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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의 관계 (창 32: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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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관계.  창세기 32장22-29.
“금년한해 잘되면 무조건 당신 때문입니다.  금년한해 잘못되면 무조건 제 탓입니다”
축복은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금년한해 축복받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과 같이 넘쳐나는데, 나와의 올바르지 못한 관계로 인하여 그 축복의 물고가 다른 곳으로 흐르지는 않은지 살펴야합니다.
지난주에 설교를 하고나니까 우리 집사님 가운데 한분이 제가 모르고 있는 이야기 하나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농촌에는 물 때문에 칼부림이 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난주에 농촌에는 논에 물대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을 설교 중에 했더니,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물 때문에 동네 인심 험해지며, 앞뒷집 간에 싸우기도 하고 심하면 서로 칼을 들고 싸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영적인 생수를 취하기 위하여 칼 들고 싸우는 열심히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은 관계 두 번째 날로 바로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지 나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한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유명한 한 연예인이 또 자살했습니다.  여러 가지 자살 원인을 놓고 설왕설래합니다만, 저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바로 자신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에 대하여 불만족하며 살고, 그래서 평안이 없는 사람이 자신과의 잘못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소유와 지위를 연관시켜 말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소유한 사람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역시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래서 평안을 얻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금년이 축복의 해가 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도 높은 지위,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해서 어쩌면 자살 위기에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만,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본문 내용을 설명 드리면,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고 맙니다.  이를 안 형은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그것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20년을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얍복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다가 에서도 참 끈질긴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가져야하는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하나, 20년 동안이나 한을 품고 살면서 동생이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칼을 갈았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곱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어요.
형의 이러한 마음을 간파하고는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 작전을 쓰는데,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보다 더 친밀하게 세웁니다.

먼저 물량공세를 해봅니다.  자신이 삼촌 집에 가서 뼈 빠지게 모은 재산을 다 형에게 보냅니다.  대게는 물질에 약한 것이 사람이라 이렇게 하면 형의 마음이 좀 누그러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들려오는 소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형이 여전히 군사들을 준비하여 야곱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인정에 호소해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을 보냅니다.  아들들을 보내지요.  왜냐면 일반적으로 동생은 미워도 조카는 밉지 않으니까 아들을 먼저 보내어 형의 노여움을 풀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카드로 자신의 부인들을 보냅니다.  부인 둘과 부인들의 시종들을 함께 보냅니다.  왜냐면 시 아주버님과 제수씨의 관계는 어려운 사이이면서 서로의 부탁에 거절할 수 없는 사이니 형의 마음이 녹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카드는 다 쓰고 얍복강 가에 이릅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도망갈 곳도 없음을 느낀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이 성경에는 천사와의 싸움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는 천사와 싸우기 전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의 이유가 형, 에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그동안 자신과 자신 스스로의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야곱 곧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난 후에 강을 건넜을 때에 에서와 야곱은 서로 얼굴을 어깨에 맞대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형과의 관계의 위험이 바로 나 자신과의 잘못된 관계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얍복강의 사건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묻는 질문을 스스로 해야할 줄 믿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말은 네가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고, 불만족스럽고, 또한 평안을 얻지 못하는 네 자신과의 관계가 어떠하냐? 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뜻이 무엇입니까?
a) “네가 누구냐?”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곧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는 말은 “너는 도데체 누구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불러보았습니까?  단순히 그냥 전화 세일즈 하는 사람이 묻는 물음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 도데체 누구냐?”라는 질문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저 이름은 아무개입니다”라고 불러보았겠습니까?  우리는 그만큼이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오직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생존경쟁으로 인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주는 천사의 음성에 그는 참으로 생소하듯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질문이 왜 야곱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이해하느냐면, 천사는 야곱의 이름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묻기 위한 천사의 물음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저를 비롯한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지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무엇이 ‘되느냐(being)’보다 무엇을 ‘하느냐(doing)’ 그리고 무엇을 가졌느냐(having)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와 행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새 차 새집 그리고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소유하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합니다.  높은 지위에서 일을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부정하며 타락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했고,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자신을 잃어버렸으므로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고, 만족감도 없고 그리고 평강도 얻지 못하는 자신과의 잘못된 관계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암탉에게 품게 했다. 그래서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들과 함께 자랐다. 성조가 됐지만 독수리는 닭처럼 살아가면서 자신이 닭이라고만 여겼다. 땅바닥을 긁어 벌레를 잡고 닭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려 공중으로 두어 자씩 날곤 했다. 세월이 흘러 독수리도 늙어갔다.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큼직한 새가 우람한 날개를 활짝 펴고 세찬 바람 속에서 우아하고 위풍당당하게 날고 있었다. 늙은 독수리는 경외심을 느끼고 동료 닭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지?” 동료 닭이 대답했다. “응, 저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딴 생각일랑 품지마. 우린 그분과는 달라.” 독수리는 끝까지 자신이 닭이라고 여기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비 그리스도인의 틈에서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그야말로 정체성의 혼란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분명한 자신과의 관계를 세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가는 것이지 뭐?  기독교의 문화가 좋아서 말이야!  사람들이 괜찮으니까?  교회에 가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야! 이러한 생각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벧전 2:9)는 사실 말입니다.  이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b) “네 모습이 어떠하냐?”
자신과의 관계 곧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제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뜻은 “네 모습이 어떠하냐?”는 뜻입니다.
