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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보시는 믿음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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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믿는다 또는 저 사람 믿음이  좋다'라는 말을 사실은 잘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열심을 내는 분을 보고 대체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믿음과 열심은 관련은 있지만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고,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믿어야 되는데 잘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오늘은 이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다 믿음의 자녀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자식은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모양이 조금씩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예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삶이 있고 구체적인 내용과 모양을 갖추게 되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사과나무는 한 나무에 여러 열매가 맺혀집니다. 사과라고 하는 뚜렷하고 확실한 모양을 갖고 있습니다. 색깔이 조금씩 달라도, 모양이 조금씩 달라도, 한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이처럼 교회에 나온 수많은 성도들도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의 가지, 믿음의 나무, 믿음의 뿌리에서 모양은 다르지만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는 소중한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믿음이 모양은 조금 다릅니다.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고넬료의 믿음이 다르고 마리아의 믿음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를 한곳에 두는 것만은 똑같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서 여러 모양이 나타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어머니가 날 낳은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는 믿음이 아닙니다. 친구를 믿고 세상을 믿고 사건을 믿고 뉴스를 믿고 살아가며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서 믿는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또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나의 부모님으로 믿어서 내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우리 인간이 꼭 가져야 하는 바 그런 믿음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어 주신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만이 유일하고, 이것만이 가치 있고, 이것만이 능력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은 바로 이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믿는 그 아들을 알면서 그 아들을 가까이하고 그 아들의 삶과 그 아들의 생애 전체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인격이 되고 나의 생각과 사고와 습관과 생활과 의지와 사상과 양심과 도덕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까지 우리를 발전시키는 것을 훌륭한 믿음, 큰 믿음,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중풍에 걸린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는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중풍에 걸려 고생하는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중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침상에 누워 있는 친구를 데리고 그대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 있어서 도저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친구를 침상에 누인 채 지붕에 구멍을 뚫어 예수님 앞에 그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믿음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을 보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죄 사함까지 선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5절) 그를 고쳐 주셨는데, 여기서 ‘저희’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저희는 중풍병자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 모두를 말합니다. 이 친구들의 계획은 중풍병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중풍병자는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는데, 죄 사함을 받은 것은 본인의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희’는 이 중풍병자를 포함해 그를 데리고 온 친구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길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치유와 죄 사함의 은총을 허락하셨을까요? 오늘날 주님은 우리들의 어떤 믿음을 보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 가운데 치유의 역사를 이루시겠습니까?


1. 주님은 함께 협력하는 저희의 믿음을 보고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다는 것은 사실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친구를 메고 왔다는 것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협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 계획에 반대하거나 동참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이 일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고, 서로 믿음 안에서 협력했습니다.
이들은 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네 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래서 들것에다가 함께 메고 왔습니다. 아마 굉장히 체구가 큰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든 일일수록 서로 서로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즉 시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도 점점 경쟁사회에서 협력사회로 탈바꿈하고 있는데, 우리 신자들이야말로 얼마나 더욱 열심히 협력해야 되겠습니까? 더불어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공부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헌신해야 합니다. 축구도 함께 봐야 신이 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만 만들지 않고 둘을 만드셨습니다.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서로 상부상조하라고 둘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Partner, 또는 Companion이라고 번역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대야말로 신앙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목회할수록 이런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 믿고 함께 구원받은 자로서, 일주일에 한번만 만나고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이끌어주는 동지, 믿음으로 서로 세워주는 동지, 짐도 함께 지고, 기쁨도 함께 나누는 신앙의 동지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회사 일이나 사업상의 분야에서도 서로 상부상조하는 믿음의 결속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아무리 한 개인의 믿음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이웃과 화합할 줄 모르는 독선적인 신앙이라면, 그 믿음은 교회의 덕을 세우거나 주님의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약한 믿음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서로 돕고 힘을 합쳐 사역한다면, 거기에는 아주 엄청난 힘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이기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단절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떠나시기 직전에 이렇게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예수님께서는 협력하여 하나 되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협력하여 서로를 위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치유와 죄 사함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즘 주보에 각 가정을 위한 기도제목을 계속 싣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문제만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가 되는 믿음을 형성하자는 의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지었다고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격이나 삶이 잘못 되었다고 다 문제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좀 못하고, 신체적 결함이 있고, 조금 모자라는 데가 있어도, 그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해해 주고, 용서해주는 부모님이 있고, 끝까지 참고 기도해주는 인도자가 계시며, 잘 품어주는 사랑의 멘토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시험에 잘 듭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스스로 무너집니다. 