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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 축복 (말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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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 유대 랍비 - 헌금생활을 어떻게? 요한: 금 넘어 가는 것, 안드레: ○안.
시몬: 모두 하나님의 것 - 하늘로 던져 - 하나님 받으시면 하나님의 것
인색한 헌금생활을 빗댄 이야기.

하나님 앞에 신앙인들이 어떻게 헌금생활을 하고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인가? 토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기도한 이선세 목사님께 물어보았더니 생활비를 받고 또 수익금이 생기면 내가 먹고 살 항아리가 있어서 거기에 자꾸 돈을 담는 답니다. 그것이 가득차고 나면 옆에 조그마한 항아리를 만들어서 담아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산다고 말했습니다. 거기 얼마나 모이더냐? 물었더니 아직까지 모아본 적 없다고 그랬습니다.

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헌금합니까? 물었더니 수입이 생기면 전부다 금 돈으로 바꾸어서 저만큼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전을 확 뿌려서 동그라미 안에 굴러들어가면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옆에 번진 것은 자기가 가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들어갔냐고 물었더니 자주 들어가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어떻게 헌금을 합니까? 제가 꾸중을 했지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게 한푼도 없는 것이다. 100% 하나님의 것이다. 수입이 생길 때마다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하여 휙 던져서 하나님이 받으면 하나님 것 땅에 떨어지면 내 것입니다.

랍비들이 모여서 의논하다가 류 목사 안으로 선택되었더랍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산다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지요.

스텐리가 쓴 책 가운데 「헌금의 기쁨」이란 책이 있습니다. 스텐리는 어릴때부터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어린시절부터 십일조 하는 것을 생활화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깨끗한 돈 열 개를 바꾸어서 용돈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 것을 떼고 나머지 가지고 쓰는 법을 훈련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점차 커지면서 헌금의 액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릴때부터 평생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헌금하는 마음속에 기쁨이 없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액수가 늘어났는데 왜 내 속에 갈등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책에서는 헌금에 대한 열정, 헌금에 대한 기쁨이 온전한 헌금, 정직한 헌금 못지 않게 감사하는 마음,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매월 1월이 되면 청지기 주일을 선포하고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새로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오늘 설교가 부담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 부담이 된다고 하면 거룩한 부담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외로 오늘 청지기주일 설교에 은혜를 받고 신실한 성도 복 받는 성도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몇 년전 제가 청지기 주일 설교를 하는데 일산 신도시로 이사를 왔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를 정해야 되겠는데 이번주는 이교회 그 다음주는 저교회 다니다 교회가 결정이 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올라갔어요. 금식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는 교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러고 내려왔는데 한소망교회를 소개하더랍니다. 하필이면 십일조 설교를 하는 주일이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했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성경대로 목사님이 타협하지 않고 정확하게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설교를 듣고는 '이런 교회에 자신의 영혼을 맡긴다면, 이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 복 받겠구나'하고 등록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성령과 치유사역자 베니힌의 책 가운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발견하고 나면 부자로 못 사는게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배울 때 잘 배우라는 겁니다. 운동 선수가 되려면 기본 자세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다고 합니다. 기초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운동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도 선수가 되려면 출발할 때 기본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청지기 주일 설교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전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너 정말 너희 교인들을 사랑하니! 예. 너희 교인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하니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니? 부자로 살기를 원하지요. 종아, 너 이 민족이 정말 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느냐? 네. 너 정말 나의 종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신실하게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느냐? 네. 그러면 십일조 설교를 해야 하느니라. 종아, 담대하라 강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희 교우들을 어린아이로 생각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거의 매년 꼭 같은 청지기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성경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성경에 물질관리에 관한 구절이 구원이나 믿음에 관한 구절보다 2084절 - 무려 10배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셨지요. 우리말 성경에 재물이라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드리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영적전투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 소속이 어디냐?" 하나님이냐 재물 - 맘몬이냐 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재주가지고 안됩니다.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것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돈 버는데 특별히 인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쓰는 것 보면 거기에 신앙이 있고 인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은 종말이요 심판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고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하늘백성과 땅의 백성들이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호주머니를 다스리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침례교인들이 강가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한 교인을 붙들고 물 속에 풍덩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목사님 잠깐만 제 호주머니에서 돈지갑 좀 꺼내 놓고요.”그러자 목사님께서 대답했습니다. "돈지갑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 두시오. 당신과 함께 돈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스펄전은 "돈 주머니를 회개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돈 주머니가 정직한 사람이 정직한 신앙인이다"라고 했습니다.

II. 돌아 오라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후 고레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이제 성전 건축만 끝나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요술같이 하늘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데 게을렀습니다. 감사생활에 게을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읍니다.

