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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존심 버리기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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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을 “자존심 내려놓기”로 할까 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내려놓은 것을 다시 집어 드는 경우가 있어서, “자존심 버리기”로 정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존심입니다. 그냥 한번 웃어주면 모두 즐겁고 좋을 텐데,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분쟁에 말려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존심 때문입니다.
술, 담배, 마약, 도박 같은 중독에 빠지는 것도 자존심 탓이 큽니다.
좋았던 인간관계가 순간에 깨지고 마는 것도, 자존심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부간에는 정말 자존심 따위는 내세울 처지가 결코 아닌데,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어렵게 되는 수가 참 많습니다. 어쩌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내뱉은 말을, 자존심 내세우느라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안해. 내가 참 바보야, 응?” 그러면 될 걸, 그렇게 못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그렇습니다. 미국 부모들 하는 걸 가만 보면, 정말 ‘친구’ 같습니다. “네가 아빠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하고 화를 내는 건 대개 한국 사람들입니다. 미국 부모들은 참 쉽게 자녀들에게 묻고, 배웁니다. 따지고 보면, 이민가정 한국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 더 많지 않습니까? 영어도 물어야 하고, 미국 생활 하나하나 다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콤플렉스가 쌓여서 불필요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지도 모르겠지만.

태어날 때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처음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자꾸 껴입은 겉옷들 때문에,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계속 나오는 자존심의 껍질 속에 숨은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 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영이 맑고 순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끼도 끼었고, 딱딱한 각질도 생겼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불편합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요?

자존심을 버렸는지 여부를 알아보려면, 성경읽기가 얼마나 쉬운지, 기도가 얼마나 잘 되는지 여부를 보면 됩니다. 자주 성경을 읽고, 자주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존심을 버린 사람입니다.

길 가다가 모르겠으면, 아무에게나 묻는 사람이 자존심 버린 사람 아닙니까? 끝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건 안타깝습니다. 성경읽기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모두 “주님께 여쭈어 보자!”는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자존심 높이 세우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만일 그런다면, 둘 중에 하나는 거짓입니다. 성경읽기와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자존심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겸손한 사람이거나.

어린 딸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수로보니게에 사는 가족이었습니다. 이방 땅입니다. 그 여자는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세를 보십시오. 그냥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간청했습니다. “저의 딸을 고쳐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하신 말씀을 풀면 이런 뜻입니다. “자녀에게 먼저 배부르게 먹게 해야 한다. 자녀가 아직 먹고 있는데, 그 떡을 빼앗아 개에게 던져 줄 수 있느냐?”

여기서 “자녀”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다 전하지 못했다.
      아직 이스라엘에 기적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그런데, 시간도 없는데, 지금 내가 이방인에게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하느냐?      이건 자녀에게 줄 떡을 빼앗아 개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녀’로 보고, 이방인, 좁게는 바로 그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로 본 것이 아닙니까?

웬만하면 자존심을 높이면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소리를 치고 말 것입니다.

      “그만 두십시오! 내가 개라구요?
      그러면 내 딸이 개의 자식이란 말입니까?
      내가 당신 아니면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이렇게 요청하는 줄 아십니까?
      내 죽으면 죽었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습니다.
      다 그만 두시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개”로 비유했습니다.

      주여.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을 보십시오.
      주인의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개”로서 “부스러기”라도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부스러기”라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두고 볼 일도 아니었습니다. “즉시” 주님께서 그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정말 마음이 급할 때는 자존심을 내세울 여유가 없습니다. 소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일’을 높이고, 자기는 낮춥니다. "Sense of urgency," 그렇습니다. 이 긴박성 인식이야말로 자기를 낮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낮출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존귀케 하셨습니다.

사울의 경우를 봅시다(삼상 15장).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하나님께서 “헤렘”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양과 소 중에 살지고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없고 낮은 것만 명령을 따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나갔을 때, 사람들이 “사울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떠났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사무엘을 만나자,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듣는 이 양과 소의 소리는 다 무엇입니까?”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왜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울이 ‘변명’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제사드릴 양과 소를 남긴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대신, 자존심을 높이 세워 “변명”한 것입니다. 변명이란 자존심을 높이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입니다.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순종하는 것보다 형식적인 제사 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실까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왕에 그에게 주신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에게 주신 은혜는 구체적으로 “왕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 은혜는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입니다.

사울의 자존심은 ‘왕’이라는 지위에서 났습니다. 왕 되기 이전에 사울은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나서 언제부터인가 ‘교만’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부자’가 되어갈수록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욱 더 부자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쌓아갈수록 더욱 더 겸손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욱더 지식이 풍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돈이나 지식이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한없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높여주어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높이 세우실 것입니다. 왜요? 그렇게 해서 “효과적으로” “크게”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집안에 작은 그릇이 있고 큰 그릇이 있듯, 사람도 그 그릇됨이 다른 법입니다. 쉽게 우쭐해지고, 교만해지며, 자존심을 높이 내세우는 사람치고 큰 그릇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소금이며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는 엄청난 ‘지위’와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높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맛”을 잃은 소금이며, “빛”을 잃은 빛입니다. 쓸데가 없습니다.

