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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 (마 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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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산에서 베푸신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헌법과 같은 것입니다. 
헌법은 다른 법들보다 권위가 있고  중요합니다.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산에서 베푸신 보배와 같은 교훈’이라는 뜻이지요.

산상보훈 가운데에서 우리와  관계가 제일 깊은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서도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9절에서 13절까지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주님의 기도인데 우리가 제일 많이 대하기 때문입니다. 
속회드릴 때, 선교회, 각 부서, 기관의 모임이 있을 때,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예배나 기도회는  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낮예배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같은 목소리로 드리는 순서를 넣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완전한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간결하면서도 심오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강하게 압축된 것입니다. 짧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007년에 기도생활을 잘 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하면 됩니다.

우선 이 순서를 지켜야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 다음, 하나님 중심의 기원을 드립니다.
그 다음에 나의 필요를 아룁니다.
이어서 회개와 죄 사함과 정결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영을 드립니다.
그러면 흠잡을 것이 없는 기도가 됩니다.
그 다음에 이 기도의 내용을 본받으면 됩니다.

이제부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살핍니다.
제한된 시간에 이 심오하고 압축된 기도를 자세하게 살피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체계적으로 잘 구성을 해서 살피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준비하기 위해 오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한 설교들도 읽고, 주님의 기도를 해설한 책들도 보았습니다.
어떤 명 설교, 어떤 논리적인 설명으로도 이 기도문의 깊은 교훈을 만족스럽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느끼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인가 ‘수필적 설교’라는 말을 쓴 일이 있습니다.
붓이 가는대로 쓴 글을 수필이라고 하는데 느낌이 가는 대로 하는 설교를 수필적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설교가 되겠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시작됩니다.
기도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아까 “‘기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더 들어가서 ‘기도하고 싶은데 누구에게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고, 누구인가 경배의 대상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본능처럼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기도할지 모르면 답답해집니다.

‘기도하고 싶은데 누구에게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그래도 수준이 높은 분입니다.
‘무엇에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기도의 대상을 찾다가 오래된 나무에게 기도하는 분들도 있고,  이상하게 생긴 큰 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전에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에는 “아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놓은 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이 의지해야 할 분, 당신이 경배해야 할 분, 당신이 믿어야할 분, 당신이 기도해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오!’ 이렇게 깨우쳐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바울은 그런 아테네에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17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습관적으로 외우다가 ‘내가 뜻을 깊이 알고 외워야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시작 부분을 그렇게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니!’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높은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분입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아버지는 가장 친한 이름입니다.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많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두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대통령 이상입니다. 대통령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이 국민을 통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하늘에 계신 각하여’ 하거나, 한걸음 더 나가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하늘에 계신 각상이여!’ 해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살아계신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아버지’는 참 든든한 이름입니다.
여성신학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만 부르느냐? 그것은 불공평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여’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을 실제로 듣고 놀란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공감을 많이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경에 기록된 것을 어떻게 바꾸느냐?’ 라는 생각 때문에 공감하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어머니’라는 말에는 무한대의 자비로움은 있어도 ‘아버지’라는 말이 주는 든든함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절대 타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원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 일리도 있고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말들입니다. 
아니 설명을 들어도 알듯 말듯 한 말들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면 더 모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부동의 동자’라고 한 것은 영어로는 ‘Unmoved Mover’ 라고 하는데 ‘남은 움직이게 하고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 이름에서 무한한 든든함을 느끼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을 감사드리면서 자주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고 자신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서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죽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릴 때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b-42)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여기에 아버지라는 말이 38번 나옵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17장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21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한 절에 아버지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가 하신 말씀을 스스로 지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말에는 ‘나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닌 어린이가 어떤 어른을 보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서도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으니라”하셨습니다.
최후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말에는 기도응답의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믿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라고 하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나’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모두 “우리”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앞부분은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 중심의 기원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그 다음, 이렇게 우리 중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아버지가 되도록 가정복음화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회사의 아버지가 되도록 직장복음화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의 아버지가 되도록 민족복음화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의 시작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는데 주어진 시간이 반 가까이 흘렀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부분을 봅니다.
여기에서 “일용할 양식”은 오늘 일용할 양식을 말합니다.
동시에 내일 일용할 양식도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말이 “내일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는 성경 사본도 있습니다.
여러분, 내일 양식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역시 산상수훈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 본문과 같은 장인 6장의 34절에 있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 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이 말은 어제의 양식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양식을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오늘까지 삶을 이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 한 성도 가정 결혼식의 피로연에서 식탁에 비슷한 남선교회 회원들이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6․25 때 굶주렸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런 어려운 고비들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어제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내일 일용할 양식을 주실 분입니다.

오늘 설교의 흐름에서는 벗어나는 이야기인데 어제 식사를 나누면서 저는 성도들끼리 대화와 교제가 좀 더 풍성해져야하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리를 같이한 분 가운데 두 분은 고향이 같고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더군요.
두 분은 6․25 때 피난 간 곳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것도 어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편인데 저도 어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끼리 대화를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서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을 살핍니다.
어느 부분일 것 같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여기입니다.