말라기서는 1장: 감사생활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눈먼 것, 병든 것, 찌든 것 가지고 나와서 너희들 예배하려 하느냐?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방만하게 살았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얼굴에, 종교지도자들 얼굴에, 제사장들 얼굴에 내가 똥칠을 하겠다'라고 선언을 하는 말씀이 말라기서 2장입니다. 그리고 3장의 문을 열면 '돌아오라!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애절한 하나님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영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제파탄에 빠져있는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7절에도 세 번씩이나 돌아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라.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서 기도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심히 전도해라 그럴 것 같은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가 십일조 떼어먹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아 회개하라 해 놓고 왜 돈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말라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 인격,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함부로 살았습니다. 방만하게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너희들 다리 하나 잘라라'하는게 쉽습니까? 아니면 '너희들 그동안 회개하는 마음으로 헌금해라'하는 게 쉽습니까? 돈 내는게 가장 쉽습니다. 너희들 그동안 떼먹은 것 하나님한테서 도적질 한 것 1,000만원 내 놔라 그게 쉽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네 자식 하나 죽여서 하나님 앞에 바쳐라 어느 쪽이 쉽습니까? 돈 회개가 가장 기초적인 회개임과 아울러 가장 쉬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 못하면 다른 회개 못합니다. 또 한편 이 회개가 마지막 회개, 마지막 결단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냥 십일조 떼먹었다 그러지 않고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네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직업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사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생명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너희 나라와 온 백성 교회와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나다.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청지기다. 너희들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선언없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말라기서를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제게 소중한 교훈을 하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부지런히 땀흘리고 일해서 열 개를 벌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치는 것 그것이 십일조인 줄 알았는데, 아니예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열 개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열 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열 개 중에 하나를 받으시고 나머지 아홉을 선물로 은혜로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III. 선악과는 오늘도 있다: 대표성의 원리

십일조는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가 저주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잘 연구해 보면 선악과는 축복의 나무였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만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선악과만 메시지를 가진, 말씀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따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가던 청교도들이 마지막에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종자를 저들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날고기를 잡아 먹으면서도 종자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 종자는 대륙에 가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종자였습니다. 은혜의 종자였습니다. 내 삶의 내 생명의 종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나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지키면 축복이요 따 먹으면 저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의 선악과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선악과입니다. 소중히 잘 간직하면, 믿음으로 아멘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문이 열려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짓밟고 살아가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 이 말씀에 "아멘"하면 그리스도인이요 "글쎄요"하면 구원의 문은 닫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에도 선악과가 있고 물질에도 선악과가 있고 은사에도 선악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잘라 드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Representative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범죄한 죄인이 되버리고 말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함께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당신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리면 인간이길 포기한 것입니다. 구원을 버리고 천국을 버린 것입니다.

IV. 시간 그리고 물질의 대표자

대표성의 원리가 여러 곳에 적용됩니다. 먼저 시간의 선악과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이날은 대표적인 날입니다. 오늘 주일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받고 살아가면 월화수목금토주일까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성결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하는 것도 거룩해집니다. 직장생활도 거룩해집니다. 차를 타고 달려가는 그 시간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어떻게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죽음은 순교가 됩니다.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제물이 되어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내가 도적질하고 살아가는 사람, 대표적인 날인 이 날을 내가 함부로 즐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인가 한 번 물어봐야 합니다. 주일을 버린 사람은 예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네가 나의 말씀, 나의 명령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린다"고 말씀했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선악과, 물질의 대표자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의 대표성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들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살아가면 비록 그 물질을 선한 일에 사용해도 때묻은 돈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한 돈,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소중히 지키는 것은 구원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요 고백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저한테 볼펜을 어떤 청년이 빌려갔어요. 볼펜으로 싸인도 하고 메모도 하고 나서 볼펜을 돌려주면서 어깨에 힘을 딱 줍니다. 볼펜 빌려갔다가 쓰고 다시 내게 돌려줬다고 하는 것은 신실하다 정직하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선행이 아닙니다.

작년 10월 25일 국민일보에 "철없던 시절 하나님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저지른 잘못을 회개합니다"라는 기사 한토막이 실렸습니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현재 공군 모 부대에 재직 중인 박모 준위(54)씨가 학교측에 한 장의 편지와 50만원짜리 수표 1매를 동봉해 보내며 보낸 편지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지난 1966년 광주 숭일중 종교부장으로 일했는데 급우들이 모은 헌금을 한 친구에게 빌려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돈을 갚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저는 졸업할때까지 학교에 헌금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40년간 그때 일을 가슴에 두고 살아 오다 이제야 갚습니다." 박씨는 또 편지에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 헌금을 빌려간 친구의 이름도, 헌금의 액수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헌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한 일만은 '마음의 빚'으로 남아 뒤늦게나마 사죄를 구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내 것 아닌 것을 잘못 쓴 죄를 갚고 살겠다는 그 마음은 대단하다기 보다는 최소한 신앙인의 양심입니다.

