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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받을 만한 가정 (창 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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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6장 5 - 12절
제  목 : ‘복을 받을 만한 가정’

할렐루야! 오늘이 복된 날인 것을 믿으십니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영육간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오시는 길이 미끄러웠죠? 그래서 오늘은 많은 빈자리가 보입니다. 특히 멀리서 오시는 성도님들의 자리가 많이 비었습니다. 하지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마태복음 18:20절에서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곳에 함께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눈이 와서 문을 일찍 닫으므로 매상이 전반적으로 떨어졌죠? 비록 물질적인 매상은 조금 떨어졌다 할 찌라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위에 매상이 떨어지므로 생긴 물질적인 공간은 물론이고 그로인해 생긴 마음의 공간까지 체우고도 넘치는 갑절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인사를 하시며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된 날입니다. 갑절의 은혜를 받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에는 ‘복을 받을만한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고요, 1월 첫 주일에는 ‘복을 받을만한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했었습니다. 기억나시겠죠?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미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이‘복을 받을만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정들이 다 복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모든 가정들이 다 복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 저도 복된 가정이 되기를 원하고요, 여러분 모두 다 복된 가정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복된 가정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된 가정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복된 가정을 만들 수 있는가’에 말씀의 초점을 맞추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노아의 가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함께 상고하는 가운데 먼저 우리들의 심비에 말씀을 새기고, 생활 가운데 말씀을 행하시므로 우리 모든 뉴져지 중앙 교회 성도님의 모든 가정은 다 복을 받을만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설교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로는 본문에 나타난 노아의 가정, 정말 복된 가정인가? 먼저 살펴봅니다. 둘째는, 노아의 가정이 복된 가정이였다면 어떻게 해서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노아의 가정, 정말 복된 가정인가?
예, 노아의 가정, 복된 가정입니다. 롯의 가정과 비교를 하면 쉽게 알 수 있답니다. 노아와 롯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뭘까요? 예,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안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물의 심판에 대해서고요, 롯은 불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답니다. 그런데 그들 가정을 결과는 달랐습니다. 먼저 롯의 가정을 보겠습니다.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일대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나오는데 오직 3사람만이 심판에서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위들이 있었지만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다가 죽었고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답니다. 롯과 두 딸만 구원을 받았는데 그 후에 근친상간이 이루어지므로 큰 딸을 통해 모압 족속이, 둘째 딸을 통해서는 암몬 족속이 생겼답니다. 후에 이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적이 되었답니다. 결국 롯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들어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그 후손은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에서 제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아 가정을 보세요. 노아도 역시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그런데 그의 가정은 롯의 가정과는 달리 모두 구원을 받았답니다. 노아는 물론, 그의 아내, 3명의 아들들, 3명의 며느리들 온 식구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후손은 오늘의 인류를 이루었으니 그의 가정은 복된 가정 이였음을 알 수 있답니다.

자, 그럼 두 번째로, 노아는 어떻게 이런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의 복된 가정 만들기’ 아주 간단합니다. 3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요, 둘째는, 가족 간에 사랑을 했고요, 셋째는 이웃을 사랑했답니다. 물론 말로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랑에 합당한 행동이 있었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1. 복 받을만한 가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9절)
첫째로, 복을 받을만한 가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말로만?... 아니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 다 하나님을 사랑하시죠.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무엇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니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절에 3번이나 걸쳐서 ‘의인’,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그가 살던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였기에 그의 삶은 빛을 더했답니다.
5절을 보니 죄악이 관영했고 모든 계획이 악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에 대해 한탄하셨다고 까지 했습니다. 11, 12절을 보면 온 땅이 패괴했으며,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 된 세상에서 노아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은 삶을 살았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난 틀렸어 내가 어떻게 의인,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될 수 있어. 이렇게 예수 믿기에 편한 미국에서도 잘 믿지를 못하고 있는데... 아이고, 나는 일찌감치 포기 할래’ 할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라는 뜻은 전혀 무죄하다는 뜻이 아니라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하다는 것도 모든 행위에 완전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보기에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뜻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노아의 모습을 귀히 보시고 그를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동행한 자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과정을 살았는가를 관심을 두시고 바라보십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드릴만한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나의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시면 인정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뉴져지 중앙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다 이런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복을 받을만한 가정이 되기 위해선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멀리까지 갈 것이 없이 창세기 1: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28절에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자연 세계에까지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세상 사람들은 헛된 곳에게 헛된 것에서 복을 달라고 빌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해, 달, 별들을 보며, 또는 나무나 바위 등 자연 앞에 복을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수공물 앞에 역시 복을 달라고 빌고 있으니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또는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눈치를 보면서 매달리거나 줄서기에 바쁘니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할까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편 146:3,4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사람을 의지 할 때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5:4-8절에서는 우상의 헛됨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는데 입이 있어도,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코가 있어도, 손이 있어도...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하면서 왜 이런 것을 의지하는냐고 책망을 하고 있답니다.
