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 자신을 알자 (창 3:1-9, 롬 8:18-25, 마 3:7-9 )

  • 잡초 잡초
  • 527
  • 0

첨부 1


1.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입구에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의 내용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기로 하고 흙으로 만드시고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다소 우월한 입장에 서서 정죄하면서, 또는 경멸하면서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흔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분수를 알라!”든지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은 거기서 제외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남의 눈에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네 눈에 있는 들보부터 밝히 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에도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 자신부터 살펴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코 남에게 자랑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남의 눈의 티를 보고서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은 하나님 앞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말씀을 상고하는 가운데 먼저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 한번 부흥을 일으켜 보자!”고 해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살피고서 가슴을 치며 회개한 것이 바로 평양 대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이 땅에 다시 1907년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남을 바라보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 첫날 살펴 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전 민족의 공동체적인 회개가 있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과도 같습니다. 내가 먼저, 우리 교회가 먼저, 그리고 한국 교회에 이런 공동체적인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우셔서 이 땅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붙여주시게 될 줄 믿습니다.

2. 1903년, 당시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남 감리교의 여자 선교사 Mary C. White가 원산을 방문하여 원산에서 선교하던 캐나다 장로교 여자 선교사 Louise McCully와 함께 한국에 나와서 선교하는 동료 선교사들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원산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 7명이 함께 성경공부와 기도에 집중하자고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기간을 정하고 한국에 대한 경험이 많은 남자 선교사 Robert A. Hardie에게 3가지 제목으로 설교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요14:12, 14:과 15;7, 16:23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  “그리스도 안에 거함”, 그리고 “오순절의 체험”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강의하던 하디선교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꼬꾸라지면서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때 하디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3년 동안 교회가 처음 터를 닦은 강원도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나 나는 거기서 사역에 실패하였습니다. 이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사역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나를 향한 성령님의 첫 번째 요구는 나와 함께 선교해 온 선교사들 앞에서 나의 실패의 원인을 시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 없었던 것과 동료 선교사들에 대한 교만, 한국인들을 향한 오해와 불신, 그 결과로 이런 실패를 초래하게 된 나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이 회개가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의 핵이 되었습니다. 평신도가 아닌 선교사가, 그것도 10여년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사람이 자신의 선교 사역에 관하여 심각하게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인 회개로 이어진 것 이것이 바로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것이 한국 교회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여기 당시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중요한 3가지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메시지가 될 줄 믿습니다.

(1) 그것은 철저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역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요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우리 주님도 그 맨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원산에서의 회개운동이 곳곳으로 퍼져나가던 중 기도의 사람 길선주 목사에 의하여 뜨겁게 불이 붙었습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그리고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회개는 감정적 흥분에 머문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감추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회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크고 작은 무서운 죄악들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모두 토해내는 처절한 통곡의 회개였고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 회개였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한국의 오순절”이라는 글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시내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집 저 집으로 다니며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훔친 물건과 돈을 되돌려 주느라 시내는 온통 술렁거렸다. 한 중국 상인은 어떤 기독교인이 자기를 찾아와 수년전 그에게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여 모은 것이라며 거금을 되돌려 주는 것을 받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회개와 눈물의 기도가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2) 평양 대 부흥 운동은 성경 공부와 기도생활이 바로 목회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초와 중심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과 같이 원산에서의 부흥의 불길도 역시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평양에서도 그랬습니다. 1907년 신년 사경회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모였는데 1500여명의 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10일 동안 성경 공부와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서 저 유명한 평양 대 부흥운동과 기도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부흥의 역사가 그토록 열광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광신적으로 빠지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 공부가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가 얼마나 철두철미 말씀과 기도 중심의 사람이었는지를 오늘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며 길선주 목사님은 구약 30회 신약 100회, 창세기 이사야 에스더 540회, 요한 계시록 1만 독, 요한 서신 500회를 독파하였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회 후에는 20분간 반드시 요한 계시록을 암송하였으며 부흥회 낮 공부는 항상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였는데 이것이 당시 한국 교회 부흥 사경회의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교인들은 밤 집회를 마치고 나면 그 추운 날씨에도 산으로 올라가 얼음장 같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령 부어주시기를 기도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길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새벽에도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길 목사님은 며칠만이라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4시 30분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밤 1시부터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미 3시에는 엄청나게 많이 모였으며 4시 30분에는 400명 이상이 모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한국 교회 새벽기도회의 시발이었고, 이것이 한국 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평양 대 부흥운동의 저변에는 말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부흥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3) 평양 대 부흥 운동은 복음전파와 사랑의 봉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열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당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이야말로 저들의 의무로 알았습니다. 적어도 1907년의 부흥운동은 전도운동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부흥운동과 전도운동이 함께 손잡고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해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 되었는데 지금 우리들의 회의에서 흔히 보게 되는 분쟁이나 다툼은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최초로 일곱 명의 한국인이 목사로 안수 받았는데 그때 총회는 오직 기도하는 일, 그리고 전도하는 일,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면 중국과 일본까지 복음을 전하자고 하면서 해외선교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독노회의 첫 사업으로 당시로서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 기풍 목사님은 제주도로 파송되어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으며, 미신이 말할 수 없이 심했던 제주도에서 사경에 처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님이 제주도민에게 베푼 전도와 사랑의 봉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도 믿기 전에 선교사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민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도 좋다는 그런 사랑과 절실한 사명감으로 전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김익두 목사님은 평생에 800여회의 전도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28,000여회의 설교, 10,0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최 권능(봉석) 목사님의 길거리 전도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가 나중에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갇혀 매를 맞을 때마다 자기 안에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꽉 차 있다고 하면서 “예수 천당”을 외쳤다고 하는 일화는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은 복음전도와 사랑의 봉사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초대 교회의 오순절적 부흥 운동이었고, 그 중심에는 철저한 회개운동이 있었으며, 기도와 말씀이 그 기초가 되었으며, 복음전도와 사랑의 봉사가 열매로 맺힌 운동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였습니다. 이것이 저력이 되어서 일제 36년간의 그 무서운 박해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온 국민들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1907년의 이런 모습을 주마간산 격으로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오늘 우리들과 우리 교회들의 안일과 타락이며, 성도들과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세속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단지 전시적 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교회가 마침내 이 민족을 깨우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