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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언덕(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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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평양대부흥 100주년의 해입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뜻깊은 해입니다. 부흥의 불씨는 1906년 원산에서 지펴졌습니다. 그 불씨가 평양으로 옮겨져 1907년 새해 벽두인 1월 2일부터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14일 밤이 되자 성도들이 잇달아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부흥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한국교회 성장에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평양대부흥 운동 전체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흥의 물결이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역사와 시대의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사회 깊숙이 들어가 변화를 일구어내도록 지속적으로 움직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양대부흥 운동은 오늘 한국교회의 한 이정표로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 인구는 겨우 7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였지만 매우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양대부흥 운동은 왜 한국교회는 지금 쇠퇴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가,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는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저는 오늘의 위기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주기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결국 기도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책을 쓰듯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간절한 소원과 열망을 단순하게 표현하게 됩니다. 바로 그 소원과 열망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좋은 설교와 신학은 우리의 삶과 따로 놀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암 윌리몬이 주기도를 해설한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매우 도전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도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를 제자의 길이라고 하는 모험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 기도라는 독특한 실천을 통해 빚어지는 한 무리의 사람들(교회) 속으로 (세례를 받아) 입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선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 바리새인이나 이방인과는 다른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들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여 위 책의 부제도 '주기도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김회권 목사도 '이 책은 기도행위가 얼마나 자아뿐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본류인가를 아주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필치로 제시하고 있다'고 평하였습니다. 주기도를 묵상하면서 그 동안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혹은 세속적 문화로부터 배우 기도를 청산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기도를 나의 것으로 삼아 올 한해동안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언덕을 만들어 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부름'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1. 제일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주기도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첫 단어는 '아버지'(파텔)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제자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제대로 그리고 진실로 부르는 법부터 익혀야 합니다. 이는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라는 점과도 맥이 통합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첫 인간관계를 맺고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자랐는가가 사람의 인격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바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인이 되면 제일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된다고 말을 자꾸 하려고 애쓰는 것은 허사입니다. 그 때는 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만나면 말이 잘 되는 사람이 있고 말이 막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차이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에서 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하고 할 말이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막상 말이 끊어지고 막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동안 관계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 만나는 사람하고 할 말이 훨씬 많습니다. 관계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고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깊이 나누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는 말을 많이 하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이 나에게 누구이신 가를 깊이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부를 수 없다면 어디서 왜 관계가 막혔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나의 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비로소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진실한 열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 존재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에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족하길 원하는 강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인터넷 신문을 통해 '신인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한 주인공은 호세 코르데이로 박사입니다. 그는 미국 MIT 공학박사로서 미 조지타운대에서 국제경제·비교정치를 연구했고, 프랑스 INSEAD(유럽경영 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거쳤습니다. 세계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 창립 이사로서 유엔미래포럼 등 미래학과 관련한 국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UCV)의 교수로 있으면서 유엔미래포럼의 국가미래지수 프로젝트 연구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 현생 인류를 대체해, 진화의 종착점에서 나타날 신인류를 '포스트 휴먼(posthuman)'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그 중간 단계인 '트랜스 휴먼(transhuman)'으로 진화하는 중이라고 주장합니다:

"포스트 휴먼 단계에 등장하는 신인류는 늙지 않으며 원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우리는 특수장치나 장기이식을 통해 조만간 어떤 동물보다 잘 들을 수 있고 멀리 볼 수 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 일종의 신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세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이제 노화의 문제를 알고 유기적 운동을 재연까지 할 수 있다. 생명공학·정보기술·나노기술 등의 발달로 인간은 이제 마음먹은 대로 진화할 수 있다. 과학기술을 통해 생사의 신비가 풀리고 인위적인 수명 조절이 가능해지면 종교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영생이 가능해질 거라고 보나?' 그의 답은 거침없습니다. '물론이다. 사고로 죽는 일만 없다면'.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러한 소망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뱀은 최초의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사는 의존적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모든 아부가 새빨간 거짓말임에도 불국하고 꼭 진실처럼 들리는 것처럼 달콤한 말은 진리처럼 들리는 법입니다. 하여 첫 인간은 냉큼 선악과를 따먹지 않습니까?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도 자신들의 기술력을 널리 과시하여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기술력의 발전과 맘몬의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냉정하게 우리 존재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와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진시황이 그렇게 그리던 영생의 길을 정말 찾았다고 합시다. 과연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명을 무한대로 연장할 수 있다고 홀연히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사악한 내면이 문제입니다. 과학기술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세계까지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면이 바뀌지 않은 채 인간이 영생한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비극적인 일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위대해진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이 언제 꽃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집니까?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겸손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마지막 날 밤 몇몇 성도님들과 산에 올랐습니다. 서로 자유롭게 흩어져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어느 한 분이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주님!'하고 부르는데 얼마나 그 마음이 절절한지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 부르짖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고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의 가장 깊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언제나 꼭 붙들고 진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버지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에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무척 힘들고 거북스러울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부정적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세상의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유사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이 세상의 아버지 됨의 이상이요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를 부른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성운동가들에게도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언어들이 일정 정도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문자와 언어를 통해서 계시하기로 결정한 이상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가부장적 문화가 성경언어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전체적으로 가부장제도를 본질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성을 표현하는 구절들도 적지 않습니다(사 49:15; 마 23:37).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남자나 여자가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갈 3:23). 그럼에도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심겨져 있는 아버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고리로 삼아 자신을 쉽게 계시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란 것은 용서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바로 그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줍니다(눅 15:11-32). 하나님은 우리 죄를 들쳐 내 벌을 주려는 검사나 판사가 아닙니다. 굳이 법적 용어를 빌리자면 변호사에 가깝고 좀더 좋은 단어는 너그러운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분명히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적절하게 채워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마 6:8, 25-34).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무한대로 충족시켜주시는 무당신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대목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는 절대로 부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막 15:34).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선한 목자'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1대1의 인격적 관계가 필요하고 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인식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 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공동체 전체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한국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큰 도전이 됩니다. 그 동안 우리 각자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만 독점하려고 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 이기적 자세와 태도를 떨쳐 버려야 합니다. 주일 예배 때마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 자신도 매 주일 한국교회 전체, 한국사회 그리고 지구촌을 위한 기도제목을 고르면서 좋은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 시간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에서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아름다웠던 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 천 명되는 그 많은 성도들 중에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줄 아는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진실로 부를 수 있다면 한국교회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초월자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을 얼마큼 상징적으로 볼 것인가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이제 그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늘이라는 높이의 개념보다는 실존적 깊이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실존 깊은 곳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포기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솔로몬도 일찍이 잘 이해했던 것처럼(왕상 8:27) 근본적인 차원에서 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 점에서 하늘을 공간적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주지를 하늘로 묘사한 데는 중요한 의미가 여전히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땅의 세계 즉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잘 조망하시고 지키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시 33:13-14). 또한 초월적 능력으로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스데반이 적대세력에 둘러 싸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 없이 그리고 용서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행 8:54-60). 올 한 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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