우리 뉴져지 중앙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며, 전능하시기에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단지 말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 될까요? 아니죠. 경외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모습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한다고 할 수 없답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배가 당신의 생활 속에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각자의 생활 속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가 그 중요한 일들 중에 한가지인가요? 그렇다면 매우 복된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생활의 중요한 일 가운데 예배가 없는 사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부족하십니다.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예배는 최상, 최선, 최고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 제일 우선되는 것이 예배이어야 합니다. 
노아를 보시기 바랍니다. 창 8:20절에 방주에서 나온 후 처음 행한 일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일이였습니다. 앞으로 살 일을 생각하여 집도 지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등등 수많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으나 그 모든 일들을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노아,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가정이 아닐 수 없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이민 생활, 이곳에 빨리 정착하기 위해선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로 인해 예배가 뒷전에 밀려서는 안됩니다. 오늘 나는 해야 할 일이 많기에 더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고 이야기했던 마틴 루터와 같이 오늘 우리는 바쁘기에,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기에 더욱 더 예배를 온전히 드려야겠다고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 즉 예배 중심의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뉴져지 중앙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이와 같이 행하시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 받을만한 가정은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가정은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14-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배의 크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나룻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약150M, 너비가 약 60M, 높이가 약45M 가 됩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대략 이 정도가 됩니다. 현대의 조선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가족 간에 불평이 없이 120년에 걸쳐 배를 만들었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당사자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 없이 했다 하여도 그의 아내, 아들들, 며느리들은 입이 이만큼씩 나와 노아를 향해 불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가부장 중심의 시대였지만, 이미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시대였기에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상식선을 기대하기엔 무리인 시대였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부부, 부자관계를 끊으며, 형제, 가족, 이웃과의 관계를 끊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답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 간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답니다. 120년 동안, 힘든 노역 속에서도 한결같이 서로 사랑했답니다. 어떻게?... 속담에 ‘부모 병석 3년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문난 효자라 해도 궂은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변한다는 뜻이죠. 3년이 아닙니다. 30년도 아닌 120년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이렇게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신뢰였습니다. 서로 신뢰를 했기 때문이랍니다. 노아 및 아내, 아들들과 며느리들... 구분이 없이 서로 신뢰를 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신뢰는 힘든 장기간의 노역도 기쁨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벧엘 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서로 서로 신뢰하는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편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하십니까?” (아멘) 혹, 신뢰를 못하셔도 지금 아멘 하셔야 합니다. 아멘하지 않으시면 집에 가셔서 부부싸움하십니다.
아내들께 동일한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남편을 전적으로 신뢰하십니까?” (아멘) 예, 여러분의 대답과 같이 서로 신뢰하는 아름다운 가정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신뢰를 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창 39장에 나오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답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린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의 신분이였던 요셉이 가정총무까지 되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여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다 위임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죠? 요셉을 어떻게 믿고요?... 요셉이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지... 요셉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을 터인데... 만약이 요셉이 모든 재산을 훔쳐서 먼 나라로 도망가면 어떻게 하려고... 보디발이 미치지 않고야... 정말 보디발이 미쳤을까요? 아니죠. 그 이유가 창 39:2-4절에 자세히 나타나 있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요셉의 모습 속에서 보디발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이는 사람에게도 인정받게 된 답니다. 신실한 종이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요셉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인에게도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족 간에 무엇으로 신뢰할 수 있지요?  부부이기에, 자식이기에, 혈연관계이기에, 정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수년 전에는 자녀에 의해 부모가 버림을 받더니, 수년전에는 부모에 의해 어린 자녀들이 버림을 받고요, 근래는 ‘묻지 마’식의 이혼이 늘어나 작년 한해는 이혼 사유 44%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가족 관계가 뿌리 채 흔들이는 한국 사회를 한 면을 볼 수 있답니다. 단순히 가족이기에 신뢰를 한다는 개념은 자신에게 무책임한 행동 일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 서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있습니다.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회복이 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물론이고 가족의 신뢰가 회복되어지며, 더 나아가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1석 3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답니다.
