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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능의 비결 (행 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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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른 날짜 다른 언론 매체에 자녀를 교육시키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가진 두 부모가 보도되었습니다. 먼저는 여섯 남매를 모두 수재로 길러 화재로 된 어머니입니다. 첫째를 S대 의대로 보내 의사를 만들었고 둘째는 S대 법대로 보내 변호사를 만들었고 셋째를 S대 약대로 보내 약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H대 수학과를 나와 지금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 중에 있고 다섯째는 금년 2월에 Y대 의대를 졸업할 예정이고 여섯째는 고등학생인데 늘 전교 10등 이내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상당히 잘 키웠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기자가 찾아갔습니다. 비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자고 물어 보았는데 비법이라고도 할 것 까지도 없이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몇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 중 하나는 이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습관을 길렀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습관인데 바로 숙제를 잘하는 습관을 길렀다고 합니다. 돈도 안 들고 참 쉬운 일입니다. 두 번째는 뭐든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 스스로 하게 하면서 어머니들이 욕심을 부릴 수 있는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까지도 아이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과 친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잔소리를 하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기 할 일이 끝나고 나면 항상 책을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어머니의 책읽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책을 읽었던 것입니다. 또 언니가 책을 읽으니까 동생도 따라서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엄마 스스로 책읽는 모습을 가진 것이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아마 자녀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한 두 학원은 다 보낼텐데 이 어머니는 학원이 만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섯 아이 중에서 두 아이 첫 번째 아이와 여섯 번째 아이를 학원을 보냈는데 석달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이들이 안 해도 되겠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 내겠다고 하자 돈이 없어도 아이를 잘 키울 수가 있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고 그것을 아주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나 아빠가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재주를 부리게 해야 한다고 몇 마디 덧붙였습니다. 엄마나 아버지는 아이의 능력에 맞게 공부할 수 있도록 그저 멍석만 깔아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재주가 무엇인지를 보고 그 재주를 썩히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고 합니다. 참 쉬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들을만한 말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누가 무엇을 한다면 여기 휩쓸리고 저기 휩쓸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저도 많이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이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다른 날짜 다른 신문에 이런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60세 된 한 아버지가 자기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다가 경찰에 붙들렸습니다. 불을 지르려는 걸 말린다고 가족들을 망치로 위협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원인이 중학교 2학년인 쌍둥이 아들이 전교생 500명 중 나란히 제일 꼴찌인 500등과 499등을 했다고 합니다. 화도 날만 합니다. 이 두 아이들이 그러면서도 컴퓨터 오락만 하는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고 하는데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이 아버지는 두 아이의 성적표에 양 하나만이라도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아버지가 화가 날만하다는 것도 이해되고 그 심정도 이해할만하지만 그 아버지가 과연 그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 봅니다.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두 아들이 나란히 500등과 499등을 했을까요?

여러분,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기업하는 사람들도 가정의 어머니 아버지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늘 나타나는 공통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남 탓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묻고 자기를 돌아볼 생각은 않고 늘 남들을 향하여 이 탓하고 저 탓을 합니다. 어디나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어쩌면 거꾸로 인지도 모릅니다. 자꾸 남을 탓하다 보니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 자기가 서야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한 번도 앉아보지도 못한 불쌍한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두 사람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어디서 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나요? 성전 미문 앞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전에는 네 개의 뜰이 있습니다. 맨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이고 그 다음이 여인의 뜰이며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중에 하나가 미문입니다. 그 앞에서 고쳐주었습니다. 다른 데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지만 여기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고 유대인도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둘기 파는 사람, 양 파는 사람들도 여기서 팔았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도 여기서 바꾸어 주었습니다. 관광오는 사람들도 다 여기서 관광을 하게 됩니다. 성전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바로 이방인의 뜰인데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일어나 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고쳐주었고 또 그것 때문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체포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워낙 그 사람들을 위대하게 보니 붙들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어보았는데 그 때 이들은 부활한 예수가 이 사람을 낫게했다고 설교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붙들려 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부활을 심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권력자들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실세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는데 제사장이라고 하면 오늘날 목사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목회자들이 생각할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목회자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실권자자 되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영락없이 썩어갑니다. 교회도 썩습니다. 안됐지만 목사는 힘이 없어야 합니다. 권력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실권을 가지다 보니 나라가 엉망이 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설 곳이 없어지게 되고 있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활을 싫어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지금이 좋기 때문입니다. 나중을 생각하면 어떻게 지금이 좋을 수가 있습니까? 돈을 그렇게 불법적으로 많이 모을 수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부활을 생각한다면 자기가 계속해서 그 돈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돈 많이 벌어서 어떻게 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실텐데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의식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그 돈은 마음대로 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잘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어두움, 그리고 좀 더 영적으로 말하게 되면 어둠의 세력들은 늘 부활 가르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 자체를 싫어하고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방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말씀을 잘 듣다가 부활을 이야기 하면 꼬박꼬박 잠드시는 분도 계십니다. 왜 그런지 잘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나가게 되면 어둠은 이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예수가 부활할 때에 어둠의 세력들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도는 끌려가게 되었고 유대의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심문을 하고 피고가 대답을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이 답변시간을 이용하여 일장 연설을 하였습니다. 아주 위대한 연설입니다. 성경이 다 기록했는지 아니면 일부만 기록했는지 알 수 없어도 대단히 위대한 연설이 나옵니다.

