앉아서 핑계할 수 없다. 밤낮 쉬지 않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멈추게 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가 아니다. 바쁘고 분주함이 핑계거리가 아니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릴까봐, 잘못될까봐 소심한 마음 때문에, 달란트를 맡기고 간 주인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가만히 보관만 하고 있었다. 1달란트 받은 자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은 이유는 바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인에게 어떤 핑계와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이 되었을 때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서 더욱 인기 있는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동참하며 갈등과 대립이 있는 나라와 국가를 찾아가 화해 조정자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는 그의 노년을 더욱 의미 있게 살며 온 세상에 복음을 나누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해군사관하교 졸업식 사열대 앞에서 받은 제독의 질문 때문이었다. “왜 자네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최선을 다했다면 더 나은 생도 시절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 말이 그의 일생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목숨을 거는데서 생겨진다. 그 때 우리는 무능한 아마추어이지만 칭찬을 듣는다. 격려를 듣는다. 프로가 되고 명장이 되고 리더가 된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실패해도 찬사가 있고 조연으로 끝났어도 감명을 주는 자가 된다. 조금 남겼어도 잘했다고 격려받는다.

셋째, 모범적인 생애가 만들어진다. (행20:35)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라고 하였다. 바울이 보인 모범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3년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바울은 청렴면에서 모범이 되었다. 사명에 목숨을 건 사람이 어찌 의식주의 문제에 걸려서 넘어질 수 있겠는가? 그의 청지기로서의 깨끗한 삶의 모습은 행20:3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아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물질에 대한 탐심을 극복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물질에 사로잡혀 영적 성장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바울은 물질을 다루는데 있어서 깨끗하였다. 더군다나 물질에 부정하지도 않았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행20:34~35을 보면 약한 사람을 돋는 일하는 손이었고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 받기보다 주는 것에 더 중심을 둔 삶을 살았다. 바울은 물질을 사용하는 경제 생활에서도 모본이 되었다. 움켜잡는 생활만이 아니고 나눠주는 삶의 축복을 실천한 것이다. 어찌 그의 목회 활동이 에베소교회와 회중 앞에서 모본이 되지 않았겠는가?

나는 한 해를 돌아보면서「오직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다해 천국 일하는 교회」란 삼행시를 떠올린다. 너는 정말 목숨을 다해, 목숨을 걸고 천국 일을 하였는가? 구호로만 “목숨을 다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복음의 영광이 쇠퇴하고 기독교의 선호도가 타 종교에게 떠밀리고 교회에 대한 안티 세력들의 권세가 개가를 부르듯 덤벼들지만 복음의 가치 앞에 당당하여 서 있는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목숨을 건 고백 속에 우리의 달려갈 길이 보여야 한다. 승리의 영감을 얻어야 한다. 인생의 확신이 와야 한다. 우리 모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목숨을 걸면 복음의 영광, 교회의 영광이 살아날 수 있다. 목숨을 걸면 기독교의 회복과 부흥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목숨을 걸면 그것은 목회자의 결단으로만 들려서는 안된다. 세상에 부름을 받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일하는 정신이어야 한다. 목숨을 건 성서의 사람들을 보라.

1) 민족을 구한 에스더

에스더는 에4:16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었기에 왕 앞에 나아갔고 하만의 계교 앞에서 말살될 풍전등화의 유대 민족을 살려 내었다. 부림절을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다.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인 다니엘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니엘은 사자굴에 떨어져 찢겨 죽는 각오가 있었기에 기도를 쉬지 않았다. 기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있었기에 사자굴에서 오히려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산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었다. 목숨을 건 기도 생활이 상황을 역전시켰다.

3) 세상을 이겨낸 수많은 사람들

히11:32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 그들이 히11:33을 보면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세상을 이겨낸 수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목숨을 걸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

나의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너무도 부끄러운 것이 많다. 목숨을 걸지 못함으로 핑계하고 변명하고 살았던 것이다. 세상에 사로잡히고 세상에 무릎 꿇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왜 전도하지 못하는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왜 열방에 선교하러 가지 못하는가? 선교를 왜 나의 길이라 확신하고 헌신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가?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가 아니다. 목숨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걸었는데 우리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러니까 될 듯 하면서 되지 않는다. 복음의 가치가 생명을 걸 만한 것임을 모르니 적당히 종교 생활에 떨어진다. 여기 성령이 와 계신다. 우리를 깨우치려 운행하고 계신다. 오늘 은혜가 임해야 한다. 복음에 눈이 열리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복음의 가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의 보람을 사명으로 받는 전환의 날이 되어야 한다. 나도 목숨을 걸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리라 결심해야 한다.

이광용은 이런 시를 썼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인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실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그렇다. 사라지는 것, 변하는 것, 이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라고 노래하는데 우리가 하늘의 뜻, 하늘에서 준 사명, 복음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남는 시간으로 인생을 즐기는 마음으로 한다면 도대체 어떤 거룩한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프로의 시대에 영적인 하나님의 일에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 오직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삶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고백을 오늘 주님께 바쳐야 한다. 영원한 삶의 가치를 향한 목숨을 건 투자를 오늘 드려야 한다. 지금 이 시간 이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을 보여 드리자. 내 안에 속삭이는 부정적인 사고, ‘나는 못해요, 나는 싫어요, 나는 시간이 없어요’ 그 모든 것을 추방해 버리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성령님을 쫓아 새롭게 목숨을 걸고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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