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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기적 (행 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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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을 보면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딱하다는 생각입니다. 참으로 안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노대통령 요즘 잠을 제대로 못자는 것 같습니다. 대단히 억울하고 속상하는 일, 화나는 일,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잘 이해해주지 못하고 오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면 그 억울함이 풀리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을 많이 한다고, 소리 지른다고 억울함이, 화가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내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이것을 좀 제대로 알아야하는데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꾸 말을 많이 하고 소리 지르게 되면 더 엉기게 되어 억울한 일이 더 많이 생기고 화가 나는 일이 더 많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대통령에 대해서 안타까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대통령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해결되는데 말입니다. 속 터질 일이 있어도 터지지 않게 해주시고 화날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자꾸 다듬어 주십니다. 혹 정말로 화날 일이 있어도 기도하면 그것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다. 혹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아프지 않습니다. 기도하게 되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점점 더 없어집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말하지 않으니까 자꾸 사람들에게 말하게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이렇게 겸손하게 됩니다. 자꾸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내 생각이 옳고 나는 똑똑하고 나는 많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고 내가 모르는 것, 잘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텐데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대통령이 저렇게 속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닌 말로 지지율도 저렇게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겸손해지고 겸손하면 내 마음속에 평안이 생겨나고 국민들이, 언론들이 왜 저러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자꾸 이해하게 되고 결국 그들도 도와줄 수 있는데 대통령이 이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똑똑하고 잘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는데 이것을 몰라 자꾸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것 간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복음성가에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방황하십니까? 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대통령이 정말로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참으로 기도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가기만 하면 쓸쓸하고 속상함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십니다. 이것은 백만 명이 위로해도 받을 수 없는 위로함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없는 평안함을 주십니다. 기도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상황은 그대로일지라도 그렇게 좋은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권세도 능력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면 어느 틈엔가 내 능력의 키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이 모든 일이 서서히 해결될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기도로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베풀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세상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무슨 문제이든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해결해주십니다. 한 번도 꺼려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가져갈수록 더 좋아하십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늘 기도합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늘 기도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멋지게 일을 하고, 가정을, 회사를 아주 멋지게 꾸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힘이 없어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얼마나 능력의 종입니까? 이들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던 중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거의 예배당 앞이었습니다. 그 곳이 몫이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제일 넉넉해지고 베푸는 손이 커지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만해도 마음속에 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우리의 수도나 결단으로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권세를 받게 되고, 능력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온유함을 닮아져갑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작정만 하시면 됩니다. 주님 앞에 더 자주 더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더 자주 나가는 사람은 더 많이 베풉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더 불쌍하게 여기도록 되어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 베푸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더 많이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한 푼 더 주는 회사가 바로 기독교회사입니다.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틈만 나면 나누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방랑시인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방랑시인이 되려고 작정했는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시인들의 경제능력이 있지 않아 어떻게 하면 밥을 굶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때 선배 방랑시인이 방랑할 때 힘들고 고달프고 도움 받을 곳을 알지 못하면 그 동네에 십자가가 있는 곳에 가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직 북한의 두만강에는 중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사람들 사이에는 변치 않는 진리가 된 말이 있습니다.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에 가면 무조건 십자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거기 가면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준다고 합니다. 중국의 두만강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렵게 삽니다. 그런데도 예배당에는 그렇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에 돈을 맡겨두어 그들을 도와줍니다. 전철안에 장애인들이 구걸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틀고 있는 음악은 거의 찬송가나 복음성가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래도 잘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아주 엄격한 시장입니다. 기독교는 베푸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구걸하는 사람이 성전 앞에서 구걸을 하는 때에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기적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몇 가지 짚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이 사실일까 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아니면 픽션일까요. 우리가 먼저 아주 분명한 것부터,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부터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그 당시에 유대교에는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과 가장 예민한 부분은 자기네들이 믿는 유대교 외에 다른 종교가 있어서 우리의 민족들을 미혹하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장로님들이 계시는데 장로님들이 계시는 가장 큰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잘못되는 일이 교우 가운데 있는지 살피는 것이 장로님들의 제일 큰 역할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혹시라도 잘못 가르치는 일이 없는가? 우리와 다른 교의를 가르치는 데가 있는가? 