V.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

십일조를 어디다 갖다 바쳐야 되겠습니까? 오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타협하면 안됩니다. 내가 얼마를 드릴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교회에다 바쳐야 합니다. 내가 꼴 먹는 그 자리에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된 집,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고아원에도 갖다주고, 선교헌금 내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 구제도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의 주인이, 물질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든 헌물이든 선교든 구제든 자기가 직접하는 것은 자기 장사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십일조하면서 무명으로 하는 것을 대단한 공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요. 잘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숨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숨기고 구제는 숨어서 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선포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나 감사나 건축이나 선교헌금이나 모든 헌금들은 선언하고 하는 것이요, 당당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헌금을 한다든지 이웃을 도울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 돈이 누구에게 갔는지 몰라야 합니다. 기억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공개적으로 선행은 은밀하게!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정직한 십일조는 미루지 말고 모아서 하지 말고 반드시 매월 드리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십일조를 합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십일조를 하면 이 땅에 창고 곡간에 차고 넘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섰을 때에 내 창고 곡간에 은혜가 축복이 쌓여 있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하지 아니하면 이미 저주를 받게 되는데 이 땅에도 쌓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고 하늘에도 쌓이지 않습니다. 십일조 하지 않은 돈은 하나님이 직접 떼 가지고 가십니다. 병원장에게 갖다 주는 사람도 있고요. 사기꾼에게 사기당해서 갖다 주는 사람도 있고요. 엉뚱하게 사고 당해서 갖다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자원하여 드릴 것인가? 아니면 사기꾼에게 또는 사고 당해서 땅에 쏟을 것인가? 둘 중에 하나 결정만 남아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지 않은 곳은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영혼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신앙적으로 환경적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교회는 주정헌금을 드릴 수 있게 합니다. 내 믿음의 십일조를 정하고 그것을 매 주일 얼마 작정 - 결단을 합니다. 이것은 십일조 하는 사람이 매 주 드리는 주일헌금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정헌금은 일종의 십일조 헌금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십일조를 결단하든 주정헌금을 결단하든 둘 중 하나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결단하면 깜짝 놀랄 일 몇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십일조 뗄 때에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놀랐답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했더니 너무나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지혜가 생겨서 풍성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날이면 교회에 달려나가고 싶고 하나님 앞에 은혜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름진 삶을 누릴 수 있는 나의 삶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VI. 십일조 축복

십일조 잘하는 백성에게 오늘 본문이 많은 것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문이 열린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늘문이 열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할 때 "천국열쇠를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문을 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늘문을 열어서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찬송하고 기쁨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늘 보화 창고를 열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포는 놀라운 이런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황충이 금해질 것이다.
농사를 지었으면 주인이 먹고 살아야 되는 거지요.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회사에 황충이 생겨 망합니다. 어떤 가정은 행복한 결혼을 시작했는데 애정생활에 황충이 생겨서 가정이 파탄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았는데 건강에 황충이 생겨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셋째,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농사를 지었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기한 전에 떨어지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70이요 80인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했는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결혼생활 시작했는데 결혼이 마칠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 임신한 여자가 해산하기 전에 낙태하는 것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했는데 중도에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시험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단 한번 오늘 읽은 말라기서에 십일조를 교훈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강조어가 "온전한"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십일조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믿음으로 아멘 하면 좋고,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을 시험이라도 해봐라. 체험이라도 해봐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 청지기 주일,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계시는 L. 픽켙 목사님이 했던 설교 가운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전도회장님이 한 번은 목사님을 찾아오더니, "목사님 다음 주일날 광고를 해주세요. 교인들보고 빈 병, 폐품을 전부 모아 가져와 달라고 해주시면 그걸 팔아서 교회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이 설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잘라서 바치는 것이지 폐품 팔아서 하나님일 하는 것 아닙니다."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일 하려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래요."하도 간곡하게 얘기하길래 목사님이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일날 목사님이 "여러분 집에 있는 빈 병이나 폐품이나 휴지 조각 있으면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것을 모아 팔아서 우리 여전도회장님 살림살이 좀 보태주려고 합니다. 여전도회장님 용돈 좀 마련해 드리려 합니다."그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여전도회장이 길길이 뛰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를 거지로 아셨나요? 자존심 상해서 교회 못나오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중하게 웃으면서 "회장님 그 빈 병 팔아서 모은 돈으로 회장님이 쓰면 자존심 상하고, 하나님이 쓰면 하나님은 그럼 자존심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까?" 그래도 여전도회장이 화가 안풀렸나봐요. 그날밤 잠을 자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늦은 밤에 잠이 들었는데 천국에 갔더래요. 갔더니 온 교인들의 천국집이 보이는데 황금으로 지은 집사님집, 진주 보석으로 지은 권사님, 집사님 집들이 가득하게 있는데 자기 집이 없더랍니다. 동네가 끝나는 한쪽 개울창 아랫동네에 기둥은 병 조각 부셔서 세우고, 벽은 휴지조각 뜯어서 갖다 붙인 집이 있길래 이게 누구 집인가 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이름이 큼지막하게 써 있더랍니다. 깜짝 놀래서 깼더라지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구나! 회개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을 가장 중심자리에 높여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결단하고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면 환난 날에 네가 나를 영화롭게 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내 삶의 중심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자리로 몰아내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처절한 나눔의 생애로 부셔졌지만
우리의 나날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케 하소서.
아무 것도 가져온 것 없고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이승의 순례객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못하게 하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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