버릴 때 얻습니다. 죽을 때 삽니다. 내려올 때 올라갑니다. 이는 생명의 법칙이며, 사명의 법칙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의 자존심을 땅에 내려놓음으로써 자식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진실된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습니다.
아직도 자존심을 붙들고 있는 당신은 어떤 부모입니까?
자존심으로 자식을 기를 수 있습니까?
여태까지 해 오신 방식은 성공이었습니까?

이제라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여기 생명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느냐?” 소리쳤습니다.
다윗이 막대기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골리앗이었습니다.

누가 그를 개로 여긴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그 모욕을 다 당하고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다윗이 나타나자 “스스로를 개로 여기며” 분노하여 소리질렀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느냐?” 다윗은 그를 개라고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골리앗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자존심 높은 사람은 ‘컴플렉스’도 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습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그냥 겸손한 사람은, 그렇게 둘쑥날쑥하지를 않습니다.
그 마음은 호수처럼 잔잔한 것입니다.

금문교회 목회는 금문인 여러분을 예수님 앞으로 돌려드립니다. 교회행사에 매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감정’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옛날 찬송가 가사입니다: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들던 것 주가 붙드네.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존심을 땅에 내려놓고,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마귀는 자존심을 파고듭니다.

      “너, 괜찮은 사람이잖아?”
      “너 이렇게 당하고도 괜찮아?”
      “누가 함부로 네 영역을 침범해?”
      “누가 감히 너를 우습게 여긴다는 말이냐?”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네 이름을 네가 지켜!”

이런 속삭임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Cut off! 버려라!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콜롬비아 내 방에서 바퀴벌레와 풍뎅이, 그리고 나방을 내어 쫓아내야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존심을 꼬투리로 잡고 대화를 트는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1. 영적 업그레이드

이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삶은 그 자체로 죄입니다.

우리가 높여야 할 것은 “거룩한 자존심”입니다.

빛이며 소금 되는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제사장 나라”이며, “거룩한 백성”입니다(출 19:6).


2. 버리기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을 끊어야 합니다.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잘라낸 것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미련의 여지를 남겨두지 마십시오.


3. 성경 읽는 훈련

거룩케 되는 훈련에 참여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속에 녹아져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겸손함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립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개역

[개역](벧전5: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개역

우리는 누구입니까?
죄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웃어주는 여유는 자존심을 버릴 때 가능합니다.
작은 정성이라도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겸손할 때입니다.

사람은 간사합니다.
어제까지는 겸손했어도, 오늘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길러지는 것입니다. 훈련으로 얻어지는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갈고 닦아야’ 하겠습니다.

주여, 저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작은 성공으로 교만해지지 말게 하옵소서.
진실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승리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4. 자존심 꺾기

이제는 하나님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의 자존심을 꺾으십니다. 왜요?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living in the grace of God)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울의 어떤 교회 대학부를 맡아 주님을 섬길 때입니다. 중고등부 성가대를 한동안 지도했는데, 거기 중등부에 어떤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지능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를 만났습니다. 둘 다 일류대학을 나온 소위 “엘리트”였습니다. 집도 부자였습니다. 한동안 해마다 정성껏 필기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나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자존심을 꺾으셨을 때,
      저는 상처 난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건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보여준 사랑입니다.
      이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내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내 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이 죄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아침마다 일어나 “회개”합니다.
      주님,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교만했던 죄, 사람을 무시했던 죄,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실력으로 오해했던 죄,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챘던 죄,
      이 모든 죄를 용서하옵소서.
      또한 이 아이는 나에게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때로 우리 스스로가 자존심을 버리지 않을 때,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꺾어 버리십니다.

      그것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단다.
      그건 버려야 한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자존심 때문에 망하는 걸 내가 볼 수가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인간관계의 좌절에서 옵니다.

      나같이 자존심 높은 사람이
      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이 정도로 주저앉게 되다니!

그런데, 이것 보세요. 그런 수치와 치욕의 밤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맑고 밝은 새 날을 새벽과 함께 주실 때, 비로소 여러분의 가슴에 차 오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은혜”입니다.

      아하,
      내가 살아있는 건
      나를 살아있게 하신 건
      바로 이 은혜로구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버리게 하십니다. 삶의 고통 속에 주님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로 자기의 자존심을 세웠습니다. 실지로 그런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정말 별거 아닌 여자 종들, 동네 사람들의 질문 앞에 그를 쓰러지게 만들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울 때, 그는 구석에 쓰러져 울면서 울음소리를 삼켰습니다.

      주여,
      저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자존심에 상처 입은 베드로는 물고기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찾아가심으로써” 그의 상처를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회복의 은혜!
이것은 자존심을 버리게 하신 상처, 생명을 위한 상처 이후에 온 진정한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오늘 새벽 다섯 시 반, 베이브릿지를 지나는 차 안에서, 주님은 이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Precious Lord, take my hand, lead me on
Let me stand I am tired I am weak I am worn
Thru the storm thru the night lead me on to the light
Take my hand precious Lord lead me Home.

When my way grown drear
Precious Lord linger near
When my life is almost gone
Hear my cry, hear my call
Hold my hand lest I fall
Take my hand precious Lord
Lead me Home.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하면
그 자체로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그 자체로 두 번째 좌절자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들으십시오!
귀를 여시고, 마음의 창을 여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문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자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희들 자신을 돌아볼 때, 다 죄 뿐입니다.
이제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일생 사는 날 동안,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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