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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모임을 만들자 (느 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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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각종 대회나 모임은 화려하고 멋지다. 그리고 많은 거액의 자금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 모임은 먹는 것, 입는 것, 건강하게 사는 육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좀 더 윤택하게 사는 삶을 위한 모임이다. 이런 모임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더 나은 도자기, 더 나은 미술품, 더 나은 문명의 도구를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생과 내생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모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모임이다. 그것이 말씀 공부이든, 기도 모임이든, 이 모임들은 영혼을 위한 것으로 정말 중요하다. 특히 주일을 성수하는 예배의 모임은 기독교의 특징이고 주일의 모임은 목숨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주5일제로 인해 주일 개념이 사라지고 주말은 놀라가는 날, 주일은 세상으로 여행가는 날로 생각이 바뀌면서 삶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신앙을 위한 모임을 잘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모임 가운데에서 에스라가 강사가 된 수문 앞의 광장 집회가 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일제히 그 광장에 모였다. 그 광장에서 에스라는 율법서를 낭독하였고 백성들을 그 말씀을 귀로 들었다.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여 듣는 광장 집회는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울었다. 지도자들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고 근심했는지 묻게 된다. 그것은 느헤미야 9장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죄와 허물을 자복하는 일을 진행하면서 말씀을 알게 될 때 죄와 허물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고 근심하는 것은 말씀의 역사이다. 말씀을 깨닫게 될 때 목이 곧은 자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느9: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느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패역하여”

느9:26 “너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느9:29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 “목을 굳게 하여”가 연속으로 나온다. 말씀을 깨달아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통 불순종의 삶을 살았고 목이 곧은 교만 때문에 자기 스스로 언제나 왕이 되어 살았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명령도, 은혜도, 사랑도, 축복도 인도하심도 어느 한 가지 보답하는 모습이 없이 주의 큰 복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도 없이 자행자지하여 멋대로 산 악행의 모습, 교만의 모습, 거역의 모습이 말씀을 들을 때 보여진 것이다.

죄가 보이는 것은 은혜이다. 죄가 깨달아지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그래서 울었다.

우리는 모임을 가질 때,

첫째, 말씀이 깨달아지는 모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느8:7~8)

느8:7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느8:8 “깨닫게 하매...다 우는지라.”

도덕으로도 안되고 윤리로도 안되고 부모의 권면으로도 안되지만 말씀이 깨달아질 때 눈물과 순종이 동반될 수 있다. 눅23:28에서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하셨다. 울고 싶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이번 철원 서지방 연합 성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울었다. 왜, 울었을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 영혼의 죄와 내 자식의 죄, 내 가정 속에 숨어둔 죄, 그 죄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교만의 죄,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눈물로 아뢰인 것이 아닐까? 누구든지 죄가 보이면 울게 된다. 눈물은 회개이다. 샘물이며 통곡은 회개의 나팔이다.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울었기에 정결한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도 닭 울음소리에 울었기에 제자가 되었다.

말씀을 깨닫는 모임으로 회개가 오게 하자. 부흥이 오게 하자.


둘째, 말씀을 더욱 밝히 알려는 모임이 계속되게 하자. (느8:13)

느8:13 “그 이튿날...”이라 하였다. 또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율법책을 보았다. 말씀을 깨닫는 일은 하루 만에 끝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 한번 깨닫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단계에서 더욱 밝히 알려는 말씀 연구가 필요하다. 즉 진보와 성장이다. 따라서 말씀을 분명히 알려는 모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말씀을 밝히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보이고 성령님이 보여지고 예수님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해 오신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보여진다.

이 세상의 요란함은 우리에게 말씀을 알려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되는 분주함은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모임을 패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이 세상의 눈요기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가는 일들을 가로막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씀을 밝히 알려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건강한 생명을 가진 아기는 힘차게 젖을 구한다. 먹을 것을 찾는다. 건강한 영적 생명을 지닌 크리스챤은 영적 만나를 사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고 말씀을 배우기 위해 모이고 말씀의 떡을 나누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자.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듣는 시간을 고정시키자. 이런 모임의 원형이 속회다. 그 어떤 이유로도 모이는 시간, 말씀을 밝히 알기 위한 집회 모임을 빼앗기지 말자. 은혜를 받아도 지속적인 말씀을 위한 모임이 계속되지 않으면 세속적이게 된다. 열정이 식고 사명이 식는다.

