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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 예배와 참된 예배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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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배와 참된 예배

요한복음 4장 23-24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오늘 똑같은 본문으로 세 번째 설교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도대체 웬일인가?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그동안 제 자신도 목사로서 예배에 대해서 정말 잘 알지 못한 때가 있었고 또 하나님 앞에 제대로 예배 드리지 못했던 일이 너무 충격이 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이 본문으로 세 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부흥되는 일에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없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별로 예배를 기쁘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배는 짧게 드리는 것이 좋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설교도 짧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예배를 잘 드려서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예배에 대하여 바로 깨닫지 못하였을 때, 예배보다는 제자 훈련이나 전도, 양육 프로그램, 선교회 조직 등으로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결실은 너무나 적고, 교인들도 힘들어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를 들들 볶는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지는구나."하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지쳤습니다. 그 때, 예배는 제게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예배 드릴 때도 머리 속에는 일에 대한 생각만 했습니다. 누구는 왔고, 누구는 안 왔고, 안내는 잘 서시는지, 마이크는 잘 나오는지, 성가대는 연습을 잘했는지, 주보에 오자 탈자는 없는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당연히 예배를 드려도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힘은 더 빠지는 것입니다. 온통 신경을 거기다 쓰다 보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예배를 인도하였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예배 시간에 비로서 하나님만 바라 보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하여 모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제자 훈련, 전도, 선교회 등 다른 모든 일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의 제단이 복구된 것입니다.하나님께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배가 중요한 것이구나.’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번 세 번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예배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기회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저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 정도가 아니고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바로 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시는지를 꼭 경험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것이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두 가지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에 의하여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204장 찬송 가사 중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도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예배 중 찬양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 분이 영으로 예배하는지 아닌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예배당만 보는 사람도 있고,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만 보는 사람, 찬양대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으며, 주보만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17세기 세계적인 수학자 파스칼이 어느 날 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날 밤의 체험을 작은 종이에 간단히 메모했습니다. 그 종이에는ꡒ오늘 밤 10시 30분 무렵부터 12시 30분까지.ꡓ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ꡐ불‘(fire)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습니다. 파스칼은 광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요, 위대한 사상가요, 위대한 수학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셔서 두 시간 동안 꼬박 그를 완전히 압도하셨고, 그는 이 체험을 오직 ’불‘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ꡒ오! 철학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여!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압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입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읽으라고 기록된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외경심과 감탄에 사로잡혔던 파스칼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다음ꡐ아멘.’이라고 쓴 종이를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죽을 때까지 간직했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으로 예배하면서 또한 동시에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예수님이 중심인 예배를 말합니다. 즉 예배가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위에 드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배가 영적인 것 같은데 진리와는 상관없이 드려지는 예배도 많습니다.

  폴란드를 선교 방문하였을 때, 라헨이라는 곳에 있는 성당을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바티칸 성당보다 1m가 작은 규모로 만들었다는데 성당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성모 마리아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보다 마리아의 무덤이 더 크고 화려하고 예수님은 죽은 채로 누워있고 마리아는 부활 승천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당 중앙에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동상을 만들어 놓았고 성단 안에도 정면에 예수그리스도의 그림 위에 더 크고 화려하게 마리아가 왕관을 쓰고 있는 그림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 성당에 예배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로 예배 드리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는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장 1-3절)

그러므로 “예배가 영적이다! 충만하다! 뜨겁다!” 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가 영적으로 충만한 예배를 경험하면 쉽게 빠져들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합니다. 분별없이 넘어가면 안됩니다. 기사와 이적도 일어나고 살아있는 간증도 체험하면 사람들이 그동안 드렸던 예배와 다른 감동을 받게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항상 조심할 것은 그 예배가 예수님 중심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요즘에 청년들이예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주 뜨겁게 한 시간 이상씩 찬양하고 충만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분위기가 좋아서 예배 드리는 청년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가? 물어보면 그렇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청년도 있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도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렸지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많이 드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리에 의하여 예배를 드렸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에는 참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이 있음을 모릅니다.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면 다 같은 영인 줄 압니다. 모든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기사와 이적이 일어날 때, 영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쓰러지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나도 영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영이 아니면 다 악한 영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분별합니까? 진리로 분별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진리입니다.

