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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혀 뜻밖의 은혜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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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 테러, 무엇이 문제인가?>
얼마 전에 한 전직 교수가 서울 고등법원의 부장판사에게
테러를 가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S대학의 수학과 교수였던 김모씨는 11년 전, 재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김씨는 자신이 해직된 이유가 본고사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에 대해 학교측이 앙심을 품고 보복성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김씨가 교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김씨가 성격이 괴팍해서 걸핏하면 동료 교수들의 인격이나
실력을 무시하고 폄하해서 학교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결국 복직을 희망한 김씨가 법정 소송을 벌였는데 서울
고등법원에서는 학교측이 정당했다며 학교쪽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김씨는 결국 석궁으로
자기에게 패소판결을 내린 부장판사의 배에다 테러를 가했습니다.
이 사건이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조직폭력배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테러가
대표적인 엘리트들, 즉 '사'자 돌림의 판사와 박사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해자인 김교수 쪽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씨는 이 나라의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용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응용수학 분야에서는 그 실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학자였던 것입니다.
또한 소신도 분명하고, 원리원칙을 유난히 따지는 매우 깐깐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테러라는 방법으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다는 태도는 도무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사람이기에 억울함과 한(恨)이 쌓이면 복받친 감정 때문에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폭력으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보겠다는 발상은 옳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정당하고 의로운데 상대방은 부당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독선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한 일은 원리원칙에 따라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양심적인 일이다."
"하지만 양심의 화신이 되어야 할 사법부까지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가 응징을 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독선의 논리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학교측이나 법원쪽에서 김씨에게 품성이나
자질면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꽤 설득력이 높습니다.

김씨는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가 옳다는 입장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조금 더 의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자기는 정의로운데 세상이 자기를 정죄하고 왕따를 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아주 공평무사하게 판결을 내려야 할 사법부조차도 자기를 몰라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 對 하나님의 은총>
그렇다면, 우리가 옳다고 우기며 따지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대응하실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다가 불현듯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억울하기로 말한다면 본문에 나오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땀흘려 일한 일꾼들도 결코 남 못지 않습니다.
아마 '정의' 혹은 '정당한 댓가' 혹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이 일꾼들 역시 주인의 멱살을 거머잡고 주먹질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들을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할 일꾼들을 다 정해서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일터에 보낼 때 주인은 품삯까지 미리 계약을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듯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받기로 노사간에 합의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주인은 이와 같이 품삯 계약을 다 마친
사람들말고도 다른 일꾼들을 더 쓰고 싶어했습니다.
그리하여 오전 9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빈둥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주인이 이들에게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그러면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침 일찍, 아마 오전 9시보다 더 일찍 한 7시나 8시쯤에
일터에 보낸 사람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분명히 정했는데,
9시부터 일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편의상, 가장 이른 아침 일찍 일터로 간 사람들은 정규직 일꾼들로,
오전 9시 이후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비정규직 일꾼들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은 계속해서 낮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비정규직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아마 이들 역시 아무도 써주는 사람 없이 노는 사람들이었기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터로 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6절 말씀에 보면 주인은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 아직도
빈둥거리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은 이들 역시 포도원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마침내 오후 6시에 일이 끝났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품삯을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주인이 관리인을 시켜 품삯을 지불하도록 한 순서입니다.

8절을 보세요.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대개는 맨 먼저 일한 사람부터 품삯을 주고 맨 나중에 일한
사람은 맨 나중에 셈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은 거꾸로 하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맨 나중에, 즉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한 시간 일한
일꾼들이 품삯을 받게 되었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입니다.
자, 10절을 보세요.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 맨 처음부터
와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은 당연히 더 받을 줄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속에서 품삯 지불 순서를 맨 나중부터 일한 사람에서
시작해서 맨 처음 일한 사람 순으로 설정하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맨 나중 일한 사람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어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데,
나는 아침 7시부터 와서 저녁 6시까지 근 열 시간 이상을 땀흘려 일 했으니
틀림없이 더 받을 것이다," 이런 기대심리를 보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과연 그랬습니다.
아마 저나 여러분도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은 기대를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열 시간 일한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이나 열 시간 일한 자기들이나 품삯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이것은 부당합니다."
"정의롭지 못합니다."
"노동법이나 근로기준법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따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11-12절을 보세요.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우리를 똑같이 대하다니요!
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열 시간 일한 우리에게는 열 데나리온을 줘야 마땅합니다!"

