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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 받은 사명자로 다시 일어나라!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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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 민족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던 암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희망을 잃고 방황하던 절망의 때였습니다.  그때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했던"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1907년 1월 14일 저녁, 암울한 민족의 아픔과 영적 위기 의식을 가지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선교사들과 천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에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은 100년 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하셔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도 동일하게 임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사모하지 않으면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은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나를 축복하시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날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었던 야곱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그날의 상황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글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가 간절히 사모하오니 이곳에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내 영혼에 충만하게 임하소서.
내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오니 주여,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 생활이라는 것이 이론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도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강력한 힘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만이 복음의 능력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금년 이 한해 우리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복음의 능력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은 누리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간마다 때마다 승리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모든 사건과 환경으로부터 승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장애물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입니다.  극복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과 사건들 앞에서 힘들어하고 절망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믿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합니다.  더 담대해져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과 비웃음과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때에라도 거기에 굴복하면 안됩니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면 안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이기셔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이긴 자만이 마지막에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자만이 주님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금년을 살아가면서 어떤 힘들고 어려운 사건과 환경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계신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극한의 시련과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이겨야 합니다.  극복해야 됩니다.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시간에 창대하게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사역에로 불러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일들이 있습니다.  시대와 교회 앞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에서 할 일 없이 그냥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들과 정신병자들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과 시대 앞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없다는 것은 영적인 환자이든지 아니면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국 백성인 우리에게는 천국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2007년이라는 세상으로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2007년이라는 역사 속에로 초청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위에는 2007년이라는 세상을 맞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007년을 의미 없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나약한 존재로 살아서도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사건이 나를 곤고하게 만들어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심을 믿고 사명을 붙잡고 달려가는 그가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어나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시위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을 세상 사람들 속에서 증거하십시오.  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내 인생에 후원자가 되신다고 믿는다면 결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시각장애인은 분명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육신의 시력은 있어도 영적 시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잃어버린 꿈을 다시 붙잡으십시오.  희미해져 가는 비전을 다시 새롭게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비전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낙심입니다.  낙심과 절망은 사단이 우리들의 마음에 던진 가라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그의 자녀일지라도 결코 낙심과 절망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안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낙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십시오.  한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붙들고 일어나 세상 속에서 시위하십시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려 죽은 후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단 한번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젊음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가 않습니다.

엘리어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사명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르고 닳도록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까?  만약에 이것이 여러분의 생각이라면 이제는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한 시간을 살더라도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명자로서 내 삶을 불태우기를 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녀도 사명으로 해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해도 사명으로 양육하고 부모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겨야 합니다.  부부가 사랑해도 사명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겨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극히 평범한 한 젊은이가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깨닫고, 사명자로 세움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기에서 웃시야는 유대의 10대 왕입니다.  그는 16세에 한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52년간 선정을 베푼 성군이었습니다.  웃시야는 중농정책을 잘 써서 농민들을 잘 살게 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습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서 국내 정치를 안정시켰고 외교적으로도 모든 나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에 덕망을 쌓았던 사람으로 영광과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사야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사촌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사야는 웃시야로 인해서 정치적인 부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뒷배경이 든든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장래가 확실했습니다.  한마디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웃시야가 죽었습니다.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요, 확실한 뒷배경이 되었던 그 왕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죽으면 큰일 날줄 알았지만 그가 죽은 자리에서 평범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로 세움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웃시야가 죽으면 세상의 소망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웃시야 그가 죽음으로써 하늘의 소명을 붙잡는 사명자로 세움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요, 붙잡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우리들 주변의 환경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내가 새롭게 다짐을 하고 시작하리라고 결단하지만 작년에 힘들게 했던 그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어쩌면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힘들고 낙망되어질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그 환경을 보지 말고, 그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십시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빈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붙잡고 있던 그 환경이 무너질 때에 다 끝난 줄로 생각하고 절망합니다.  낙심합니다.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때입니다.  세상이 무너질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더 크고 강하게 임하십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죽으면 광야의 이스라엘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었더니 약속의 가나안을 인도할 여호수아가 나왔습니다.  산에 큰 나무들이 무너지면 큰일 날 줄 알지만 큰 나무가 서 있는 나무들 밑에 작은 나무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다 죽습니다.  그런데 큰 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져 거기서 썩어 거름이 되면 그 거름을 먹고 작은 나무들이 더 싱싱하고 좋은 나무들로 자라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죽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정말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내가 이만하면 큰 나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의지하는 웃시야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결단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웃시야가 죽지 않았다면 결코 이사야가 사명자로 세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시야가 죽어야 합니다.  부름 받은 사명자로 다시 일어나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주자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웃시야가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웃시야가 왜 죽어야 합니까?  웃시야가 왜 문제입니까?  웃시야는 한마디로 교만의 상징입니다.  웃시야는 왕의 자리에 올라갔으니 세상적으로 분명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영광과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사람, 세상 모든 것에서 성공했던 사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마음에 교만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역대하 26장 16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는 세상적인 성공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습니다.  처음 왕의 자리에로 나아갔을 때의 그 겸손함과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성공하면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심령이 완악해졌습니다.

