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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픈 소식과 애절한 기도 : 승리의 출발점 (느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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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들어서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이룬 일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고 또 한 달이 지나면서 내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과정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6주 동안 느헤미아서 말씀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를 이루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어떻게 승리를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6주가 마치게 되면 이웃사랑 초청축제가 있어서 우리 새가족들에게 말씀을 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존성도들이 6주간동안 하나님 말씀가운데 어떻게 내 삶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승리를 이룰까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들은 마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삶속에 구원의 백성으로서의 승리와 은혜를 이루는 삶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느헤미아서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한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느헤미아는 한 성도였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관원으로써 당시 페르시아왕의 관원의직분을 가지고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 즉 히브리 민족, 유다 백성들의 고통의 비보를 듣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가 들은 소식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도성이 황폐하게 되고 성벽은 다 무너지게 되고 마침내 백성들의 믿음은 땅에 떨어지게 되는 고초의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음을 가진 백성으로 이와 같은 얘기를 들을 때 그의 마음은 한없이 아프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 민족이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범고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니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으니 다시 은혜를 허락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나로 이사람, 즉 왕 앞에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옵소서” 하고 간구한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명을 느끼고 당시로는 한직이라고 여겨졌던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기를 왕 앞에 자청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져서 예루살렘 총독, 즉 요즘으로 말하자면 시장에 관련된 일입니다. 즉 시장과 같은 일인데 이와 같이 행정관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수축하게 되고 그 과정가운데 그들의 마음이 합일되는 역사를 이루었고 또 예루살렘 성벽이 수축되었을 때 백성들을 모아서 학사 에스라를 초청하여서 영적인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과정 속에 백성들의 생활과 모든 행정, 관제 그리고 모든 백성들의 삶을 다시 개혁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정가운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편으로는 어려움에 대비하며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역사를 이뤄가는 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의 삶을 이루는 전형적인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더더욱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어려움 속에서도 개혁을 시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고 다시 믿음을 회복했던 느헤미아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성도로서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를 이룰까하는 이와 같은 전형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6주 동안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특별히 올 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마음에 상당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올해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고, 체험해 보지 못한 능력들을 체험하며, 이루지 못했던 일을 이루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와 역사를 바라볼 소망을 기도 가운데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말씀을 드렸고 우리는 그동안 기도해 왔던 대로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들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위하여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시도하는 일을 하고, 정한 목표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 속에 가야할 곳까지 가기를 소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우리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6주 동안 도대체 우리들이 어떻게 믿음 안에서 승리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그저 생각 속에 이루어지는 가상의 현실이 아니라 실제적인 내 삶속에서 어떻게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내 손과 발을 변화시키고, 내 생각과 계획을 변화시키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바꾸고, 내 삶의 모든 상황을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올해 기대하기는 마음의 큰 기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교회가 16년째 흘러가고 있고, 제 3기 사역의 두 번째를 맞이하여서 구체적으로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믿음의 인물들이 속속 등장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풀을 뽑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게 되면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르긴 하지만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바로 그 열매를 맺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올해 2007년은 주님께서 이와 같은 소망을 주시기에 주의 성도들에게 큰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이제 이 교회에 축복을 주실 때가 됐으니 하나님께 교회는 곧 성도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실 때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시는 방법은 성도들을 축복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한 교회의 헌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로 통하여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고 마음에 확신하시고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실현하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듣는 순간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내가 살아서 숨 쉬는 삶의 공간과 현장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성도들을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될 것을 믿습니다.
또 기도한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현장,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에 기록된 느헤미아 한 사람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각각 현장 속에서 느헤미아와 같은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 교회에서 집사님이 되고, 안수집사님이 되고, 권사님이 된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또 이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어서 세례 받고, 집사님 되시고 하신 분들도 여러분 계신 것을 생각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분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았다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장성해지고, 이제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씨를 뿌린 것들을 거두기를 소원하며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방금 드린 것처럼 느헤미아라고 하는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의 궁에서 관원으로써 근무하다가 민족의 비보를 듣고 가슴 아파 하나님께 회개하고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망 속에 사명을 느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는 장면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7절까지 읽었지만 11절까지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는 슬픈 소식을 듣고 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전혀 내 자유와는 상관없는 슬픔의 소식을 접하고 영향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나는 그렇게 원치 않았는데 전혀 원치 않은 어떤 순간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단 말입니다.
