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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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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출판사가 상금을 걸어 놓고 ‘친구라는 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어떤 말인가’ 라는 것에 대해 공모했습니다. 수천 명이 공모했는데 많은 응모자들 중에 다음 말들이 선발이 되었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보태주고 고통은 나누어 갖는 사람’ 친구가 좋은 일 있을 때에 기쁜 것을 더 기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 때에는 조금이라도 내가 가져와서 감당 하겠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친구라는 것입니다. 또 ‘친구란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라는 좋은 말이 있었는데 이는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심정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는 사람, 또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다 이해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친구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친구이지 않습니까? 심정을 나누기 위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 듣고 또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이 친구라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란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는 시계와 같은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가 뭘 하든 간에 친구로서의 내 자세를 쭉 갖추어 가는 사람 즉 상대방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남편, 진짜 아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남편이 나이 들어 능력이 조금 없어도 아내는 아내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 조금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켜나가는 아내, 아내가 자기가 생각 한 것 보다 조금 부족해도 남편 자리를 묵묵히 지켜 나가는 사람, 시계 가듯이 쭉 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친구 남편이고 친구 아내입니다.

이런 여러 말들 가운데 1등을 차지한 말이 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 떠날 때에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을 사실로 알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만의 만 사람이 다 떠나가도 자기는 떠나가지 아니하고 쭉 옆에 있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친구입니다. ‘제일 좋은 친구는 내 아내이고 제일 좋은 친구는 내 남편’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 살만한 인생이 될 것 같습니다. 살만한 나라 살만한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참된 친구가 많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런 친구보다 훨씬 뛰어난 최고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좋을 때는 따라 다니면서 그 앞에 서로 나서려고 했고 자주 만나려고 했으며 충성 경쟁까지 했으나 선생이 위기를 당하자 혹시라도 그 위기가 자신의 위기가 될까, 그 어려움이 자신의 어려움으로 번질까 하여 공무니 빼고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좋았던 것, 함께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이렇게 많이 변해 가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들었고 돈 못 번다고 또 이것저것 추한 모습 보인다고 떠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여러분, 참된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내 족함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것이 진짜 성공하는 결혼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하였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제자들을 우리 예수님은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 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등등 한 마디 말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먼저 해결하셨는데 그 해결을 실제로 나타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친구입니까? 이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허탈해 졌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나 잡으러 가려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밤새 애를 썼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 무렵에 웬 사람이 바닷가에서 큰 소리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아닌데’ 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밤새 허탕을 쳤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졌는데 그렇게 했을 때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기는 했지만 설마 잡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물고기가 잡혔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제대로 보니까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급히 배를 육지에 대고 올라와 보니까 우리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먹이셨습니다. 참친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인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아버님을 생각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겨울에 얼마나 추웠습니까? 도서관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공부 할 곳이 없어서 방과 후에 난로도 피워주지 않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늘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계신 아버지께서 몸으로 저를 데워주셨습니다. 미리 이불을 데워 놓고 차가운 아들 손을 꼭 잡고 모른 척 하면서 아무 말씀없이 안아 주시던 아버님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추울까봐 숯불을 피워 놓고 먹이고 챙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베드로와 이야기 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에 대하여 대답했는데 이 짤막한 대화는 오늘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는 대화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부르셨던 호칭입니다. 세 번 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하고 베드로가 대화하는 이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실 때에 베드로에게 얼른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동생 안드레가 먼저 만나고 안드레를 따라와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을 때에 베드로는 이것을 생각하였습니다. 3년 전 자기를 처음 만나 그렇게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장차 게바라 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입니다. 흔들리지 아니하는 바위라는 말인데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앞으로 나와 함께 일을 하다가 이런저런 큰 어려움이 당할 수가 있을텐데 그러나 너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주님께서 당부하시고 기대도 하셨던 말씀이 베드로는 생각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맨 처음 만났을 때 그 선생님이 자기에게 거는 기대를 별명으로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3년 동안 예수님의 형편이 좋을 때는 잘했습니다. 흔들리지 않았고 일마다 때마다 충성스럽게 예수님 옆에 있었습니다. 변화산에 갈 때에도 아이 죽은데 갈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피같이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에도 같이 했었는데 예수님의 위기 때 그 위기가 자기 것이 될까 싶어서 여지없이 흔들렸습니다. 바위가 아니라 흔들리는 갈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의 상황을 마가복음 14장 50절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에게 힘든 일이 생길까봐, 어려운 일이 생길까봐 바위가 여지없이 갈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베드로의 실패는 베드로만의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들에게도 올 수 있고 지금도 우리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힘들게 공부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힘들게 세상을 살아 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에게 이것저것 많이 주시면서 많은 기대를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기대를 하셨는데 과연 여러분들은 그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습니까? 얼마나 채웠습니까? 지금까지 한 평생 살아오시는 동안 하나님의 기대에 얼마나 채웠습니까? 특별히 2006년이 끝나는 오늘 2006년 한 해에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께 기대하고 부탁하신 것을 여러분은 얼마나 채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혹 한평생 잘한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많고 안타까운 것이 많을 그러한 인생이라면 하나님 당신이 주시는 2007년 한 해를 멋지게 꾸며 지금까지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전부 만회하여 멋진 인생을 만들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멋진 남편, 멋진 아버지가 한 번 되어보라, 멋진 사람이 한 번 되어보라, 한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못 갖추었다면 2007년에 멋진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보라는 말씀이십니다.

