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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언덕(3) :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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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에 따르면 우선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의 아버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진실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둘째,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셋째,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오늘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지는 기도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지난 주간 집회 인도 차 마산을 다녀왔습니다. 집회기간 중 창원의 모 기독교 라디오방송 대담프로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방송 녹음 후 담당 아나운서 겸 PD와 담소를 나누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면 출근한답니다.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YTN 뉴스방송을 틉니다. 뉴스를 유심하게 보면서 기독교신앙과의 연관성을 찾습니다. 중요한 이슈를 잡아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을 씁니다. 그 결과를 「그리스도인의 세상 읽기」라는 이른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 내 보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활동이 오늘 기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한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나라가 복음의 중심이다

첫째, 이 기도는 복음의 중심에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막 1:14). 그 설교를 요약하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막 1:15). 그 복음이 무엇인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막 1:14). 성경에서 '때'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종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합 2:3, 14; 사 11:1-10).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를 기다리며 사는 백성이었습니다. 그 때가 찼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도록 기쁜 소식입니까?

그 때가 찼다는 소식의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나라는 멀리 있어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었으며 희망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 나라가 이제 가까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역사를 뚫고 들어와 세상 한 가운데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가슴으로 느껴 볼 수 있을 정도로 지근(至近) 거리로 다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말씀 그리고 사역이 바로 그 구체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 자체야말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펼쳐지는 위대한 드라마요 서사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의 중심인 하나님나라를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누가 선생도 하나님나라의 중심성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누가는 역사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역사가란 역사의 의미를 해석해낼 수 있는 관점 즉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관이 없다면 과거의 그 수많은 사건, 인물, 작품들 중 도대체 어떤 것을 추려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 기술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누가의 역사관의 핵심에는 바로 하나님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가르쳤던 것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합니다(행 1:3).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으신 뒤에, 자기가 살아 계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고, 하나님 나라를 두고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중심성은 열 두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 바울에게도 전수됩니다. 누가는 바울의 에베소 지역 사역을 묘사하면서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고 기술합니다(행 19:8). 바울은 예루살렘으로의 위험한 여행길에 오르면서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합니다. 그의 고별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행 19:25).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바울은 마치 유언을 하는 비장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엔 하나님나라가 있었다는 점을 에베소 장로들이 꼭 기억해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마지막 장은 언제 읽어도 장엄하고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일한 소위 슈퍼 파워인 로마에 사슬에 묶인 피고인의 몸으로 도착했습니다. 바울의 눈앞에 펼쳐졌을 로마의 화려한 위용 앞에 인간적으로 압도당하고 위축당할 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나라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찬란함과 아름다움 앞에 로마의 웅장함, 화려함 그리고 풍요함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담대하게 하나님나라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종종 하나님나라의 중심성을 놓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참으로 해방된 교회』(11 쪽)라는 책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대신 교회 자체를 세우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짓게 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2000여 년의 교회사가 그 명제를 충분히 증명해주고도 남습니다. A. 로이지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예고(예언)했는데 정작 생긴 것은 교회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물론 엄밀히 말해서 신학적으로 바른 명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의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 도구와 관리인으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이지의 분석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내지는 제도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한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평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그 시야에서 잃어버리면 교회의 물리적 확장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스나이더가 명쾌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런 경우 교회의 물리적 확장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확장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 안으로 파고 들어와 교회가 확장되는 꼭 그 만큼 세상이 확장되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세상이 교회라는 가면을 쓰고 자기 권세를 마음놓고 확장해 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나라의 중심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패한 교회만 남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어는 남아 있되 그 진정한 정체성이 실종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중심성을 진정으로 회복하려면 그 참된 정체성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2.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정체성