야곱의 생애는 속고 속이는 온통 부정으로 얼룩졌습니다.  한번 보십시다.  그는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삼촌 라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삼촌 라반으로부터 속임을 당합니다.  애초에 삼촌을 위하여 7년을 일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과 결혼을 시켜주겠다는 속임수에 7년을 하루같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고, 다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서 7년의 노예생활을 더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의 환경이 결국에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케 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야곱이 부정한 삶을 사니, 부인도 그러한 삶을 삽니다.  라헬이 아비몰래 르비딤이라는 신상을 가지고 도망하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야곱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온통 속고 속이는 사람들 틈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자신과의 관계를 무너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만족감도 그리고 평안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천사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곧 “모습이 어떠하냐?” 묻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제 자신을 많이 아팠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제 자신에게 성령께서 꾸짖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너의 모습이 어떠하냐?  정말 네가 목사가 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기를 다짐하고 결심한 대로 너의 사역을 하고 있느냐?  네 모습이 그러하냐? 라는 성령의 꾸짖으심을 느꼈습니다.  자칫 네 고집 때문에, 네 자존심 때문에, 혹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없는 경쟁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지는 않느냐?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설교준비를 멈추고 기도해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안락을 위해서, 편리를 위해서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한 나, 곧 하나님의 백성인 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욕심으로 얼룩진 가면을 쓴 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고 인생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천사는 묻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지금 네 모습이 어떠하냐고? 
나를 두르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마치 벌거벗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나를 드러내 놓고 나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의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루과이라는 나라 어느 성당 벽에 씌어진 주기도문에 관한 글이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일에 빠진 당신.
‘우리’라고? 너 혼자만 생각하지 않는가.
‘아버지?’ 과연 아들과 딸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말라. 자기 이름만 빛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아버지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도 하지 말라. 너는 네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다.‘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자를 본 체 만 체 했던 너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아직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죄지을 기회만 찾는 당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너였다.”우리 성도들도 한 번쯤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바꾸라”
자신과의 바른 관계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뜻은 잘못된 것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라는 이름입니다.  이는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의 삶이 이렇듯 다른 사람의 발꿈치만 잡고 다니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자신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성찰하고 그리고 바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잘못인줄 알면서 바꾸기가 참 힘듭니다.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기독교의 무력함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변화, 인류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가 진정한 변화의 출발점이며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변함없는 인생은 고인 물과 같습니다. 그곳에는 악취가 풍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잘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 싸움 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게 그렇습니다.  자신은 천산데, 남편이 부인이 악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은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어떤 부부가 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주유소 직원이 연료를 넣으면서 앞 유리를 닦아 주었는데, 직원이 일을 마치자, 남편은 “유리가 아직 더러우니 한 번 더 닦아 줘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직원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앞 유리를 닦으며 혹시나 자신이 보지 못한 벌레나 더러운 것이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직원이 일을 마쳤을 때, 남편은 화를 내며 “아직도 더럽군! 아니 당신은 유리 닦는 법도 몰라요? 한번더 닦아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직원은 또다시 빠뜨린 곳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유리를 닦았지만 어디에도 지저분한 곳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유리창이 여전히 더럽군! 주인에게 말해서 당신이 내일부터 이곳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어. 내가 여태까지 보아 온 유리 닦는 사람들 중에 당신은 가장 엉터리야!” 라고 하며 화가 난 남편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아내가 손을 내밀어 남편의 안경을 벗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휴지로 깨끗하게 렌즈를 닦아서 다시 남편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그제야 무엇이 잘못된 줄을 알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고, 비로소 깨끗하게 잘 닦여진 앞 유리창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안경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경을 고쳐 닦으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자신의 것을 닦으려고 하지 않아 세상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장로님의 고백의 내용입니다.
1980년에 장로장립을 받은 나는 안수집사 때와는 달리 모든 성도들에게 잘 보이는 높은 앞좌석, 즉 장로석에 눈에 띄게 앉았으며, 그 누구보다 헌금을 많이 냈음이 알려지고, 교회의 주요 부서에 부장으로 있고, 생일잔치에서는 상석에 앉도록 권함을 받고, 늘 “장로님! 장로님!”이라 불리며 뭇 성도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회가 그동안 예배를 드리던 건물을 허물고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정하여 당분간 교회 근처의 체육관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장로석도 없는 체육관에서 성도들과 무릎을 맞대고 좁은 공간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나는 너무나 불편해서 사실상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예배가 안 될까요?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성령님의 내적 음성을 통해 “너는 장로석에 앉아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교회 제도에 잘못된 정체성을 두고 만족하며 안주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장로석에 앉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풍속에 빠져 헛된 것에 목표를 두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는 데 나 자신을 드리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론)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자연과의 싸움이고,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쉬운 싸움은 없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도 그렇고, 자연과의 싸움도 그렇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큰 대리석 덩어리를 앞에 놓고 끌과 망치로 그것을 쪼아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땀을 흘리며 돌멩이를 쪼아대면 무엇이 나오느냐?”고. 이 물음에 미켈란젤로는 “나는 이 돌멩이 속에 갇혀 있는 천사를 풀어내려고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대리석이라도 끌과 망치로 쪼고 두들겨대지 않으면 훌륭한 조각품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덩어리의 돌멩이가 조각 작품이 되기까지에는 수백만 번 끌과 망치로 두들겨야 하는 것처럼 내 속에 들어 있는 ‘참된 나’를 찾아내고 옛 모습의 나를 벗겨내려면 내면의 끌과 망치로 나를 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며 가장 다루기 힘든 상대가 있다면 그것도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루하루 나 자신을 다듬어나가는 극기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 나라를 향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이기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를 흔히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야곱이 스스로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난 후에 천사가 지은 축복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나와 스스로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아셔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합니다.  그리고 변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새로운 축복의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뉴욕신풍교회
이종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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