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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언덕(2)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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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기독변호사들의 모임에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변호사가 자신의 아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작년에 암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죄였습니다. 죄를 끊임없이 회개하다 보니 나중엔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접한 책이 바로 요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저자의 어머님이 암에 걸렸을 때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긍정의 힘으로 이겨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변호사는 '요즘 저는 긍정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저 자신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긍정의 힘을 간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긍정의 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오스틴 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줄 축복을 항상 저장해놓으시고 계신다',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승리자이다', '당신 안에 있는 챔피언을 발견하라' 등입니다.
 
주기도는 바로 이런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아버지와 관련된 기도이고 후반부는 기도하는 사람의 필요와 관련된 기도입니다. 그 순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로 성장하길 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에로스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려니와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선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 유아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도를 먼저 드릴 수 있는 제자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으로 다시 세분됩니다. 오늘은 그 중 첫 번째인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아버지의 이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기도하려면 아버지가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름은 단순히 서로를 부르기 위한 편이수단 정도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이름의 소유자가 어떤 존재 즉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야곱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야곱이 인격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징표로 이름을 바꿔 준 것입니다(창 32:27-28).

하나님 아버지가 이름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인격적 특성을 지닌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단순히 추상적인 존재나 초월적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다가 웅장한 자연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드높은 하늘, 유리처럼 잔잔한 호수, 깊은 계곡, 울창한 숲, 깎아지른 절벽, 드넓은 바다,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경이감을 느낍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어떤 신성을 경험합니다. 혹은 사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의 제일 원인으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알아낸 하나님은 아직 이름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합니다. 즉 하나님의 인격성을 깨닫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사귈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사회의 기준으로 아무리 지혜롭고 슬기로워도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사명을 받고 모세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출 3: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기 전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 의미가 알쏭달쏭한 어려운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나이다'라는 말에 가장 가깝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 am who I am'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규정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규정하고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뜻이죠.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이러한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이미지를 하나님께 덧입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뱀의 짓입니다. 뱀은 최초의 인간에게 하나님은 인간을 경쟁자로 여겨 인간에 의해 자기 위치가 위협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을 미숙한 상태에 있게 만드는 저속한 존재라고 속삭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뱀이 퍼뜨린 하나님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 인간의 구미에 맞는 옷을 덮어씌울 때도 많습니다. 모두에서 언급한 『긍정의 힘』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혹은 『깨끗한 부자』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되는 하나님은 믿음의 철이 들면 반드시 부자 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밖에도 많지요. 실존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 혹은 『궁극적 관심』으로 표현하길 좋아했습니다.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부분을 강조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인양 만들었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마음대로 옷을 덧입히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시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시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출 3: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여호와'라고 번역된 단어는 모음이 없이 자음 4자로 구성된 단어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YHWH입니다.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단어를 발음하길 두려워했습니다. 하여 이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YHWH를 어떻게 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여호와' 어떤 이는 '야훼'가 원래의 발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표준새번역에 따라 여호와라고 사용하겠습니다.

그러나 발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 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출 6:2-8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의 조상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들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는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5). 이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리시는 것은 자신이 그들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취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건져내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인도해내 그 땅을 그들의 소유로 삼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는 나이다'라는 표현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고 그 이름에 걸맞게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심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스스로 드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신 분은 사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여 자신의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해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가장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25)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이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로 선택한 사람뿐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바를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다'(I am)라고 표현하십니다(요 8: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2.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말은 그 이름을 신성한 것으로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온 세상이 아버지의 이름의 신성한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깨닫고 그 이름을 경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진정으로 드릴 수 있으려면 우리가 먼저 진실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날마다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고는 이런 기도를 진정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이름에 집착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엔 관심을 안 기울이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 이름엔 관심을 보여주길 그렇게 간절히 원합니다. 얼마 전 한 장로님으로부터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은퇴하시면서 재직 중에 받았던 모든 감사패를 망치를 깨뜨려 없애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라면 한편으론 시원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론 아쉬움으로 짠 할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어쩌면 아버지 이름과 자기 이름 사이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그는 왕으로 지내면서 초심을 잃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 승리를 거두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웁니다(삼상 15:12). 목숨걸고 하나님이 명하신 전쟁을 치렀지만 그 목적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의 이름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삶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여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 18:7). 사울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사울은 몇 번이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합니다. 그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불행한 왕으로서 남은 삶을 살다가 결국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자살합니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곧 우리가 자신의 참된 자아와 근본적으로 갈등하며 산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름 아니라 찬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노래하고 찬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 본연의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잠언서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1:7; 9:10). 바울이 그런 지혜와 행복을 누렸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살던 환경이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우리 때가 왔다'고 하면서 열심히 전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울이 배가 아프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어떤 동기로든지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입니다(빌 1:18).

우리는 곰곰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드려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빙자하여 나의 이름이 높아질 것을 고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으로 나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더욱 아름답게 드러나길 열망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특히 나와 경쟁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 낼 때,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반응을 보면 됩니다. 진실로 기뻐할 수 있으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왠지 배가 싸르르 아파 오면 나는 아직도 나의 이름에 애착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기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택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참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어거스틴은 위로의 말을 건네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미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꼭 맞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고 흠모하면 그 사람을 점점 닮아 가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면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 모두 아버지의 이름을 늘 찬양함으로 아버지를 닮아 가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행동인가에 대하여 유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지 않기 위하여 여호와라는 단어를 소리내어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꼭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형식적으론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면서도 사실은 그 이름을 사정없이 짓밟고 그 위에 자기의 이름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그 예로 독일군의 경우를 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은 "Gott mit Un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어를 전투모에 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인들의 행위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참 부끄러운 일을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아픔을 되살리며 도리어 증오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얼마 전엔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면서 교계지도자들이 삭발식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기득권 상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 언덕은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신앙공동체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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