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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가뭄이 닥쳐 올 때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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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삶의 역경과 고난의 비바람이 갑자기 어느 한 순간, 휘몰아치기 시작할 때, 기도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희망을 안고 새해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걸어가는 인생 길에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삶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다가 장애물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더 큰 방황의 여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새 중에 뱀잡이 수리라는 아주 특이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새는 평소에 잘 날아다니지만, 흥미로운 것은 고통을 감지하거나 위험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갑자기 날 수 있는 능력을 망각하고 땅을 기어다니다가 끝내는 생명을 잃어버리거나 다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아침! 우리는 아브람을 통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도 함께 보셨지만,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을 좇아 믿음의 날개를 펴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한 10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땅에 기근이 닥쳐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실타래 풀듯이 하나하나 펼쳐질 줄로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 닥친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9절에 보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는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은 이랬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를 견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 저리 쫓겨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7:5절의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통째로 주신다는 약속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땅 한 평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기근이 닥쳐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이 택한 결정이 무엇입니까? 자, 10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닥쳐온 기근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내려갔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애굽은 당시 문명의 중심지이므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겁니다. 그런데 굳이 내려갔다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가 잘 됩니다. 당연히 목축도 잘됩니다. 가뭄? 기근?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아브라함은 애굽의 풍요로움을 쫓아갔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을 왕에게 드리는 애굽의 풍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는 아내 사래 때문에 불안해진 겁니다. 그녀가 아리따운데 혹시 문제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애굽인들은 피부가 거무튀튀한데, 사래는 셈족으로 피부가 하얗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띄게 되죠. 그런데다가 미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긴장할 만합니다. 그래서 또 인간적으로 계산하고 아이디어를 냅니다. 12-13절 보면 어떤 겁니까?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사래를 뭐라고 부르자는 것입니까? 누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는 계산을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꼬이기 시작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정말 사래의 미모가 애굽인들에게 주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소문이 왕궁에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이 불러들이죠. 황당한 것은, 16절 보니까,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그 덕택에(?) 아브라함이 바로 왕에게 하사품을 받아 부자가 된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내 내주고 돈방석에 앉은 겁니다. 그러나 그게 축복이고, 행복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시방석입니다. 아내를 빼앗기고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지금 밝힐 수도 없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입니다. 날마다 한숨입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겁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태도가 아내 사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남편이라고 믿고 따라왔는데 자기 아내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목숨이 아까 와서 누이라고 거짓말을 강요하다니 얼마나 서운하고 기막히겠습니까? 여기 여성 여러분! 남편이 이럴 때 여러분 같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 화가 날것입니다. "당신이 남편이예요.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해요. 나 더 이상 기대 안 하겠으니 여기서 갈라섭시다." 뭐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라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무능한 남편을 비웃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를 받아들입니다. 아마 속으로 많이 울었겠죠.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 역시 짧으면 짧은 생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거듭나고 30여 년을 신앙생활하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연약은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또 믿음이 출중해도 문제 앞에 얼마나 자주 나약한 모습을 드러냅니까?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잖아요. 누가 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포기하고 자기 목숨하나 보존하려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려고 길을 떠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 연약하기에 이렇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자리에 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질그릇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우리는 너무 지나쳐도 안되고 너무 못 미쳐도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고 돈이 너무 없어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을 너무 지나치게 받아도 문제가 되고 흡족하게 받지 못해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분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받으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도 마음놓고 받을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영육은 퍽 약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약성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 던질 수 있는 겉옷도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 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돕는 자, 다시 말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계시는 성령은 본래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장차 누릴 영광의 기업을 누릴 수 있도록 소망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주님은 결코 이것을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결코 놓치지도, 또 포기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롬8: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로마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 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아끼시던 독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 분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요한10:28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되는지도 잘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그 큰 고통을 당해야 하셨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자! 