오늘 느헤미아는 민족의 아주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이 황폐하게 되고 성곽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믿음이 시련 속에서 흐지부지 해져가는 고통의 소식이었습니다.
민족의 아픔과 고통은 곧 나 자신의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으로 연관되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민족과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민족과 사회를 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무리 방어막을 치고 나는 나를 보호하고 나는 절연해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한 십 년 전에 IMF사태라고 불려지는 경제적인 급격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민족이 급격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나라가 어려워지면 백성들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우리는 피부로 느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나라가 어려워지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도 당연히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삶이라는 것은 내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내 뒤에 있는 배경이 바뀌면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대로인데 내 나라 내 민족이 어려워지니까 나는 따라서 저절로 어려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각 예배 실에서 예배드리고 계시지만 여기 온도를 높였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옷 하나 더 껴입지 않아도 굉장히 더위를 느껴요. 그러다 여기에 에어컨을 틀어서 온도를 내렸다고 합시다. 옷 벗지 않아도 저절로 시원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삶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 상황, 사태 그리고 우리가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민족, 똑같은 겁니다. 우리는 민족 공동체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는 살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민족의 어려움은 내 어려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이 국가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아는 민족의 어려움을 겪고 그 소식을 듣게 됐을 때 너무나 마음에 슬퍼하고 있는 겁니다. 느헤미아는 먹을 것도 많았고, 입을 것도 많았고, 지위도 있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느헤미아는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 대한 책임을 그는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갑자기 내게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전혀 나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겨울에 스케이트장을 열어서 사업을 하던 사람인데 날씨가 따뜻해서 얼음이 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해수욕장에서 여름에 늘 사업을 하던 사람인데 그해에는 내내 장마가 길어서 비가 계속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우리인생에서는 있습니다. 삶에 얘기치 못했던 태풍과 지진이 불때가 있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때로는 내가 예기치 못했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세는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그의 노년에 말했습니다. 내가 이런 슬픔을 겪었어. 이런 수고를 했어. 그런 가운데도 이렇게 극복하고 살았어. 이게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슬픔이라는 것은 있다라는 겁니다. 슬픈 소식을 우리는 듣게 되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내 잘못으로 인한 고통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어요. 내가 전혀 잘못 없는데 고통의 소식을 들으면 내 마음에 가책이나 없는데 내가 잘못해서 그 결과로 내가 어려운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모든 아픔의 소식은 특별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결실을 맺어 평안할 때 갑자기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못해요. 뭐하나 마무리 짓고 완벽하게 끝내놓고 가야 하는데 우리 인간의 능력이 그렇게 완전하질 못해서 끝내지 못하고 가는 일이 있습니다. 다 못 끝내고 가는데 그저 잘 있어주기를 기대하고 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그렇게 잘 마무리 하지 못한 일들이 꼭 나중에 우리들에게 큰 화가 되어서 돌아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 때 우리는 가슴을 치며 어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안돼서, 우리 역량이 안돼서 그렇게 놓고 올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넘어가주지 않고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돼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을 때 우리는 정말 가슴아파하며 슬픔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애를 써도 극복되지 못해서 가슴아파했는데 결국 그것이 나중에 또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정말 한계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지나가주길 바랬는데 용서 없이 찾아와 마음에 상처를 끼칠 때 우리는 슬픔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죠. 과연 이것을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내 부족을 인정하고, 아파하고, 가슴아파하되 그것으로 좌절하지 않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나는 직접적인 잘못은 없지만 나와 연관된 다른 일 혹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갑자기 닥친 고통으로 인하여 아픔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오히려 이런 때가 더 많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애썼는데 전혀 엉뚱하게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아파요. 갑자기 부모님이 아프다거나 갑자기 아이가 아프다든가 그 한 가지 때문에 우리 인생이 다 다르게 편성되는 거예요. 그 한사람에게 내 삶이 다 말려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헛수고인 게 우리 인생일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얼마나 마음 상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것으로 완전하게 무엇을 이룰 수 없어요. 아무리 집을 짓는 자가 수고해도, 성을 지키는 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갑자기 노력하고 애써서 세워놨는데 어느 날 문득 예기치 않았던 병이 찾아왔어요. 여러분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병이 찾아와서 내가 이제까지 그렇게 수고하고 애썼던, 시간을 아껴가며 그렇게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 내게 있어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에요. 나를 관리해야 되고 내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느끼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내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도 될까 말까하는 나의 삶속에서 이제 내가 내 몸조차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에 얼마나 한계를 느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내게 당하는 애매하고 억울한 고통을 억울해하지 않고 내가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슬퍼해야 될 몫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다른 이들을 돕고 결국 나를 세워가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때로 공평치 못한 것 같습니다. 인정해야 돼요. 왜 나는 건강한데 다른 사람 아프고, 다른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아플까? 때로는 건강에 관한 것도 공평하지 못한 것 같아요. 왜 똑같이 노력했는데 그 사람은 됐는데 나는 안 될까?