9절부터 그 내용입니다. 여러분, 만일 이 앉은뱅이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앉은뱅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들에게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서 여러분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고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위대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설교 요지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는 죽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했습니다. 그 예수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보시던 바와 같이 한 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이 앉은뱅이를 고쳐서 일어서게 했습니다. 또 유대 지도자들에게 여러분들은 해서는 안 될 일 즉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였고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도와주지 않고 챙겨주지 않은 불쌍하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예수는 도와주었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여러분을 대신했습니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대단히 위대한 연설입니다.

베드로의 연설내용을 한 번 보십시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문제점은 항상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못난 지도자들은 꼭 그랬습니다. 그런 지도자들 밑에 있으면 나라라면 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가정이라면 가족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교회라면 교인들이 참으로 힘들어집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늘 그랬습니다. 참으로 못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도탄에 빠졌는지, 어렵고 힘든 일에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옳은 말을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잡아가는 일은 참 잘했고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은 잘했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에게 아주 의미있는 말 하나가 있습니다. 국가의 개입과 노벨상 수상은 반비례한다는 말입니다. 참 그럴듯한 말입니다. 잘 한다고 나서는 일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에도 그렇고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행정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작은 정부를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도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TV나 책을 보기도 하고 기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우리보다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더 챙기십니다. 관료주의와 천재는 섞일 수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의미 있는 말입니까? 나라에만 관료주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에도 사회에도 가정에도 그리고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도 가정의 부모들도 정말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것과 정반대였습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어떤 것인지 우리 예수님은 정확히 구분할 줄 아셨고 그리고 구분한대로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시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 받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는 당신에게 영광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누구든 마지막에 자기 이름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예수는 이것을 뛰어 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도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을 받고나니, 예수님으로부터 제대로 배우고 나니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을 보고 놀라니 베드로와 요한이 이름을 좀 낼 듯도 한데 그들은 그 유명한 일을 본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스승 예수에게서 바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랬습니다. 이름 내고 얼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사랑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잘난 사람들의 잔치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잘난 사람들의 이름 내는 자리가 되어야겠습니까? 교회는 못나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못나야 합니다. 수치와 모욕을 당할 일이 있으면 교회가 당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 주님 뒤를 따라서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즉어야 될 일이 있으면 교회가 죽어야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아셨습니다. 오늘날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교회이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면 아무리 큰돈을 벌 기회를 잃어버린다 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멋진 기회라도, 열이면 열사람이 다 한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에 좀 도움이 된다고 성령이 가르치지도 않고 예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하겠습니까? 반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떤 손해가 있어도 어떤 고통이 있어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돈이 있다고 그것이 다 내 돈이 아닙니다. 항상 끊임없이 고백해야 할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내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광을 받고 우리가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시오,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고 이것이 건강하고 바른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이런 건강한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무너져도 건강한 기독교인들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항상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생활 하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재주나 기술을 부릴 것이 아니라 참된 기술과 참된 비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게 되면, 건강한 영과 마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여러분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십니다.

저는 자주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라는 채널을 보는데, 사자들이 사냥감을 쫓는데 다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잡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병든 놈, 무리와 함께 섞여있지 않은 병든 마음을 가진 놈들만 꼭 잡힙니다. 함께 무리와 섞여 있고 함께 살아가는 건강한 몸을 가진 동물은 잡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얼룩말은 절대로 사자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영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비결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제대로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비밀에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연설이 참으로 위대한데 그 위대함은 두 가지 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연설의 대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재판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공회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8절에서는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라고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단합니다. 그 앞에 가면 주눅들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곳이 아닙니까? 거기는 전․현직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전문가인 서기관들이 있었고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제사장들이 있었고 율법에 충성을 다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의 존경을 받는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무시무시한 곳이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인데 이런 곳에서 한 베드로의 연설을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얼마나 담대하고 당당합니까? 이것 때문에 베드로의 연설이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래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 앞에서 주눅 들고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있어도 그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할 말 다 하는 사람,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엇이 겁이 납니까?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며,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고 계신데 무엇이 두렵다 말입니까? 당당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멋이 있습니다. 돈 으로 멋 부리는 것이나 권력으로 멋 부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곧 무너지게 됩니다. 참된 멋, 참된 당당함은 다른 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 연설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모양만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습니다. 내용이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그 누구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날카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좀 가지십시오. 여러분들이 말을 하게 되면 누구도 함부로 딴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정말로 그렇구나 하는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긍금한 것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이런 당당함과 담대함, 이런 권세와 날카로움과 지혜가 생겨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 사람들도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하게 여기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그 사람들을 오래 주목하고 있었고 출신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왔겠습니까? 잘 아셔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공부 많이 한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훈련하고 다짐한다고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은 잠깐 낼 수 있지만 이런 권세는 없습니다. 답은 딱 한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있으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8절에 그 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지금 까지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성령충만하니까 그런 지혜도 생기도 날카로움도 생기고 담대함도 생기고 당당함도 생겼다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세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들이 타협하자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라고 타협하였는데 이 정도 같으면 넘어갈 법도 한지만 그들의 대답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19-20절)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신앙인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가져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확인합니다. 이 권세, 이 능력, 이 당당함은 어디서 생겨납니까? 다른 어떤 것에서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이런 능력과 권세가 생깁니다. 성령충만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능력을 가지게 되고 여러분들은 권세를 가지게 되고 교회는 이런 힘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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