보십시오. 수렁에 빠진 아브라함을 구하기 위해 드디어 하나님이 출동하십니다. 이 실패의 자리에서 널부러져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가오십니다. 17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명시되지 않아서 뭔지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해볼 수 있습니다. 어느 설교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가 이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침실에서 한 밤을 보내려 할 때 하나님이 k-1에 잘 나가는 최홍만 같은 사람을 보내어 밤새도록 뚜드려 주었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얼마나 놀랬으면,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들입니까? 하나님이 두려워서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엄청 분했을 겁니다. 18-19절을 보면 3번이나 문책을 합니다. "어찌하여 그런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느냐" 이겁니다. 그 문책 앞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답합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묵묵부답이요 유구무언입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자들 앞에서 아내 팔아버린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생의 가뭄이 올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날개를 접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부여잡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가뭄과 기근이 닥쳐왔을 때 아브라함이 만약 믿음을 굳게 지키고 가나안 땅을 고수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가뭄과 기근 중에 굶어죽었을까요? 하나님이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먹게 하신 그 하나님! 허허벌판 광야에서 이스라엘 수백 만 명을 40년 동안 만나로 먹여주신 그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분명히 지켜주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어려울수록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야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가야합니다. 하나님께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없던 길도 열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이 없다고 낙심하고 인간적으로 세상 길로 가는데, 믿음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은 없던 길도 새로 뚫어주십니다. 그게 기적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결단함으로 감사 기도하니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 고통 중에도 한밤에 일어나 찬미하니까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자결하려던 간수의 가정이 구원을 받고, 또 그 가정과 루디아 가정을 통해서 그 아름다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지 않습니까?

뉴욕이 번창하자 맨하튼 섬과 부르클린을 왕래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습니다. 다리가 없던 때라 사람들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워낙 물살이 세서 다리를 세울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존 뢰블링이라는 기술자가 교각 없는 다리를 설계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전문가들이 존을 보고 공상가라고 놀리고 비웃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존 뢰블링은 아들 워싱턴 뢰블링과 함께 교각 없는 다리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난공사였습니다. 불과 몇 달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존 뢰블링은 공사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뇌를 다쳐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면서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뢰블링 부자의 꿈뿐만 아니라, 교각 없는 다리도 좌절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었던 워싱턴 뢰블링은 침대에 누워서 자기 아내의 팔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했고 침상에서 다리 공사를 진행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워싱턴 뢰블링의 열심에 감동 받은 공사장의 사람들도 침식을 잊어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13년, 마침내 브루클린 다리는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3년의 일입니다.

교각 없는 다리를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의 조롱도 거센 물살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장애도 맨하튼 섬과 브루클린 사이에 교각 없는 다리를 세우겠다던 뢰블링 부자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다리는 교각 없는 최초의 다리라는 것 보다 수많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세워진 다리로 더욱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 이런 가뭄이 없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결코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없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뭄이 닥쳐올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닥쳐오는 시련 앞에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큰 축복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실패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닥쳐오는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2007년에 일어난 평양 대 부흥운동 100주년과 맞물려 더욱 부흥을 사모하며 새벽마다 교우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전에 일어났던 평양 대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당시의 이 민족의 상황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당시,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이어 을사조약까지 이어지며 국민은 앞으로 조선이 어디로 갈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절망하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황폐하던 시절입니다. 또 양반, 상놈으로 신분이 나뉘고 미신까지 팽배해 어디서도 내일의 희망을 찾아 볼 수 없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그림자가 온 땅에 짙게 드리울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령의 단비인 '이른 비'를 쏟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성령의 역사는 거대한 회개와 사랑 운동이 궁창이 뚫리듯 일시에 세상으로 퍼져나가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고 그들은 실제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들의 새로움은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민족 위에 그 동안 기다리던 '늦은 비'를 우리는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에 목말라하라"는 주제로 모든 믿음의 자녀가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번 집회에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주의 얼굴을 구하며, 이 땅과 우리의 교회 속에 넘치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부흥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 마지막 주자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모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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