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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취의 현장에서 (창 1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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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의 현장에서 창14:13-20.

지난 세 주간 새벽과 저녁에 '부흥에 목말라하라'는 제목으로 온 교회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섬김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평양 대 부흥회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지만, 100년 전 그 당시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겨울 추위에도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온 밤을 새우고 금식했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금연금주 운동을 펼치고, 유혹이 와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십일조를 생명같이 알고 드렸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부유해졌고 그 덕분에 유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함과 그 유식함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서서히 기도의 자리보다는, 말씀의 자리보다는, 소위 내가 일구어 놓았다는 그 자리에서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들이 즐기는 것 함께 즐기고, 그들이 누리는 그것에 더 인생을 걸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유머 작가 '루코크'의 풍자적 콩트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는 "현대판 성령강림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는 광고가 나갔다. 적어도 120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 명이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다. 빌립의 가족은 간밤에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터쇼에 갔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 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 상 골프를 치러 떠났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쳐서 나올 수 없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혹시 여기서 우리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풍요롭고 평안해지면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더욱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교만해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경을 견뎌 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정말 이 말처럼 개인을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중에 신앙을 잘 지키다가도 풍요로워지고 어떤 일에 성취를 얻게 되면 점점 믿음의 생활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삶에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가족과의 다툼 속에서 사랑하는 조카와 헤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와 헤어진 조카 롯이 전쟁 속에서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뭐, 그 당시에 이 소식은 절망의 소식에 가깝지 않습니까? 그러나 1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평소 준비해 두었던 군사 318명을 데리고 기습작전을 감행했고, 거기서 극적으로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해 냅니다. 300명이 조금 넘는 사병으로 적을 기습 공격하여 눈부신 승리를 얻고 포로 되었던 조카 롯을 구출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귀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아군은 불과 318명. 성경학자에 따라서 그 당시 적군의 숫자는 1만 명에 가까웠다고 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프라이드가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몇 안 되는 숫자를 가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수립한 전략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뛰어난 전략이 빚어낸 승리였음을 누가 거기다 이론을 달겠습니까? 또 나아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조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분명 그는 그 순간 천하를 얻은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정말 조심해야 할 순간이 있다면 성공 다음입니다. 우리가 성공한 다음에는 어느 정도 자만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자만심. 성공 다음에 우리는 죄를 짓기 쉽습니다. 어떤 죄를 짓기가 쉬울까요? 자기를 높이고 싶어합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했단 말이야.'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그런 유혹을 누구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성공을 갑자기 얻을 때, 또 어렵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의 위치가 높아져있을 때 갑자기 사람이 변해지기 시작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분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뼈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승산이 없는 전쟁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우고 입성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기 보십시오. 자신의 승리의 현장에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7절에는 소돔의 왕이 나아와 그를 영접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가운데는 소돔 왕뿐만 아니라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너무 신비한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가 살렘 왕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름은 멜기세덱, 세덱이란 말은 본래 '의'라는 말입니다. 의의 왕.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3절에 특별히 이 사람을 소개하는데 '처음도 마지막도 없다 족보도 없는 존재다.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멜기세덱은 앞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 그림자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개선 장군처럼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19절입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는 지금 승리의 현장 앞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표현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히브리어로는 "엘 엘리온"(El Elyon)인 것입니다.(엘은 하나님, 앨리온은 '가장 높은' 영어로 highest입니다.) 엘 엘리온이라는 표현이 오늘 성경에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20절에서 멜기세덱의 메시지는 계속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승전의 기쁨을 누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해 '너의 승리의 원인이 너 자신이 아닌 나 엘 엘리온였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그런 군사 전략을 짜도록 아이디어를 주었고, 네가 싸울 힘도 내가 공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진정한 성공은 엘 엘리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마 잠시 동안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우월감을 노래하고 싶었던 아브라함이지만, 이 전쟁은 바로 하나님의 승리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준비하며, 대처하며 살아야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다면 내 노력, 내 지혜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브라함은 늘 실패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자원하는 마음보다는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전쟁에서 그는 모처럼 승리를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변 사람도 인정할 만큼, 큰 승리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뭐 이 정도 되면, 누구나 교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사실 아브라함이 끌려 다니면서 자기 힘으로는, 자기 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수없이 겪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오셔서 그를 붙들어 주셨고, 그는 그 은혜 앞에 겸손히 단을 쌓는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 왔던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여기 자신의 희생으로 얻은 전리품을, 자신의 피를 쏟아 얻은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 사건은 성경에 오늘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 십일조를 드리면서 나의 이 성공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이 모습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샤를르 푸코라는 군인이 예수를 만난 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선교하다가 원주민이 쏜 총에 순교하였습니다. 그 분이 쓴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그런데도 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합니까?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만큼 그 사실을 내가 인식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경건은 현존자 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싸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아브라함을 보셨지만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스스로 무너졌던 것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당신의 승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이 이야기 앞에 그가 다시 다짐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그냥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였어.' 라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도구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 줄 아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본래의 이유가 아닙니까?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이 축복의 근원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옮기면 축복의 통로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에 불과해요. 내가 쓰임을 받았다는 것. 나 같은 사람도 쓰임을 받았다는 것을 깊이 알 수만 있다면. 이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 자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개선의 여로에서부터 만났던 살렘 왕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다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무얼 깨달았을까요? '아! 나는 축복을 받는 자로구나.'라고 생각이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십일조를 아브라함이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헌신의 사건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명령한 일 없어요. '너 드려라' 이런 명령한 것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드렸어요. 자발적인 것이었어요. 자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어도 자원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창28:22절에 보시면 야곱이 베델의 들판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원하구요. 그리고 저는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십일조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어도 이것이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이후에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가서 모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세 시대에 십일조가 율법의 한 부분이 됩니다.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 데 십일조가 신약적이 아니다 복음 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시면 그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었고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거기 십일조를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가 강조가 안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신약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신약 성경에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기본이었다. 그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분의 일 이상 얼마나 더 드릴 수가 있느냐가 그들에게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들은 전체를 드리기를 원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드리는 정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체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십분의 일을 드리되 그 속에 전체를 드리는 헌신이 어떻게 고백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시면 돼요. 우리 주님 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주님, 그의 생명을 나를 위해 드려 주신 바로 그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우리 교회 청년들 가운데 첫 직장을 출근하고 그 첫 열매인 월급 몽땅을 바치는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참, 눈물이 나더라구요. 왜냐하면, 저들이 그 직장을 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그 만큼 그들에게는 남다른 물질이 아닙니까? 그런데 선뜻 주 앞에 내려놓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강요한 것도 아닙니다.