우리 주님은 두 세 명이라도 함께 연합해서 기도하고, 상부상조하는 팀웍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인생의 침상을 같이 메고, 함께 예수님을 체험하는 사랑의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은 포기하지 않는 저희의 믿음을 보고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네 사람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도 접근할 수 없는 비상사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자 함께 힘을 모아 달려왔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조차 없는 비상사태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환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우리 주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셨습니다. 어떠한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그 모습을 주님은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이런 믿음을 보고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은근히 방해요소가 많을 수 있습니다. 가정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건강문제, 경제문제, 체면문제 등, 얽매이기 쉬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애물이든지 극복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붕을 뚫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자기 친구를 고쳐보겠다는 순수한 열심을 품은 것까지는 좋으나,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본문 4절은 이점을 현장감 있게 강조합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 밑으로 침상을 달아 내렸더라' 얼마나 역동적인 벤처 신앙입니까? '데리고 오는 믿음과 함께, 침상 체 내려놓는 믿음입니다' 병들어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믿음과, 지붕까지도 뚫는 벤처 신앙, 얼마나 Dynamic한 믿음인가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친구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5절) 그들은 인생의 어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꾼 창조적인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구차하게 핑계 대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돈 때문에, 회사 일 때문에, 사업 때문에, 누구 때문에, 구실과 핑계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가 많으면 은혜 받기가 어렵고,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들어가는 출입구가 막혀 있으니까,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아래로 내려간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막혀 있더라도, 수직적으로는 열려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방은 막혀 있어도, 위는 열려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Anthrophos 입니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만 보지 말고, 가능성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바라봅니다.'

지붕이라도 뚫고 달아 내리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벤처 신앙이 필요합니다. 석공은 큰 바위를 깨뜨릴 때 반드시 깨진다는 전제 하에 망치를 계속 두들기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이런 산문시를 하나 읽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아마도 많은 실패를 했을 거예요.
당신이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곧잘 넘어졌을 것입니다.
당신이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빠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야구 방망이를 처음 잡자마자 안타를 쳤습니까?
홈런을 날리는 타자는 몇 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R.H. Macy는 뉴욕에 상점을 내기까지 일곱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영국 작가 죤 크리세이는 564권의 책을 내기 전까지 733번이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바브 루쓰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까지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도해 보지도 않은 체, 기회를 놓쳤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시의 주제는 우리가 실패를 인생의 끝으로 생각지 않는 한 실패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실패를 호기와 성공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라는 적극적인 교훈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을 끝낼만한 실패란 없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어떤 분의 말대로「우리가 실수(mistake)는 했어도, 실패(fail)를 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할 수 없는 상황이 크게 보입니다. 믿음이 강해지면 할 수 있는 방법이 뜻밖으로 쉽게 보입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들도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를 뛰어넘는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에 때때로 태산과 같은 거대한 난관이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힘입어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주님은 예수님께로만 나아가야 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왜 이들은 그토록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굳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까요? 또 남의 집 지붕을 파괴한 것은 엄청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붕을 뚫어서까지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중풍병자가 나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분이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집 지붕을 뚫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믿음의 대상을 올바로 발견했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결단코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똑같은 진리입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만 달려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결단코 우리의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주 안에서 협력하는 믿음,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에게만 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나아가는 바로 그 믿음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언제나 구원과 영생과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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