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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분(義憤) -1·1·1·1 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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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요셉의 가족으로서 애굽 왕 바로의 귀빈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부터인가 노예민족으로 전락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 천지를 새로운 정책으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 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라고 했습니다.
애굽 왕은 출애굽기 1장 9절에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라고 했는데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애굽 백성만큼은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을 내심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가 통제 가능한 적정 수준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속셈은 이스라엘의 인구가 지금보다 더 불어 나지도 말고 또 더 이상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 저들의 솔직한 바램이었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야심이 국가차원의 정책으로 공포되었습니다. 그 첫째가 노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1-14절에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살남아정책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산파에게 명하여 히브리 여인이 해산할 때 사내아이는 죽이고 여자아이거든 살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6절에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고 했습니다.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는 산파들이 사내아이들을 하수가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러한 살남아정책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시라도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레위 족속 중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준수하여 석 달을 숨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역청을 칠한 갈상자에 담아 하수가에 두었습니다. 아이는 목욕하러 나온 바로 왕의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어머니 요게벳이 유모로 선택되었고 그 아이는 궁중에서 왕자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물에서 건졌다고 하여 모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세는 당대의 패권국가 애굽의 궁실에서 애굽 사람의 학문을 다 통달하여 그 말과 행사가 능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고 했습니다.
모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났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라고 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궁실에 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애굽의 혈통이나 애굽의 전통이 흐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피와 전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형제들이 노동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에 애굽 사람이 히브리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에 묻어버렸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는 모세의 실수입니다. 이러한 편협한 패륜적 정의감은 근본부터 없애야 합니다. 더욱이 살인행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동기를 볼 때 정상참작을 구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동기는 패륜적인 살생에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선민의식에서 분출된 그의 의분(義憤)에다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바로 왕의 궁실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던 모세가 왜 이러한 의분이 일어났습니까.

Ⅰ. 모세의 의분(義憤)은 그의 전통의 산물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가진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동양인인데도 일본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통 때문입니다. 모세의 의식 속에 맥맥히 흐르는 그의 전통은

1) 선민의식입니다.
본문 2장 1-2절에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레위 족속의 자손입니다. 레위 족속은 제사장 지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백성입니다. 바로의 궁실에서 보낸 날들과 습득한 학문과 기술은 모세의 전통이 될 수 없습니다.

구태여 40여 년간의 궁중생활과 애굽의 학문과 기술을 익힌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궁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만든 특별조치였기 때문입니다. 한사코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중히 여길 줄 아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담대한 신앙인격에 돌려야 합니다.
모세는 고된 노역과 살남아정책으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척이나 사치스러웠을 것입니다. 차라리 왕궁에서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있는 것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전통은

2) 언약의식입니다.
창세기 50장 24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7절에 또 말하기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민족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것과 언젠가는 자기의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에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습니다. 선민의식과 하나님의 언약의식이 저들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전통은 ① 성경적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전통은 ② 신행일치의 순교적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전통은 ③ 앞서간 신앙조부들의 신앙계승입니다.
신앙전통이 우리 교단형성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성도들 간에 불신 법정의 송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모교파에서 성도들끼리 분쟁이 있어서 이것을 세상법정에 가지고 갔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서울지법 민사 28부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판결문을 내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와 신의 명령을 어기면서 교회문제를 세속법정으로 가져 올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화해라는 정신으로 처리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간에 세상 법정의 송사는 하지 않는 것이 성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혜로우며 지혜로운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다시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범죄행위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5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라고 했습니다.

Ⅱ. 모세의 의분(義憤)은 형제를 향한 관심의 산물입니다.

본문 2장 11절에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라고 했습니다.
형제에 대한 관심이 행동화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서, 돌아보더니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정의감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2장 11-12절에는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4절에는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들을 쳐죽이니라 』고 했습니다.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운동은 결코 육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주의는 기독교의 적입니다.
그렇다고 모세를 향하여 살인죄만 뒤집어 씌워서 그를 정죄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생각하는 간절함이 극에 달한 의분으로 변하여 압제받는 히브리 민족을 위해 불타는 정의감이 발동하고 말았습니다.
무관심은 원수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관심은 죽은 관계, 영안실 관계입니다.

Ⅲ. 모세의 의분(義憤)은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니 이제는 히브리 민족끼리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그른 자를 향하여 만류할 때 본문 2장 14절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탄로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고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자기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종살이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저 천국을 향하여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 백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중에 택자와 불택자를 가릴 능력도 권한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내 동포를 붙잡아 놓고 있는 오늘의 애굽이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까? 향락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내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내 형제와 골육들을 돌아볼 생각이 나야 합니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돌아보아야 합니다. 실천적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믿지 않는 골육에 대해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 내 골육을 결박해 놓고 마음대로 부려먹는 마귀의 역사에 분노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내 형제를 마귀의 올무에서 이끌어 내는 일이 자신이 마귀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인 동시에 새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의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와 골육을 사랑하는 이유 때문에 의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내 형제를 마귀의 올무에서 이끌어내는 일이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거듭났다는 증거가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B.C의 삶에서 A.D의 삶으로 된 일차적인 증거가 바로 형제와 골육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분은 자기 만족에서부터 시작되는 희생의 산물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영역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하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포기해야 될 보화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보화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 세상의 미련에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보화를 희생하고 내 동포의 고난의 현장에 나가서 괴롭히는 오늘의 애굽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내 백성을 구해내어 봅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주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고생하고 아파하는 그 사람을 찾아 갑시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된 표식이며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지난주에 다녀간 캐나다의 오집사는 자기 친구를 전도하고 갔습니다. 그 친구가 오집사에게 하는 말이' "너가 왜 그 많은 세월 동안 나에게 교회 나가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망의 늪에서 건져냄을 받은 오늘의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화려한 궁실에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절대종교화 된 오늘의 이 세상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문화입니다. 절대과학주의, 절대황금만능주의는 하나님을 떠난 사상입니다. 마치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재료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귀의 장난감을 만드는 광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분냄은 의분이 아닙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분노가 의분입니다. 의분이 없는 삶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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