왜 그 사람은 좋은 여건에 있는데 나는 좋지 못한 여건에 있을까? 어찌 생각하면 인생은 공평치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공평치 못한 것을 수긍하고 소화하고 해결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인생이라는 것은 매우 공평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당시에 공평치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내게 은혜가 되고, 능력이 되고, 내가 일어설 수 있는 힘의 근거가 됐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치 못했다고 불평하고 불만하고 그것으로 끝을 낸다면 우리 인생은 영원히 불평 속에서 끝나고 말수도 있습니다.

내 민족,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면 그 책임을 지는 만큼 결국 나는 시간이 지나면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이 없다고 회피하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책임지지 않아도 될 자리에 내려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책임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책임을 느끼고 그 가운데 책임의식 속에 그 책임을 감당하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책임 질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무나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책임지는 마음의 느낌과 의식이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위치에 가게 되요. 어떤 경우에도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사람은 결국은 책임 안 져도 되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따라서 내 민족의 아픔이건,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어려움이건, 내가 어떤 경우건 내가 어려움과 슬픔의 소식을 당했을 때 이게 내 책임이다라고 느끼고 그것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고 일어나며 주의 역사를 이루려고 할 때 그에게는 새로운 소망과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느헤미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슬픈 민족의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니야 이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야’ 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게 내 아픔이고 이게 내 고통이니 내가 슬피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개해야 될 일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때 느헤미아에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거예요.

두 번째 슬픔과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의 할 일은 회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은혜와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건, 아니면 나와 관련된 것이건, 아니면 나와의 관련된 것을 부인하고 싶은 지경이건, 결국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기본 마음은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 내게 무엇을 이루실까 함에 대한 겸허한 수용이고 수납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돼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정말 내가 내 어려움 때문에 왔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전에 먼저 중요한 것은 만약에 내 잘못으로 인하여 내게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이런 어려움을 계기로 해서 내 잘못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자라고 생각하고 나의 잘못과 부족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내 잘못이라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도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내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감기 걸리면 ‘내가 이번에 감기 걸렸는데 내가 다음에는 감기 비교적 잘 안 걸리도록 좋은 면역체계를 가지도록 더 건강에 힘쓰고 쉼도 가지고 음식도 잘 먹고 운동도 하고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감기 때문에 유익을 얻게 되겠지요. 그런데 운이 없어서 그냥 감기 걸렸어 난 만날 그래 하고 지나치면 아마 그에게 있어서 별로 얻는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통해서 나의 부족을 점검해 보고 그 부족 속에 내가 새로운 진보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큰 은혜예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은혜롭게 살아도 우리들에겐 늘 회개할 잘못과 부족함이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우리가 깨끗해지고 유용할까요? 여러분 컴퓨터 5년 전에 샀어요. 포장도 안 뜯고 가만히 놔뒀어요. 그러 새 컴퓨터 될까요? 그것은 사용도 못하는 헌 고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5년 전에 산 컴퓨터 써보세요. 아마 잘 사용 못할 거예요. 속도도 느리고 해서요.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현재의 모든 사실과 사항과 물체와 모든 것은 배경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겁니다. 도대체 어떤 배경에 놓여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가 결정되는 겁니다.
