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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하나님의 은혜로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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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님의 은혜로(2007년 1월 14일자 설교)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중략)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장 11∼24절)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깨어져야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어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11절로 24절에서 탕자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들 중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돈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좋았지만 돈을 모두 써 버리자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겨우 농촌에서 돼지 치는 일을 구했지만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1. 율법주의적 삶의 태도

탕자는 처음에는 율법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 내가 이 집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므로 아버지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보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재산의 3분의 1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조금도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가 나에게 더 잘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제일주의입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편 5절에도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교만하면 자기제일주의가 되고 자기 이외의 사람은 다 못나 보이며 패배자, 실패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성공자요, 승리자요,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몰인정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몰인정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수고하고 고생하며 농사해 온 것을 불쌍히 여기거나 고생한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자기의 상속을 달라고만 했지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동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이웃을 대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드리는 것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욱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도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동정과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를 향해 조그마한 인정과 사랑도 갖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언제나 모자란 것, 안되는 것, 부족한 것만 보고 불평, 원망, 탄식을 했습니다.

시편 106편 25절로 27절에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야훼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에서 편안하게 여행을 하며 가나안 복지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쓴물이 달아지고 메추라기가 날아오고 만나가 떨어지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감사해야 될 것인데 오히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왜 걷게 하느냐. 왜 광야를 지나게 하느냐. 왜 메추라기를 먹게 하고 만나를 먹게 하느냐. 맛도 없고 질렸다. 길이 험하고 고통스럽다’ 등 온갖 원망과 불평을 하고 감사할 줄 모르므로 주님께서는 저들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2. 깨어지는 율법주의

그런데 이 율법주의가 깨어질 날이 옵니다. 율법주의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깨어지고 자기중심의 허물도 벗겨지게 됩니다. 이 탕자도 깨어질 날이 왔습니다. 탕자가 처음에는 아버지께 얻은 재산을 가지고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간섭할 것인가. 내 돈이므로 내 마음대로 쓸 것이다”고 생각하며 비평과 교훈을 듣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떠나 멀리 왔으니 누구의 교훈도 듣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지고 기근이 다가와 일할 곳 조차 없어지자 호구지책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디 한 곳 갈 곳도 없었습니다. 직장을 찾아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결국 시골에서 돼지를 치는 일을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 치는 일을 가장 천하게 여겼습니다. 신분이 가장 낮고 천했던 것입니다.

잠언 11장 2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23장 5절에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의지하면 언젠가 그 재물이 독수리같이 날아 가버릴 날이 옵니다. 재물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써도써도 재물이 없어지지 않을 줄 알고 쓰다가 빈털터리가 되었고 기근까지 다가오자 비참한 지경이 된 것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딸랑거리는 동전도 없었습니다. 은행 구좌에 잔액도 없었습니다.살던 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입은 옷도 다 낡아졌고 아침저녁으로 먹을 밥도 없습니다.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시골농장에서 돼지를 치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돌보아 주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구나. 밥 먹고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옛날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고통이 다가오자 비로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아버지께서 베풀어준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이 최하로 낮아지자 비로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은혜와 축복이었지 자기가 잘나고 수고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최고학부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월급도 많이 받고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가족들에게서도 우상처럼 되었는데 그가 그만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6개월 이상 못산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캄캄해졌습니다. 좌절과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인생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많은 월급을 받고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구나.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으며 땅에 서있는 자체가 은혜란 것을 몰랐습니다. 공기를 숨 쉬는데 이 달콤한 공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내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전까지는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이제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는 6개월 동안 나의 잘못 산 것을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느끼며 감사하고 살아가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야훼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저주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사람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깊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우리가 편안하게 먹고, 살고, 생활하는 것도 모두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북한에 있는 동포들에게는 자유와 인권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자유를 잃었을 때 자유의 귀함을 알고 예배당을 잃었을 때 예배드릴 수 있는 처소가 있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당연한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이란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을 바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모든 것이 은혜로 얻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율법주의로 잘못 산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 난 줄 알고 자신의 힘을 의지해 살고자 스스로 뛰쳐 나왔지만 아버지의 은혜에서 끊어진 지금은 쥐엄 열매도 얻어먹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되자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 은혜가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3. 고난이 뜨게 한 눈