하나님 없는 영적 체험이 가능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영적인 체험이 많고 오히려 우상숭배자들에게서 더 많은 영적인 체험이 일어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하셨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에게 예배한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는데, 그 이유는 우상숭배자들이 진심으로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ꡒ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ꡓ(고린도전서 10장 20절)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묘향산 국제 친선 전람회라는 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받은 전 세계에서 온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건물의 크기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웅장했습니다. 참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 곳에 오면 온 세계가 김일성을 사모하여 선물을 가지고 줄을 이어 찾아와 경배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놓았고, 또 그런 투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내하는 곳을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죽은 김일성이 살아서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는 것입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습니다. 밀랍 인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실제 인물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동강변에 서있는 김일성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이니 마치 김일성이 살아있는 것같았습니다. 그 곳에 들어갔다 나오는 북한 사람들마다 살아있는 김일성을 본 듯 감격해 하며 눈물 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상은 사람을 실체에 대한 거짓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조차 그렇게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가는 경우는 세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죽어서 천국에 갈 때입니다.
여러분, 죽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 있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지요? 예수님 붙들고 가는 사람만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때 누구를 의지하여 천국에 갑니까?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며 웃던 사람들도 천국 길에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아내가 내 곁에 있어줄 것이고, 내 아이들이 사방에서 몰려올 것입니다. 그들이 내 병상으로 나를 찾아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와 통행해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동행해 줄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둘째,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말은 주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하나님 앞에 갈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셨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믿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예배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당에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오신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속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말씀이 선포되어도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예배를 드린다고 음향 시스템이나 조명 시설을 잘 갖추고 찬양을 뜨겁게 부른다고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분위기는 영적으로 충만한데, 진리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뜨겁게 드리는 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분명치 않는 청년들도 많습니다. 영적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우들 중에도 예배에는 열심히 참석하시지만 “지금 하나님 앞에 간다면 천국 갈 확신이 있으세요?” 하고 물으면 “자신이 없어요.” 하는 분들을 봅니다. 진리로 예배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진리로 드려지지 않은 예배의 대표적인 경우가 가인의 예배입니다.
가인은ꡐ나의 창조주께 예물(禮物)을 드릴 때가 돌아왔다.’고 중얼거리며 멋진 꽃 한 다발과 맛있는 열매를 따가지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ꡒ피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ꡒ무슨 피 말씀이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ꡒ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속죄의 피가 없이는 나에게 나아올 수 없다.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ꡐ나는 내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단지 예물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의 제물이 없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격분한 가인은 나가서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ꡒ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ꡓ(창4:4) 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린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대면하였던 사람입니다. 이 보다 더 영적인 예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진리로 예배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진리로 예배를 드리지 않기에 불이 임하는 예배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진리 위에 서 계십니까? 그것은 십자가 복음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기에 “정말 예수님이면 충분합니까?”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말할 수 없는 이 죄인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만 보면 그는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배 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조그만 일로 지적 당할 때 자존심이 상하여 화를 낸다면 그는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고, 당연히 속죄의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렸어도 진리로 예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세상 염려와 두려움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 복음을 진리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이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믿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믿고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 누구에게 전도하라 하시든지 순종할 수 없다면 그런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배를 끊임없이 드리고도 은혜와 능력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실상 가인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ꡒ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ꡓ(마 7:22-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역사가 아무리 크게 있었어도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 곧 진리로 살지 않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진리는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결론이 된 자의 예배는 항상 불이 임합니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수없이 예배를 드렸지만 기억나는 예배가 거의 없었습니다. 불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 무엇보다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예배 그 자체가 감격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제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으로 깨달은 후 예배는 더욱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바로 보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몸부림치며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나의 생명이 되시고 주님이신 예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며 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진리를 알면 알수록 예배에 불이 강하게 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싶습니까? 그렇게 예배하지 못하는 일이 안타깝습니까? 이전에는 그런대로 예배를 잘 드렸는데, 이제는 오히려 마음이 괴롭습니까?
그러나 바로 은혜에 대한 그 안타까움이 성령님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설교를 듣고 난 다음에 “그 전에는 그럭저럭 예배를 잘 드렸는데 이제는 오히려 더 마음이 힘듭니다. 내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못 드린 것은 아닌가? 정말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 심히 괴롭습니다.” 이런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더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괴로움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청년이 상담을 하였습니다.ꡐ나는 17년 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는 마음이 차갑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ꡓ그의 말을 듣고 성령님께서 이미 그 청년에게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ꡒ자기의 마음이 굳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만이 굳어 있는 거야. 자기가 완고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만이 진짜 완고해진 것이야.ꡓ자신의 심령이 메말랐고 뜨겁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갈망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마음, 미지근한 신앙 생활, 반쯤 죽은 것 같은 무기력한 삶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여러분 안에 충만히 거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두 팔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며 살아있으면 세상을 이길 힘을 다 거기서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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