성경 본문 밖의 작은 글씨를 보면 이 말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할 수도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죄라는 뜻을 가진 말이 여럿 있습니다.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했다는 뜻을 가진 ‘하말티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맞추지 못하는 것, 죄입니다.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파라바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과 악이 있는데 우리는 악 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많고 세상의 길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있는데 세상의 길 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미끄러져 넘어진다는 뜻을 가진 ‘파라프토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수로 짓는 죄, 알지 못하고 짓는 죄를 말합니다.
불법이라는 뜻을 가진 ‘아노미아’도 있습니다. 이것을 고범죄(故犯罪)라고 번역합니다.
고의로 범하는 죄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빚이라는 뜻을 가진 ‘오페일로마’가 있습니다.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여러분, 내 힘으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만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죄에서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서는 빚이라는 뜻을 가진 ‘오페일로마’를 썼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것이 왜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학대학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강사가 신학생들에게 ‘여러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아십니까?’ 했습니다. 학생들은 웅성거렸습니다.
‘아니, 우리가 신학생인데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분, 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큰 소리로 외우는데 뜻을 생각하면서 외우셔야 합니다.’ 했습니다.
학생들은 큰 소리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 대목에 와서는 소리가 적어졌다고 합니다.

목사 생활을 하면서 늘 마음에 새기고,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사실은 부담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원로가 되신 목사님 한 분이 십여 년 전에 감리교신문인 「기독교타임즈」에 쓴 글입니다.
‘목사는 교인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아니 섭섭한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된다. 목사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었을 당시 저는 대전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 글을 쓰신 목사님은 충남 지역의 모교회인 논산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어서 자주 뵈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글이 목사님이 체험에서 나온 진솔한 내용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말을 살피려니까 그 사실이 다시 한 번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라는 러시아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로 체포당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 감옥생활을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사람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분노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옥에서도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감방에 새 죄수가 들어왔습니다. 가벼운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녁에 그 죄수가 다른 죄수들과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사실은 오래 전에 사람을 하나 죽인 일이 있거든!’ 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바로 자기가 뒤집어쓴 살인혐의의 진범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고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저 놈을 고발하리라!’ 했습니다. 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이제 저 사람을 고발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그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가라앉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기상 시간에 그는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동료 죄수들이 보니 숨을 거두었습니다. 간수들이 달려왔는데 그의 얼굴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저는 대강 서툴게 옮겼는데 원작은 매우 감동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사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할수록 더욱 큰 평안이 찾아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심령은 용서 받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서로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해, 힘이 듭니다.
수평적인 화해 없이 수직적인 화해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를 자신 있게 하기 어려우면 우선 “하나님, 제가 남을, 특히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이 부분을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이 부분을 자신 있게 드릴 수 있는데 까지 이르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기원은 이 세상에는 시험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 세상에는 시험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시험들을 다 없이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시험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는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는 송영으로 끝이 납니다.

자, 지금까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산만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빠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왜 빠뜨렸을까요? 아니 왜 빼놓았다가 지금 와서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사과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사과를 먹는데 좋은 사과부터 먼저 먹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사과는 아껴두었다가 제일 나중에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저는 두 번째 편입니다. 좋은 것은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손을 댑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상태, 평화 사랑, 공의가 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면 그 땅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임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을 찾아보세요.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말보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이 훨씬 많습니다.
세례 요한이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천국에 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0a)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같은 뜻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기원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의무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땅에서도” 여러분, 이 말의 범위를 좁히세요. 자기 가정, 직장, 지역사회, 이렇게 좁히세요.
그리고 그곳부터 사랑, 공의, 화평, 이런 것이 지배하는. 이런 것이 넘치는 상태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이 기원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너무 자기 중심적인 기원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나님, 나 이것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 이것 주십시오.’ ‘하나님 나 그것도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기도 생활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드리라고 해 놓고 돌아서서는 자기 중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지도록 구해라’ 하십니다.
우리 기도생활의 체질을 바꾸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복잡해요. 나 그 가운데서 하나만 기억하고 싶어요.’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기도의 순서를 바꾸는 일 하나를 기억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는 송영으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은 약간 틀린 말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정말 무엇으로 끝납니까?
“아멘”으로 끝납니다.

아멘은 잘 아시는 대로 ‘나도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하는 동의의 뜻입니다.
확인이고, 기원이고, 헌신을 서약하는 것이고 충성도 서약하는 것입니다.
엄숙한 말입니다.

아멘은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도장을 찍어야 하는 문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핍니다.
도장을 찍으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아멘”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잘 알아야합니다.
오늘 대강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주님이 가르치신 스스로 기도를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고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9절).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프로슈케스테(προσεύχεσθε)인데 이인칭 복수 현재형 명령법 동사입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천 년 전에 제자들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말을 잘 듣는 자녀가 하나를 달라고 할 때 둘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성숙한 기도를 드려 풍성하게 응답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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