고난의 칼바람이 벗기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의 옷을 단단히 입고 잘난 척하며 자기중심주의로 살다가 고난의 칼바람이 불어와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니 자기는 비참한 인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지위도 명예도 돈도 부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빈손 들게 되었습니다. 빈손 들게 되자 율법주의의 옷은 다 벗겨져 버리고 오직 크게 부각되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부귀와 권세를 누린 것은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뼈 속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시편 25편 7절에 “야훼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젊은 시절에 율법주의가 되어 철없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젊었을 때 너무나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돼지소굴까지 낮아져서 쥐엄 열매를 먹게 될 때 비로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은혜로써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71편 20절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깨어져서 은혜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집필한 C. S 루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하루는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고통이 없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하며 기고만장하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고통이 와서 그들을 깨뜨리므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와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탕자는 기근이 왔을 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율법주의의 삶을 버렸습니다. 고난으로 낮아질 때 은혜의 눈이 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편안하게 학교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칼바람이 다가와 모든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면 낮아지고 깨어져 은혜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기 전에는 은혜의 눈이 뜨이지 않습니다. 고통으로 나의 무력함과 무능력함과 비참함과 허약함을 깨닫게 될 때 눈앞에 은혜의 시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깊은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고난의 깊은 곳을 아는 사람이 은혜의 깊은 곳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당하는 것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 부르는 것은 고난을 당하니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먹고 입고 산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니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은혜의 눈은 고난을 통해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80편 7절에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눈을 뜨이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자기중심에 서서 마음이 딱딱한 흙덩어리처럼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하늘에서 쏟아져도 전부다 흘러가 버리고 흙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깨어지고 부서져서 가루가 되면 은혜가 스며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한 없이 겸손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중심으로 남을 평가하고 비평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한 삶을 삽니다. 하지만 이 율법주의가 깨어져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한없이 낮아집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내가 나 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은혜로, 어머니 은혜로, 선생님의 은혜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니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누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일용할 양식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명예와 지위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교만했던 자세가 사라져 버리고 깊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낮아지고 겸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하므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니 더욱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4. 깨달은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면 은혜가 다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지고 낮아져서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은 사람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주의적이며,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깨어지고 낮아진 다음에야 은혜를 알게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낮아진 정도를 따라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도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며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소년시절, 청년시절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고 내가 재산을 얻은 것도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자 자기는 낮아지고 아버지가 돋보였습니다. 아버지를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하며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더욱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오니 아버지가 뛰어 나와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습니다.

처음 나갈 때는 “아버지, 나의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가 내 재산 가져가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닙니까? 나가서 살겠습니다”라며 오만했던 그가 이렇게 깨어졌습니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으로서 일하고 밥만 먹여주면 감지덕지 하겠나이다’ 아버지의 은혜로 산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 간구하니 아버지가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가락지를 갖다 끼우라”고 했습니다. 반지라는 것은 아들이 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 이름을 적어 놓은 반지를 끼워 줍니다. 그는 떠나올 때 반지를 뽑아서 버리고 왔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안 자식이 안되어도 좋다. 독립해서 살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돌아오니 또다시 집안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아들의 자격을 준 것입니다.

“반지를 끼우라, 신발을 갖다 신기라”고 했습니다. 종은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아들은 신발을 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어져서 하나님께 손들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의로운 옷을 입을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의 모든 더러운 옷을 벗겨 버리고 의로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아담 이후로 쫓겨나서 하나님 근처도 못가던 우리에게 아들의 자격을 주시고, 찢어지고 상처 투성이가 된 우리의 인생을 승리의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도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슬프게 살았으니 은혜의 집에 들어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잔치집에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셔서 축복 가운데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자아가 깨어진 사람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믿고 변화되어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모든 예비하신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새해에는 깨어져서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보는 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은혜를 알고 받고 나누는 사람만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탕자가 율법주의에 서서 은혜를 모르고 살다가 큰 기근을 당하여 깨어지고 부서지자 아버지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와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 율법주의적인 잔재가 남아 있으면 모두 깨뜨려 주시옵소서. 우리가 깨어지고 낮아져서 은혜의 눈을 뜨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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