창 2: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질문이 생기죠. 창 1:31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고는 2:18절에서는 왜 좋지 못하다고 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아니십니다. ‘좋지 못하다’는 말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이 자체도 좋으나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요? 아담과 하와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담 홀로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재료를 통해, 특별한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재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가정의 머리로, 하와는 그의 돕는 배필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가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이들은 서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함같이 사랑하게 되며,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같이 복종하게 되는 아름다운 부부관계가 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신뢰를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 안정 받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뉴져지 중앙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시므로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시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족 간에 서로 온전히 서로 신뢰 하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 받을만한 가정은 이웃을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복을 받을만한 가정은 이웃을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행동하는 이웃 사랑이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벧후 2:5절을 보면 노아의 이웃 사랑이 무엇이였는지 알 수 있답니다. 노아는 이웃에게 의를 전파했습니다. 의란, 앞으로 있을 홍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말합니다. 아마 노아는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여러분은 홍수로 인해 죽게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야유, 또는 핍박과 박해 뿐 이였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노아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질 않았답니다. 1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노아 식구 외에 한 사람도 더 구원받지 못했으니 그 시대가 얼마나 악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선 지혜가 필요합니다. 목마른 자에겐 물을 주어야 합니다. 배고픈 자에겐 밥을 주어야 합니다.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함께 전하여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이웃 사랑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갈 사람에게 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옷과 음식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얼마 후에 죽을 것이니까 원없이 잘 먹고 잘 입으라고 주나요?
노아의 시대에는 심판의 날이 정확히 알려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120년후 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언제 심판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일수도 있고, 1년 후, 혹은 100년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 즉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그 날에 예수 믿은 성도들은 천국에, 불신자들은 지옥에 들어가게 됨도 믿으십니까? 그 날에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기회가 없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웃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기회가 없는 심판 날이 오기 전,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그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눅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19-31절까지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하는 부자와 그의 대문에 누워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사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최상(最上)과 최하(最下)였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습니다. 천국에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 현세에 아직 살고 있는 자기 형제들이 기억이 났답니다. 형제들만이라도 이 지옥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나사로를 살려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내주기를 간청했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재미있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해줄 것이라고 했는데, 만약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죠? 이것을 바꾸어 이야기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심판의 멧세지를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노아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는 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해하실까요?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복음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잠잠히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언제인지는 모르나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믿으십니까? 지옥은 유황불이 타는 곳이며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스런 곳이며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임을 믿으십니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도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기 위해선 복음을 들어야 함도 믿으십니까? 당신도 복음의 소식을 듣고 구원받았었음을 시인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잠잠히 계십니까? 왜 복음의 벙어리로 사십니까? 당신이 그렇게 구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당신을 통해서... 왜 당신은 잠잠히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 가정이 되었단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의 대화가 있었습니까? 예,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이런 대화도 있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 주변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너희 친구들 가운데도 있지?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이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대화가 있었습니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부부가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가정, 자녀들과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가정,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마 22:37-4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사랑, 선택사항이 아니라 성도의 필수사항입니다. 그럼 이웃사랑,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말로만 외치십니까? 야고보서 2:16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육신의 목마름보다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줍시다. 육신의 배고픔보다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해 줍시다. 육신의 헐벗음보다 영혼의 헐벗음을 먼저 해결해 줍시다. 지옥백성을 천국백성으로 만듭시다. 이는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지식이나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령에 의지하여 입술을 벌려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뉴져지 중앙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은, 실천하는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복을 받을만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복을 받을만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첫째로, 예배를 여러분 가정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족 간에 서로 신뢰함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셋째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십시오. 이런 가정이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올 한해,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석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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