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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우는 자로 살자 (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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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로 살자(마11:28-30)

여러분! 방금 읽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배우는 일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참된 쉼을 얻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배우는 자로 살아야 한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자로써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과 그분의 사역의 기술을 배우고 그분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Ⅰ. 배움의 목적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요10:10) 첫째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이제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배우는 목적은 한 마디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풍성한 삶은 우리에게 안식과 자유를 준다.

배움의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마22:37-4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배우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배워나갈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진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은 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었지만은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부족함이 많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많은 것을 더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과정을 이수하여 제직이 되고, 구역장이 되고, 교사가 되고,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배우는 목적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배운 결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람을 더욱 사랑하고 있는가 또 그 결과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지식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활동만 사랑하고, 일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마음에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배움의 목적을 잘못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풍성한 삶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배워나갈 때 누리게 되는 것이다. 

Ⅱ. 배움의 장애물

1. 교만

딤전6:4절에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라고 했다. 지금 이 사람은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배워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한마디로 교만하기 때문이다. 처질은 “나는 배우기를 원하나 가르침을 받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태도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1시간동안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10시간 동안 혼자서 공부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다. 자기 혼자서만 배우고 남이 가르치는 것은 원치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개방하지 아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떤 교훈이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에 관련된 인간의 교만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개인적인 교만이다. 이것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우월한 것처럼 나타내고자 할 때 생기는 교만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 더 잘났다, 더 배웠다, 더 안다, 혹은 더 나이가 많다는 생각 속에 담긴 것이 개인적인 교만이다. 특별히 한국 사회는 나이 때문에 배우는 데에 문제가 일어날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부터도 마땅히 배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불광동 교회 임창열 집사님의 배움의 자세)

2) 종교적인 혹은 교육적인 교만이다. 자기보다 학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또 교사가 자기보다 신앙의 연륜도 짧고 경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만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세우신 사람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떤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먼저 겸손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뀌어야 한다.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께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잠언15장32절에 “훈계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고 했다.

Ⅲ. 배움의 자세

우리가 잘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개방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배우는 과정에서 보면 어린 아이 때 가장 많은 것을 가장 빨리 배운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때로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배우는 것을 본다. 어린 아이들이 이렇게 잘 배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마음이 단순하고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기가 가장 어려운 때는 언제인가? 어떤 것이 이해가 안되는 때보다도 마음이 개방되어 있지 않고 겸손하지 못할 때이다. 특별히 가르치는 사람이 영적 지도자이든, 동료이든 상관없이 그 가르치는 바를 저제로 배우는 못하는 때는 바로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품을 때이다.

어린아이들은 배우는 일에 특별한 점이 있다. 첫째로, 어린 아이들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묻는다. 자녀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엄마, 이것 뭐야?...저것은 뭐야? 왜 이래?..”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이 열심히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묻지 않고 지나치는 때도 많다.

둘째로, 어린 아이는 배우는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연습을 거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스스로 걷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수없이 많은 뒤집기, 엎드려 기기, 걸음마와 넘어짐을 통하여 걷게 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이런 노력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셋째로, 어린아이는 가르치는 것을 자기 고집 없이 그대로 배운다. 단순하게 가르쳐 주는 대로 자기가 본 대로 그대로 따라 배운다. 단순하게 가르쳐 주는 대로, 자기가 본 대로 그대로 따라 배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 때가 많다. 배우는 내용에 자기 생각을 집어 넣는다. 경험을 집어 넣는다. 선입견을 가지고 이해한다. 그러다보니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하고,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가 어느 날,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그는 밤새도록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발휘하며 경험을 되살려서 고기를 잡으려고 애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는 이 바다에는 ‘고기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고기잡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베드로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따랐다.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가르쳐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배운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6)”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큰 영적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도 항상 마음을 개방하여 베드로처럼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테두리 내에서 안주해 버리려는 태도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변화되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우리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교만과 편견의 벽이 되어 그보다 더 귀한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행전17장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삶에 진보를 이루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베드로처럼, 베뢰아 사람들처럼 배우는 일에 개방된 태도와 열정을 갖는 그리스도인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배움의 또 다른 자세는 전폭적 헌신이다. 배우는 일에는 전폭적인 헌신이 필수 조건이다. 이 전폭적인 헌신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 중의 하나는 열심이다. 헌신된 사람은 열심을 다하여 움직인다.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일에 온전히 헌신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열심을 다하여 수고하게 된다.

어떤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도 별로 도움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프로그램에서 얻을 것이 없고 배울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을 이끄는 인도자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통하여 배우는데 본인 자신이 헌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신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환경을 통하여 배우고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만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배우지 못하게 된다. 어떤 환경에서든 헌신되는 것이말로 최선의 것을 배우는 비결이 된다.

헌신의 외적인 모습이 ‘열심’이라면 내적인 모습은 ‘멍에를 메는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어 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쉽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잘 맞는다’는 뜻이다. 몸에 꼭 맞는 맞춤복과 같이 잘 맞는다는 뜻이다. 멍에를 회피하고는 배울 수 없다. 소가 일할 때 꼭 맞는 멍에를 메야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도 주님께서 매어 주시는 꼭 맞는 멍에를 멜 때 주님을 가장 잘 배울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멍에를 매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 멍에를 매지 않고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되어보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모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멍에를 회피하고는 배울 수가 없다. 여러분! 멍에를 메지 않은 소는 일을 할 수 없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다. 멍에를 메어야만 일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멍에를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배울 수는 없다. 배우기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시간의 대가, 물질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서로 성장을 꾀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워 성장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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