세상적인 이치로 보면 충분히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13-15절을 보세요.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이 맨 처음 와서 일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마 오늘로 말하면 이 사람은 노조 위원장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노조 위원장에게 한 말의 요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가장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과 주인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하기로 미리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한 품삯만 받아 가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는 것이지요.
주인의 이 말은 법률적인 소견이 짧은 제 눈으로 볼 때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정서적인 문제요 기분상의 문제이지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는 듯이 보입니다!

둘째로, 맨 나중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에게와
마찬가지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주인이 자기 돈을 가지고 맨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 수 있지요.
주인의 돈을 주인의 마음대로 하는 건데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로, 비록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어서 후하게 선대한 것에 대해서 왜 눈살을 찌푸리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중요한 말인데요.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어도 주인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꾼으로 써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빈둥빈둥 놀던
사람들이요, 또 품삯도 정하지 않고 쓰는 비정규직 일꾼들이었기에
주인이 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인이 선심을 좀 썼습니다.
이렇게 자비를 좀 베풀었기로서니 왜 당신들이 시기 질투를 하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와 같이 적어도 주인이 한 말은 결코 사리에 어긋난 말이 아닙니다.
정서적으로 기분적으로, 사기를 세워주는 측면에서는
좀 문제가 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逆轉의 나라,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본문 1절에서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끝내고 맨 끄트머리 16절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과 천국은 정반대로 역전이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는 보상과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한 행위는 반드시 상으로,
악한 행위는 반드시 벌로 보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윤리적인 법칙이요 정의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이와 같은
윤리적인 법칙, 즉 정의의 차원을 훨씬 더 넘어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시간 와서 일한 일꾼이나 열 시간 동안이나 뼈가 빠지게 일한 일꾼을
똑같이 대하는 주인은 결코 공정하고 의로운 주인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주인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배 생활, 헌금 생활, 윤리 생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열성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창기나 세리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죄하는 죄인들 중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평생을 하나님 믿은
바래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못지 않게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지
겨우 하루 밖에 되지 않는 이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들으면 기가 막힌 말이지요.
도무지 공평치 못합니다.
"아니, 모태 신앙인으로서 일생 동안 하나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겨온 우리들이나 하나님 믿은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는 저 창기와 세리들과 똑같이 대한다니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해외에 나가 허랑 방탕하며 창기와 더불어 다 날려버리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 모시고
모범적으로 효도해 온 큰아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사랑과 자비로
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인에게 따지는 맨 처음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은 둘째 아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 대해서 따지는 큰아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정의로운 나라이지만 정의를
훨씬 뛰어넘는 사랑과 은총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의나 은혜가 나의 인간적인 노력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나의 노력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시간 일한 일꾼들이나 열 시간 일한 일꾼들이나 똑같은
품삯을 지불할 권리,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주인만의
고유한 권리는 일꾼들의 수고, 즉 행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 정도의 은혜와 복을
베푸셔야 하다는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 때문에,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만 일 하고서도 열한 시간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인간의 수고에 따라 셈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자비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간 일한 일꾼들도 놀랐고 열 시간 일한 일꾼들도 다 놀랐을 것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뜻밖에 다가옵니다.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혹은 우리의 인격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과 사랑 때문에 전혀 뜻밖에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사고 팔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값없이 주어질 뿐입니다!

<뜻밖의 은혜를 긍정하는 삶을 향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에 석궁으로 부장판사의 배에 화살을 쏜 김교수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의 주장처럼 학교 당국이 부당하게 자기를 해고시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법정 소송 역시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달리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자신이 의롭고 정직하고 양심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상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감만 가지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열 시간 일한 일꾼처럼 왜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나와 똑같이
대접을 받아야만 하느냐는 생각을 때로는 접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옳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중 된 이웃이 먼저 된 나보다 더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러한 사실을 긍정하고 이웃을 따뜻한 눈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창기와 세리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은혜를 베푸시듯이
나보다 더 부족하고 연약한 이웃들도 똑같이 뜻밖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만일 이런 믿음과 이런 관대한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전혀 뜻밖에 또 다른 은총을 우리에게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길을 막으시면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김교수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은 왜 그렇게 뛰어난
실력으로 좀 더 귀하게 쓰임을 받지 못하고 범죄자로 전락했느냐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금만 더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을 열어주셨을 텐데 말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이 만큼 했으니 이 만큼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 만큼 바쳤고 이 만큼 봉사했으니 이 만한 복과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런 생각은 물물교환이요 Bargaining, 하나님과의 거래이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욥 1: 9절의 말씀처럼 아무 사심 없이, 기대와 보상 심리 없이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합니다.

내가 한 행위와 공로만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도 비례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
스스로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 모두 전혀 뜻밖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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