문제는 세상적인 교만이 영적으로까지 교만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쉬운성경에서는 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현대어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자신의 왕권에 예속시키려고 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버리시므로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웃시야에게 다른 병으로도 징계를 내리실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문둥병을 내리셨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보십시오.  나라가 번영하고, 세상 모든 나라들로부터 영광과 칭송을 들으면서 웃시야는 얼마나 우쭐댔겠습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이룬 것이라고 얼마나 자랑했겠습니까?  그는 세상 부귀영화에 민감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감각을 없게 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교만을 가장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영적으로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교만입니다.  10년, 20년, 오랫동안 예수를 믿다보면 어느 때부터인가 영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섭게 병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감각이 없는 웃시야에게 육신의 감각이 없는 저주를 내립니다.  그것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성경은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웃시야가 죽고 나니까 앗수르가 일어나서 군침을 삼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바벨론과 애굽이 군침을 삼킵니다.  정치적 위기, 경제적인 파탄, 사회적 불안이 왔습니다.

이 때에 백성들이 절망합니다.  이사야도 자신이 의지했던 웃시야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권력을 쫓아가다가 권력이 떠나가니까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부귀영광을 따라가다가 그것이 안개처럼 사라질 때에 얼마나 허무합니까?

만약에 이사야가 그렇게 허무함을 안고 계속해서 또 다른 웃시야를 붙잡았다고 한다면 성경에서 이사야서는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지하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인생에 낙심되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오시기를 축복합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앞길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낙망되는 일이 있을 때에,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어둠을 지날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부터 만 가지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올 때와 갈 때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오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사야가 누렸던 동일한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에 성전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발걸음입니까?  얼마나 소중한 결단입니까?  그런데 더 귀한 일은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에 더욱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전을 사모하십시오.  만사형통하고 모든 일이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충성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얻어터지고도 주님 앞에 나올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비 온 땅에 먼지가 나도록 얻어터지고 세대 더 맞고도 못나오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전에서 이사야가 만났던 그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이사야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붙잡았던 그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인생에 위기를 만났을 때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울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 세상 보좌는 무너졌지만 하늘 보좌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임금은 죽지만 만왕의 왕 내 주님은 영원하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땅에 모든 것이 아침의 안개처럼 사라져도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웃시야를 쫓아 세상을 살았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회개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명자로 세움을 받으려면 먼저 철저한 자기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는 철저한 회개와 함께 일어납니다.

1907년 14일, 그날 평양 장대현 교회의 저녁 집회 도중 건너편 한쪽에서 어떤 사람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모든 회중은 약속이나 한 듯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날 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변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강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하나같이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성령의 역사는 강력한 회개와 함께 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달 후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죄인이라는 완전한 고통 속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나의 요리사는 회개를 하려고 애쓰며 그 가운데 거꾸러져 방 건너 쪽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목사님,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지요.  나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울고 또 울며 거의 고통 중에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 기도를 한 효과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보십시오.  철저하게 회개한 그들에게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이 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과 기름 부으심을 원한다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죄, 모르고 있는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만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에게 성령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이사야에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언양 영신교회에 구석구석 하나님의 일꾼을 찾는 소리가 들려야 됩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지역에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겁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난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
어디에 가면 영광스러운 예배가 있을까?
어디에 가면 답답한 내 심령을 채워줄 만한 설교가 있을까?
신앙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전도하면 내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그들이 전도되면 그가 살고 가정이 삽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 전도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천번 만번 쓸어버려 마땅하고, 주님 앞에 거절당해야 마땅한 내 인생이지만 주님이 나를 써 주시겠다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 부름 받은 마지막 주자로 일어나 이 땅에 부흥의 불씨가 되십시다.

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저녁 집회에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는가는 그 현장에 있던 이길함 선교사의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그 이튿날, 1월 15일자 북장로교 선교본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길함 선교사는 어제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날 그가 경험하고 모든 이들이 공유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던지 그는 지금 열리고 있는 사경회가 평양선교부 사상 가장 훌륭한 사경회라며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어제 있었던 그 집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결코 목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의 현시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며, 이제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도우시고 각자의 교회에서 그들을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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