하나님나라의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양용의 교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서유니온, 2005), 15-2쪽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서 '나라'(말쿠트)라는 단어는 200 여 회 등장하는데 주로 '통치권, 왕적 권위, 치세(reign), 왕의(royal)'라는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부차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공간적 영역, 지역, 영토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전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유대교 문학에서도 '나라'와 '하나님나라'는 공간적 의미보다 '통치', '지배', '치세', '왕권'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나라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마태는 '천국'(하늘나라)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공간적인 의미에서 하늘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 독자를 배려해서 하늘이란 단어를 대신 사용한 것뿐입니다. 마태 자신이 부자에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을 옮기면서 '천국'(하늘나라)과 '하나님나라'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두 단어가 서로 교환해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 19:23-24).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단순히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공간적 영역의 개념으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 마음과 삶, 가정, 교회, 사회 그리고 역사 한 가운데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성경전체를 통 털어서 보면 매우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만  찬찬히 살펴보아도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사람들 자신들을 위한 기도제목에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살펴볼 겁니다. 미리 살짝 엿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는 나라요,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을 때까지 일용할 양식으로 대변되는 최소한의 필요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의 소박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아 서로의 죄를 용서함으로 평화가 아름답게 꽃피고 열매맺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대항세력으로부터 오는 각양 시험을 극복하고 그 세력이 조장하는 다양한 악들과 대항하여 이기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펼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는 수용하면서도 그 내용은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한 시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 한국교회의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 무리들, 유대교 지도자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예수님이 펼치시고자 했던 하나님나라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떻게 오해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합니다.

첫째, 무리들은 하나님나라를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무리들의 정치 경제적 욕구를 등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요한복음 6장). 이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고대하던 그 선지자로 생각하고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실현되길 열망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단지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치·경제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만 하나님나라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셨습니다. 하여 그들에게 하늘로서 내려오는 양식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양식을 추구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양식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그들의 경제적 필요를 외면하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무리들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기적 욕망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심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 내지 배신감을 느끼고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무리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나라를 변질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꿈의 나라로 둔갑시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가듯 사람들로 하여금 킹돔 드림을 꿈꾸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싶게끔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빙자한 탐욕의 주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확장되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의 탈을 뒤집어쓰고 세상이 확장되는 것일 뿐입니다.

둘째,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제도적 권세가 확장되어 가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펼쳐지는 하나님나라로부터 위협을 느꼈습니다. 대표적 사건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막 3:1-6). 하나님나라는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소중히 여기며 그의 고귀한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주기도문에도 그런 정신이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항해 이겨야하는 악의 핵심엔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으면서 거짓된 권세를 확장시켜나가려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로 그런 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라는 율법적 틀을 통해 한 손 마른 자의 고귀한 인격을 짓밟고 자신들의 제도적 권세를 강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십니다(막 3:4). 아무리 겉으로 종교적 열정이 뜨거워 보여도 한 손 마른 자와 같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심이 없다면 거기엔 하나님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악이 가득할 뿐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하나님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확히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고난을 받고 결국 죽고 부활할 것이라고 천명하자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려면 부활이고 뭐고 일단 예수님이 고난받고 돌아가시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께서 압도적인 힘을 확보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베드로는 칼을 빼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칼을 다시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마 26:52). 하나님나라는 칼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사랑과 생명의 힘으로 확장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확장한다는 명분으로 칼로 상징되는 세상적 힘과 권세에 호소하곤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세상의 법이 주는 힘에 기대어 하나님나라를 지키고 확장하겠다는 나서는 교계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3.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삶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자신이 로마 법정에 호소하게 된 진의가 동족을 고소하려는데 있지 않고 이스라엘의 소망을 붙드는데 있다고 해명합니다. 그들이 호기심을 갖고 집에 찾아오자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증거합니다.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9-10의 말씀을 붙듭니다.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아예 포기하고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슴에 품고 바울은 자신이 사실상 감금당해 있는 셋집에 찾아온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증거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나라를 열망하는 사람은 시대가 아무리 받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낙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나라는 기어이 오고야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에 언급한 한 기독교라디오방송 PD는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참 멋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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