또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던 날 베드로는 늦게 예수님께서 심문 받고 계시던 대제사장 집에 찾아 갔습니다. 그 때 베드로를 만난 사람은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안에 잡혀온 사람과 한 패가 아닌가? 라고 세 번이나 질문을 했는데 그 때 베드로는 세 번 다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 세 번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똑같이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가 특별히 가슴 아픈 것은 베드로가 그런 실수를 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아주 정확하게 미리 경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세 번이나 경고를 안 해 주셨더라면, 그 일을 지적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몇 번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므로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는 깊이 생각 하는 것 대신 그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겟습니다.” 라고 큰 소리만 쳤습니다.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그것도 세 번이나 부인 하는 것은 죽어도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경고 하실 때 베드로는 아무리 자신 있었다 하더라도 왜 저렇게 하실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면 이 통한의 아픔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큰소리 칠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당부의 말씀이나 평소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자꾸 생각해야합니다. 꿈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쓸데없는 꿈을 많이 꿉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같은 꿈이 있습니다. 그런 때는 평소에는 늘 쓸데없는 꿈을 꾸었다고 하더라도 혹시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나?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들에게 말할 때 혹은 여러분들의 아들, 딸이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을 할 때에 귀를 기울여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전할 때에는 귀를 기울여서 들어야 합니다. 오늘 저 목사님이 말씀 하시는 것은 나와 관계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 하실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말씀 하셨을까? 늘 신경을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 큰 소리 칠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일까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금년 마지막 주일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 하신 것과 두 번째, 세 번째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을 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는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정도가 아니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자기는 다르다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냥 큰소리 친 것만이 아니라 자기는 그 친구들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제자들이 하지 않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네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바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 할 때마다 항상 저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생각 할 때에 늘 저 남편 만나서 활짝 폈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를 만나서 횡재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006년을 마감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상대방을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 자기를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에 앞잡이다..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아내를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패망의 선봉이다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들 앞에서 속으로 거만한 사람들은 곧 넘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들,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나라 그 세월을 살아 갈 사람들, 그런 우리 믿음의 가족들을 향해서 그 누구든지 간에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고 패망한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장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 말씀을 명심하지 못했다가 처절한 통한을 겪게 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이 소중한 말씀을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는데 2006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인 오늘 그 말씀을 가지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늘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의 그 넓으신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이 기억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 도망가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였던 제자들을 다 찾아 오셨고 그중에서도 예수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 사랑입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가셨고 그중에서 베드로에게 먼저 말을 거신 것은 이미 베드로의 그 모든 것을 용서 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하려고 세 번 물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용서했고 예전과 똑같이 너를 사랑한다는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라고 축 처진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멋진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슴은 너무 넓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평생 살아오면서 어떤 잘못, 실패, 실수 때로는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다 받으십니다. 전부 다 받으십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 주님이 받으십니다.

어떤 제자 한 사람이 미운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고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가서 “선생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라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제자에게 “소금 한 줌과 물 한 바가지를 가지고 오게.” 라고 말했습니다. 제자가 가지고 왔습니다. “타서 잘 저어 가지고 마셔보게.” 라고 말했지만 제자는 너무 짜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스승은 다시 말했습니다. “소금 한 줌을 들고 따라오게.” 제자는 따라 갔습니다. “저 호수에 소금을 뿌리게”.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셔보게.” 제자가 마셨는데 당연히 맹물이었습니다. 한 줌 바가지에 들어간 소금은 짠 소금물이었지만 호수에 들어간 소금물은 하나도 짜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네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고 자네 마음이네. 자네 마음이 호수같이 될 때에 자네 마음은 호수와 같은 평안을 찾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마음은 한없이 넓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받아 주십니다. 주님의 이 크신 사랑에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첫 번째 그렇게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내가 사랑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모든 것을 아시오니 지난번에는 제가 실패 했지만 이 주님의 사랑을 뵙고 제가 어떻게 또 실패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는 실패 하지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똑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말은 조금 틀리지만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라는 똑같은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이제는 정말로 나를 사랑 하느냐. 정말이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께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정말로 사랑 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그때는 참된 사랑이 아니었지만 이번에 정말이라면, 나를 정말 사랑 하는 것이라면 네가 나의 양을 먹이는 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06년이 마감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잘못했을 수도 있고 실패했을 수도 있으며 실수했을 수도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서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십니까? 이것도 못하고 저것이 부족해도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은 정말로 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 양을 먹이라’ 복음을 받지 못한 곳, 어두운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린 후학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06년 마지막 주에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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