1882년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무디의 설교를 듣고 수천명이 주께 돌아왔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자들이 곧 열정이 식고 옛사람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 몇몇 청년들이 매일 모여 기도하고 말씀 읽기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캠브리지 대학의 일곱 명의 청년이었다. 훗날 7명은 중국 선교사로 가게 되는데, 그들의 간증 속에 신앙의 지속적인 비결은 매일 모인 말씀 읽기에서 신앙의 헌신을 유지했음을 고백하였다. 말씀을 더 자세히, 더 밝히 알려는 모임이 지속되는 것이 회복과 부흥의 열정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간증하였다. 읷이 바로 QT의 시작이다. 이런 동기로 QT는 한줄기 영적인 호흡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갔다.

말씀을 알려는 모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셋째, 여호와를 기뻐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느8:10)

느8:10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서 먹고 마시고 나누어주고 즐거워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모임은 회개를 동반한다. 죄에 대한 눈물을 동반한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받은 그날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날이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날이 되었으니 진리의 날이요, 새 삶의 날이다. 그러므로 이 주의 말씀을 듣는 날은 구별된 날이요, 성일이다. 거룩한 날이기에 울고만 있을 수 없다. 크게 즐거워하며 먹을 것을 나누며 지내야 한다. 특히 여호와를 기뻐해야 한다.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이 말을 놓고 아프리카 여행 기간 동안 묵상했다. 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했을까? 우리는 전능하신 여호와, 완전하신 여호와, 자비하신 여호와, 심판의 여호와인줄 알았는데 이제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여호와를 내 삶의 주로 의지하는 것이 무한한 힘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다.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들고 계신 많은 선물을 놓고도 기뻐할 수 있다. 그런데 수문 앞 광장 집회에서 던진 기뻐하라는 뜻은 “여호와 앞에서”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하나님의 풍성으로 인한 기뻐함이다. 이는 바로 그분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기뻐함을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여호와 대신 다른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쁨의 근원이 달랐다. 돈, 명예, 권세, 인기, 칭찬 등 이런 것들을 더 사랑하기에 기쁨의 출처가 세상에 있었다.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한 기뻐할 수 없다. 오직 여호와를 기뻐한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쁨이 되지 못하고 힘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뻐한다는 것은 여호와 외에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을 내 삶에 중심에 두며 하나님을 앞에 모시는 태도이다. 이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말씀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알아야 한다. 성경공부에 적극적이며 지속적으로 도전하자. 여호와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소망은 이루어질 일에 대한 확실한 기다림이다. 내가 지금 포로에서 돌아왔고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가난하고 집은 다 무너져 황무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다. 내가 처한 환경이 최악이어도 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소망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최선의 것으로 주시는 분,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임을 소망하면 기쁘고 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에 대한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다. 즉, 수문 앞 광장 모임은 하나님 자신의 풍성이 사랑이기에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① 예배의 정신이다. 기뻐하는 마음으로의 모임, 그 예배는 축제가 되고 영광이 된다.

② 하나님의 뜻의 실천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부흥의 시작이다. 기쁨이 주저앉아 있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③ 삶의 능력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무엇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여도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이 된다. 승리자가 된다.

④ 축복 중의 축복이 된다.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기뻐하는 자들에게 어찌 그냥 올 수 있겠는가? 삶의 열매를 주신다.


오늘부터 모임는 집회마다 성일이 되게 하자.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자. 기뻐하지 못한 것이 알고보니 불신앙이다. 세상 사랑만 한 것이다. 핑계 신앙이요, 말씀에 무지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명예 회손이다. 나의 기준으로 만족하는 이기심으로 산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으로 무한한 힘을 얻어 불황도 이기고 침체도 이기고 기근도, 환경도 이기자.

수문 앞 광장 집회같은 모임! 말씀을 배우는 모임이 만들어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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