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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수 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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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사실을 묵상했습니다. 패배한 이유는 자만심, 기도하지 않음 등의 이유를 들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물건을 몰래 빼돌리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간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에서 패배하도록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는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배에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 배를 탄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공동체성입니다. 나만 죄짓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과 실수는 나 한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엮여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이요 한 공동체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이 우리 문제가 제대로 보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의 대가는 너무 큽니다. 아간은 단 30분 동안에 죄를 저질렀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패배했고, 36명의 아까운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은 모두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3천 명이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을 이제는 전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대 전투를 치려야 했습니다. 죄를 저지르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대가를 받고 그 죄를 처리하는 데는 30년도 더 걸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는 단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로 수많은 인류가 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우된 피흘리까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12:4) 우리가 각오하고 죄와 싸우기로 결단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싸우기로 결단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이 없으므로 우리는 번번히 지고 맙니다. 내 속에서 죄악을 즐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아이 성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의 죄를 색출해서 모두 불살랐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간의 죄에 빠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7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도 없고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겠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바로 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내었고, 이스라엘은 자만심에 취해 아이 성을 우습게 여겼던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드디어 승리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탈취한 물건은 스스로 취하라

그렇지만 여리고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절 말씀입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여리고성 전투에서 아간이 시날 산 외투와 은금을 숨겼기 때문에, 곧 탈취한 물건을 숨겼기 때문에 이런 큰 어려움을 당하고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 성 전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건과 가축을 취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간을 죽이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인가요? 아니면 원래 하나님의 뜻이 원래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이제 물건을 취해도 좋다고 그 뜻을 바꾸신 이유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로 상반된 명령 앞에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여리고성에서는 절대 물건을 취해서는 안 되지만 아이 성에서는 취해도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과 물질이 필요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신명기서에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29:5)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한 벌 옷과 한 짝의 신발만 신고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거지같이 산 것입니다. 그러니 아간이 시날 산 고급 외투에 눈이 먼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배고프다고 해서, 내게 필요하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을 어겨가며 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순간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사단이 나타나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그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며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위기라고 해서 사단의 말까지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형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아간이 조금만 기다렸다면 그는 아이 성에서 마음껏 물질을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코너로 몰아 굶어 죽게 하시지 않습니다. 마른 땅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이 모순된 듯한 명령 앞에 우리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하고 항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왼쪽에 그물을 내리라 하면 왼쪽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요,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라 하면 오른 쪽에 그물을 내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과 경험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자기 자아가 너무 강해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셔야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 중 하나가 순종이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나 그의 스승된 수도자에게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수도자의 길은 유혹이 많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복종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은 바로 자기 의지와 판단을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역사에 보며 이 순종 훈련을 시키기 위해 스승된 수도자가 엉뚱한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성 프랜시스의 일화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 두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며 “뿌리는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 잎은 땅에 묻히도록 심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그에 대한 질문도 받지 않고 성 프랜시스 사라졌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두 젊은이는 처음에는 순종하여 성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그 중 한 젊은이는 도무지 그런 불합리한 며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뿌리를 하늘로 향하도록 심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어 정상적으로 뿌리가 땅을 향하도록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계속 해서 심었습니다.

누가 성 프랜시스의 수도자로 받아 들여졌겠습니까? 한참 후에 돌아온 성 프랜시스는 자기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수도사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는 돌려보냈습니다. 프랜시스는 순종하는 마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수도 생활을 하려면 생각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스승의 말에 단순히 순종할 줄 알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라도 우리 판단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 문제가 풀립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사실 인생의 문제는 생각이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보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따르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 전개 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하루에 한 번씩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이 전투에는 병법도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순전히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 전투는 철저히 병법에 의지한 전투였습니다. 밤중에 여호수아가 3만 명을 숲 속에 매복시켜 놓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추가로 5천 명을 더 매복 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 군대와 전투를 벌여 거짓 패한 척 달아납니다. 첫 전투에서 승리했던 아이 백성들은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이 때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성을 불태웁니다. 그리고 뒤쪽에서 쫓아오며 아이 군대를 칩니다. 이 때 달아나던 이스라엘 본진이 다시 뒤돌아서 아이 군대를 양쪽에서 협공을 합니다. 이 전투 결과 아이 성 백성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둡니다. 철저한 매복 작전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도한 전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리고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계획한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6장에서 여리고 성을 돌도록 명령한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읽은 8장 2절에서도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명령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전투의 진행양식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적인 방법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사와 인간적인 것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떤 분이 사는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이 분은 독실한 성도였기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물이 차 급기야 지붕 위로 올라선 그에게 구조선이 다가왔습니다. 빨리 보트에 올라타라고 하였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울 것이니까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더 차올랐습니다. 두 번째 구조선이 와서 구명 튜브를 던졌지만 이분은 거절하였습니다. 이제는 물이 거의 목까지 차올랐을 때 헬리콥터가 와서 이분에게 로프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심 좋은 이 분은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면서 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 성도는 홍수에 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 이 분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기도하면 분명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면서 왜 제 기도를 외면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아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듣고 너에게 구조선을 보내고, 구명 튜브를 던지고,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보냈는데. 네가 모두 거절했다”