5년 전에는 새 컴퓨터였는데 포장을 안 뜯어도 지금은 새 컴퓨터가 아니라 그것은 고물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아무리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도 그건 그 때의 마음이고 시간 지나서 보면 나는 어느새 지금의 상황 속에 달라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간마다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내 부족함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 정말 그와 같은 마음 가운데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의 부족함에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 부족의 용서를 구함을 통해서 새로운 은혜의 지경으로 나갈 때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 무슨 슬픔과 아픔이 있다는 것은 원하시는 지경까지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도하심은 무엇인가 의도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고치고 싶어 하시건 우리를 사랑하셔서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하시건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주시기 원하시건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시면 두 가지죠. 하나는 우리를 수정시키시죠. 우리를 고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는 우리를 더 훈련시키셔서 그 자격을 습득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면 그냥 주면 안 되지요.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혹은 소유하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과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그것을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운전도 못하는데 ‘이 자동차 운전해 가시오.’ 라고 얘기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얘기가 안 됩니다. 운전 못하면 그 사람 운전부터 가르치고 연습시키고 그 다음에 자동차 주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데 그냥 축복 주실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셔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부족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고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거지요. 우리에게 어려움을 당하여 시험하여 달아보고 누릴 만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 부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좌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너무나 귀한 순간입니다. 내 잘못이 내 잘못으로 인정될 때 큰 은혜를 입고 축복과 승리의 자리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내 부족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 회개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진보와 발전이 뭐죠? 내 부족을 고치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고치고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하는 것 두 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의 부족함과 나의 잘못됨과 죄악을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진보의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회개는 죄에 대한 좌절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입니다. 정말 내가 죄악 속에 잘못했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게 회개의 본질이지요. 우리 자신과 힘에 대한 좌절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우린 다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로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게 주어진 어떤 아픔과 시련을 만났을 때 내가 이 아픔과 시련을 통해서 내 자신의 부족을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득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간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아픔과 시련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간구하게 되고 우리는 더욱 더 영적으로 승리하게 되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육신은 더 강하게 되고 사명을 얻어 하나님 앞에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어떤 상태를 다시 못 만드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지 못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바라보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게 어떤 변화가 왔어요. 어려운 변화, 고통스러운 변화, 변화가 왔다는 것은 내가 흔들리고 바뀔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지금 어려운 것이 흔들리고 바뀌어서 좋아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변화만 주시는 분이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변화도 주실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어렵고 나빠지고 병들고 고생하고 일이 망가졌다면 또 다른 변화를 통해서 좋아지고 회복되고 강해지고 그 일을 이룰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바로 믿음의 백성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지요. 오히려 어려움을 통하여 내 부족과 실패와 죄악을 인정하고 그것은 나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약점이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요. 여러분 아이들을 가르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어떤 수준이 있는데 아무리 해도 아이가 거기까지 올라가지 못해요. 그럼 우리 어떻게 생각하지요? 다시 생각하지요. 내 생각이 틀렸는가, 저 애를 어떤 관점에서 지도해주어야 하는가, 생각하고 이제는 내가 원하는 관점과 수준이 아니라 그 아이를 바로 보는 것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바뀌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게 옳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현재에 있는 상태를 인정해주고 그것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정이고 신뢰고 하나님의 계획과 그를 향한 뜻에 대한 우리의 수용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못난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몫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금덩어리가 귀해도 온 세상 금덩어리만 갖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금이 필요한데도 있고 동이 필요한데도 있고 철이 필요한데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모두가 똑같은 능력이 있는 사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볼 때 세상을 살아갈 때 두 가지 시각이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참 안됐어요. 저는 목사니까 교회에서 이렇게 사는데요 믿음의 백성들이 모여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살잖아요. 서로 이해하고 허물 있을 때는 덮어주고 비난하려고 하다가도 나도 부족한데 내가 누굴 비난하겠어 하고 생각해서 일단 용서해주고 우애하고 사랑하고 덮어가는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기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믿음에 대하여 오히려 가해적이고 공격적인 삶을 우리 성도들이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세상 속에 살면서 내 믿음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데 오히려 그 믿음을 가지고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더 어렵단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참 안됐어요. 참 어렵게 살아가는구나 라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요. 