리차드 포스트라는 영성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목사님은 그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가 있다. 그 분은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헤롤드 피케트라는 신학자는'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출발점은 바로 십일조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말에 동의합니다. 헌금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사실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만 믿음이 어느 정도 자라지 아니하면 참 어렵습니다. 10만원 중에 만원을 떼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만 원에서 백 만원을 떼서 십일조로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는 것은 그만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부자가 십일조 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군인들 중에서 낙하산을 타는 특전 대원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이기에 보기에는 굉장히 낭만적입니다. 나도 한번 저렇게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아버지와 딸이 특전대에 같이 들어가서 낙하산을 타 가지고 신문에서 화제가 된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훌렁 몸을 던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상에서 피눈물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전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곳에는 10미터 높이의 점프대가 있습니다. 10미터 짜리 점프대 위에 딱 서면 눈 높이가 11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아찔하죠? 거기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아니할 때까지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0미터 점프대가 두렵지 않고 맘대로 뛰어 내릴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비행기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아무리 높아도 무섭기는 똑같으니까요. 어디든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어느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냐면 교인들이 돈에 대하여 가장 공포를 느끼는 10미터 점프대라고. 그러니까 십일조에서 겁없이 뛰어 내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을 수가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한번 물어 보십시오. 헌금 앞에, 돈 앞에 여러분을 세우고 하나님에게 내가 누군가를 물어 보십시오.

오늘 본문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그 장소가 창세기 14장17절에 보시면 왕곡이라는 장소였어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고.' 왕곡이란 말은 왕의 골짜기란 말입니다. King's valley 왕의 골짜기. 성경학자들은 이 왕곡이 그 감람산과 예루살렘 성전 사이에 있는 계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것이 기드론 계곡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그 분은 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지 직전에 최후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을 만나주던 제사장 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도 떡과 포도주을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때 예수님 심정이 어땠을까요? 떡을 돌리면서 '이 떡은 말이야 너희들을 위해서 내일 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말이야 내일이면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게 될 나의 보배로운 피야.' 이런 심정으로 잔을 나누시던 우리 주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 전체를 내어주신 주님. 그의 피 흘림, 그의 자신을 내어주심, 그의 전부를 내어주심, 그의 희생 때문에, 그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꼭 알아두십시오. 돈을 사랑해 보십시오. 나중에는 비참해 집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섬겨 보십시오. 남는 것은 내 마음의 공허함 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들고 올해도 이 거친 인생바다의 선장이 되심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마져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한해도 '하나님의 기막힌'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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