이 분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만 자기에게 응답하실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방식은 다양합니다. 우리의 병을 기도로 낫게 해주실 수도 있고, 병원 의사의 손을 빌어 낫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이렇게 사람의 손을 통해 낫는 것을 비신앙적이고 어딘지 은혜스럽지 못한 방법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의사의 치료보다 기도원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는 분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은 꿈과 신비한 음성으로 들릴 수도 있고, 책이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아니면 여러 환경 변화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적적인 방식으로 드라마틱하게 도울 수도 있지만, 평범하게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방법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도움을 받을 때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 돕는 사람도 자기가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대리했다고 하며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느 때는 여리고 성을 돌듯이 무식하게 돌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무기력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어느 때는 기도보다는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중에서 여리고 성처럼 기적적인 승리가 더 많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전략과 전술에 의한 전투가 더 많겠습니까? 사실 전략 전술에 의한 승리가 더 많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에서나 언제든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러나 그 인도하는 방식은 그때마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대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여 싸움에 이기도록 만드실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우리 인생에 가끔 있을 뿐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말 간헐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만 바라지 말고 우리 실력을 기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데 기적적으로 이긴 싸움 같아 보입니다. 골리앗은 그 키만 해도 여섯 규빗 한 뼘, 곧 283센티미터였습니다. 그 갑옷의 무게만도 근 60kg에 달했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작고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목동 일만 했고 군사적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며 오직 신앙 하나만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탁월하게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물맷돌의 용사였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으로 무장되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4-36)

전혀 기적만은 아니었습니다. 승산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시기 위해 오래전부터 다윗을 훈련시키시고 물맷돌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그저 여리고 성만 돌고 기적만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실력을 연마해야 하고 그러할 때 하나님 앞에 제대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아이 성 전투의 특이한 점은 또한 두 번에 걸친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지고 한 번은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스라엘은 패배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인생에서 누구든 패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실수하고 시행착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 패배보다 더 두려운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유명한 릭 워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한 주일에 한 가지씩 실수를 하십시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완벽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실패했을 때의 처방은 간단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1)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패배의 무기력으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기민하게 밤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복병 3만 명을 미리 숨겨놓습니다. 10절에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점고하고 아이 성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하나님은 18절에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는 순간 이것이 신호가 되어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합니다. 단창을 든 여호수아의 손은 단순히 공격신호만이 아니었습니다. 26절에 보면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 내내 여호수아는 이 단창을 들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루 종일 단창을 들고 서 있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단창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단창을 든 손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이 내려간 순간 우리는 그 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마치 갓 출애굽한 후 아말렉과의 싸움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때는 아래서 여호수아가 싸우고 있었고 산위에서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팔이 피곤하여 그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예 돌 위에 앉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들어 주었습니다. 이는 기도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까지 단창을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아이를 가리키는 단창은 목표를 향한 집중력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여호수아의 손에 든 단창만 보고 있습니다. 그 단창이 향하는 방향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거나 중간에 흐트러지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달려나갈 푯대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푯대를 놓치지 않는 인생이 승리합니다. 문제는 집중력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단창을 들어 아이를 향하였고, 이스라엘은 그 지시를 따라 싸움에 집중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목표를 향하여 단창을 들어 가리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까지 그 잡은 단창을 내려놓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기도의 단창을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 단창이 향하는 목표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미 아이 성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단창을 내려놓지 않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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