그러나 또 한 가지로는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뭔가 할 일이 있잖아요. 내가 내 삶속에 나가서 요만한 수치까지 내가 감당하면 이만한 업적을 이루면 내가 어떤 이와 같은 일을 하면 그것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그것을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이 구체적으로 수치화되고 형상화되고 어떤 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또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은 목표에 근접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우리 열등이 가해지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여서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생각을 할 때 성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꽤 괜찮다 할만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정말 어렵다라는 마음의 관점과 또 한편으로는 정말 우리 성도들이 힘내서 나갈 수 있을 때 용기와 격려를 주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다는 마음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있는 것 당연해요. 세상에 눈 오는 날 있고 비오는 날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하고 있는 일이 교회 일이니까 다른 말씀드릴 것은 없고 저는 교회일 하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연초에 100%계획을 가지면 연말에 가면 한 10%정도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10개정도 되면 하나정도 되는 것 같아요. 늘 제가 잘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자 전에 저희 교회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강사 목사님들 오시면 끝나고 잠깐 대화 나누지 않습니까? “오신 김에 좋은 말씀 한마디 주시고 가십시오.” 하고 부탁을 하는데 언뜻 한 10년쯤 된 것 같아요.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오늘 좋은 말씀 한 말씀 가르쳐 주고 가십시오. 라고 제가 부탁을 드렸는데 무슨 얘기하다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요 교회일 하면 잘 안돼요. 한 열 개하면 한 가지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저보고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 잘되면 교주되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안 되는 것 당연한 거죠. 마음에 먹은 것 다 되어서 정말 교주처럼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잘 안되어야 목사가 되는 거겠죠.

제가 십년 전 얘기인데 지금도 제가 귀에서 맴도는 얘기입니다. 아주 간단한 얘기입니다. 안되는 게 있는 게 축복이에요. 그래야 겸손해지고 그래야 더 기도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어요. 내가 하는 것 모든 것 다 잘 된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아니 이렇게 잘되는데 왜 안 돼? 다른 사람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어요. 모든 게 잘 되는 데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나 있겠습니까? 뭐 하러 기도하러 나오겠어요? 다 잘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하러 나오는 것이고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 다돼서 다른 사람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사람과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린 달나라에 가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사는 사람이거든요.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우등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월등해서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모든 면에 월등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을 줄 수가 없어요. 오히려 돕는다는 것이 상처만 줄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고 괜찮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안 되는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과정을 겪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이뤄갈 때 우리는 탁월함과 동시에 겸손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늘 말씀드리잖아요. 우리는 탁월함과 겸손함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탁월하기만 하고 겸손함이 없으면 탁월함이 빛을 잃어요. 그런데 겸손함은 있는데 탁월함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두 가지가 겸비되려면 천상 실패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도 하면서 이와 같은 굴곡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는 것은 내 끝이요 좌절이 아니라 내 부족함이 있으니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고 내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내 부족함 때문에 나 자신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나아가는 겁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어려운 소식 슬픔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내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우리는 내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책임지려고 할 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의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백성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나를 부정하니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날마다 부족이 생각나면 하나님 앞에 자비를 얻고 인간들에게 신뢰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회개하는 가운데 첫째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그 다음에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돼요. 우리가 고통 중에서 은혜와 자비를 구할 수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눈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의 승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책임을 지고 그 일을 가슴아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우리가 비로소 새로운 승리의 출발점에 서게 되니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의 간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출발선상에 섰다는 것은 어려운 고통가운데 눈물의 소식을 듣고 회개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게 되는 때 우리는 출발선상에 선 것입니다.

<1장 11절> 말씀을 보니 ‘오늘 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회개하였으면서도 하나님 주의 백성을 축복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으로 형통하게 하사 이 사람 앞에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 책임을 느끼며 회개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어떤 지경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승리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그 백성을 사랑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의 백성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여건이나 상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면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어요.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하심을 반드시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영화롭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백성인 나 자신을 믿어야 해요.
미가 선지자는 그렇게 얘기 했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노를 당하여 노가 풀리기 까지는 고통을 받지만 그 노가 다 풀리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지 말라 내가 지금 잠깐 엎드려져 넘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다시 세워주실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하면 긴 호흡이예요. 긴 호흡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지금 당장 내게 주어진 어떤 한 가지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고 이 과정 과정을 거쳐 어떠한 역사가 일어날 것인가 하는 긴 호흡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듣습니까? 한마디 듣고 아 오늘 됐어 하고 판단하지 않찮아요? 오늘 끝까지 듣고 내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실까를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 정말 하나님의 긴 호흡을 생각합니다.
그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올 것을 알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딱 집어서 하루 나가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나가서 기다리고 내일도 나가서 기다리고 끊임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아들이 돌아온 것을 맞이합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사랑, 이와 같이 긴 호흡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의 바라볼 때 따라서 긴 호흡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안 돼도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겠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올림픽에서 그 달리기 경주하는 것을 볼 때도 백 미터 경주하는 것을 보고 마라톤 경주하는 것을 보고 그게 다르잖아요.
저는 아주 굉장히 폭발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올림픽 경주하는 데 제일 재미있는 것이 100M달리기입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에 아주 집중해서 폭발적으로 정말 누가먼저 나갈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짧은 시간에 몰입해서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 짧은 시간에 보고나서 아주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마라톤도 좋아해요 왜냐하면 그 긴 기간 동안에 달리면서 또 선수들의 표정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달라요. 100M달리기는 잠깐 앉아서 보면 돼요. 하지만 마라톤은 오래 봐야 되잖아요. 어떤 것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틀리잖아요. 100M달리기 보는데 나가서 물 컵 가져오고 그럴수 없잖아요. 물 먹고 싶어도 그것은 참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마라톤은 물 먹고 싶으면 가서 물도 한 컵 먹고 오고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마라톤 경기 보면서 100M달리기 보듯이 집중하면서 긴장해서 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의 일을 긴 호흡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승리를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여유와 규모를 가지고 큰마음을 가지며 한 번 더 참고 애쓰는 신뢰와 끈기를 가지고 정한 목표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근거한 의지와 소망을 가지고 승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당연한 것은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움을 어려움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 세상에 어려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어려움을 큰 것으로 느끼지 않고 해결해 갈 뿐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눈앞에 놓인 장벽이 아니라 그 장벽을 큰 것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의 믿음과 능력이에요.
능력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고 부여받은 능력은 믿음 안에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앞으로 6주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분명히 체득하셔야 합니다. 저는 말씀으로 성도님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받아서 생활 속에 그대로 적용하여 실천하시면서 6주간 동안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제가 오늘 이런 말씀을 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어떤 일이든지 여러분들이 실천하실 때 어떤 일을 실행하실 때든지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빠르고, 정확하고, 큰 규모까지 감당합시다.
믿음의 백성은 어떤 일을 할 때 빠르게 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하셔야 합니다. 능숙해야 합니다. 익숙해져야 합니다. 숙련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그 일을 처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하거나 느리게 하면 어떻게 탁월해 질 수 있겠습니까? 빠르게 하셔야 합니다. 빠르다고만 될까요? 안돼요. 빠르면서도 정확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안돼요. 우리는 큰 규모까지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만드셔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한 가지 행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보다 능숙하고 빠르게,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큰 규모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마음의 심정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셔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작은 일에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충성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큰 것을 맡기시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죠?
작은 일이 매우 중요해요. 그런데 그 작은 일을 잘 하기 때문에 더 큰 일까지 맡기겠다고 이와 같이 발전적인 역사를 우리들에게 이루어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제대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나 하나 사는 것도 어려운데 나 하나 바로 살면 그것으로 내 몫 다 감당하는 거야.’
작은 일 감당하는 것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그치면 안돼요. 큰 규모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것에 도전을 받을 때, 그렇게 생각할 때 결국 그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요. 나아가는데 까지 이루고, 이루는 것까지 우리는 돕고 섬길 수 있는 겁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빠르고, 정확하고, 큰 규모까지 감당하도록.>
이것이 출발선상에 선 우리 분당중앙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인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승리의 출발선상에 섰습니다. 어떤 슬픈 소식을 들어도 그 가운데 우리가 책임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되 그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사명을 느껴 새로운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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