라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니 새롭게 생겨난 신흥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 예민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많이 동원하여 혹시 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지 호시탐탐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달라서 그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원은 이 종교에 대해서 아주 무서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진대 만일 기독교인들의 이런 기적이 사기성이 있거나 거짓을 보태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 앉은뱅이 기적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부터 우리가 짚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있다고 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좋은 아내와 살아가면서 그 아내가 얼마나 귀한 아내인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좋은 남편과 함께 살면서 그 남편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을 다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부족한 아내와, 조금 덜 한 남편과 살아가도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복을 누리고 은혜를 누립니다. 여러분, 돈 있다고 다 누리던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나중에 다른 데로 다 흘러 가 버립니다. 돈 없다고 못 누리는 줄 아십니까? 돈 없어도 더 잘 누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돈이 있다고 누리지 못할 정도 뿐 아니라 한평생 그 돈짐을 지고서 꺼이꺼이 하다가 죽을 때 아까워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적도 그렇습니다. 기적이 뻔히 있는데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던 한 선생님 이야기를 들은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 선생님이 어떤 것을 하나 알게 되어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여러분, 성경에 있는 기적은 정말로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예를 들어 볼까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갔다고 하는데 여러분, 그것은 바다를 건너간 것이 아니예요.” 라고 말하면서 “홍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얌숩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붉은 바다라는 뜻도 있지만 갈대밭이라는 뜻도 있어요.” 라고 홍해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사람들은 잘 몰라서 바다를 건너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갈대숲을 건너갔답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이 말을 듣고 선생님에게 “야, 선생님,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대단한 하나님이시네요. 정말로 놀라우신 하나님이시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신이 나서 말을 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언짢은 기색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하나님이 바다도 아닌 갈대밭에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갔다고 하는데 그 뒤를 따르는 이집트 군인은 바다도 아닌 갈대밭에 어떻게 빠져 죽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대단한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다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사람과 누릴 수 있는 사람만 누립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오. 기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을 한 번 보시고 이 나라도 한 번 보십시오. 사실 이 나라를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풍성히 살 수 있습니까?

두 번째 우리가 짚어 볼 것은 오늘 날에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실 때 기적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기독교를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제대로 전달하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와 예수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필요했었고 그런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눈을 번쩍 뜨고 볼 그런 일과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하는 이 성전 앞에서 베드로를 통해서 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을 때, 기독교와 예수를 전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 하나 더 짚어 볼 것은,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하실 때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손수 일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를 내려주신 일은 그 누구의 손을 빌리거나 거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냥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게 하시고 바람을 불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가고 있는 광야에 메추라기를 떨어뜨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친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주 많은 경우, 거의 대부분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사람들과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홍해를 가를 때에도 그냥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었지만 모세에게 지팡이를 저 바다 위로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또 물이 없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세야,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바위를 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바위를 가리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없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람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때에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거기서 고쳐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까지 가서 엘리사를 찾아가라고 하고 별것 아닌 것 같은 엘리사는 방안에 앉아서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멱을 감으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할 때에는 베드로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기도 하시지만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손을 잡고 같이 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위대한 일, 기적같은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환자가 있을 때에 여러분이 가서 고쳐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의술을 주시고 때로는 여러분들에게 돈을 주셔서 의사에게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조금 있다가 지난번에 우리교회가 심장병 수술시켜준 아이를 화면으로 볼텐데 얼마나 좋습니까? 바자회를 하게하고 돈을 모아서 다른 쓸 일도 많지만 아이 하나 이렇게 치료해 주는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가 돈을 조금만 내면 저 북한이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먹일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오병이어로 이만 명을 먹이셨지만 우리들은 조금만 하면 이만 명이 아니라 이십만 명도 더 먹입니다.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틈틈이 약품을 모아서 이북이나 중국에 보내기도 합니다. 좋은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염제 하나면 웬만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항생제 하나면 다 살아납니다. 여러분들이 고기 먹을 때 비계를 떼서 버리는 데 이북사람들에게 살코기와 비계를 같이 내 놓으면 비계 덩어리에 손이 얼른 먼저 갑니다. 그것만 먹으면 다 살아납니다. 우리는 콜레스테롤이 어떻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 살아납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 더 짚을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기적같은 일들을 여러분의 돈이나 가진 기술로 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차하면 하나님께 돌려야 할 그 영광을 우리가 차지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자꾸 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은연중에 내가 인사를 받고 내가 영광을 받고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으로 자꾸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참 조심해야 됩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인사를 좀 해야겠다고 했을 때 엘리사가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당시는 물건이 귀할 때인지라 그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이 아까워 “우리 선생님이 필요하니 조금씩만 달라고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아만이 너무 기뻐서 주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환 게하시는 자기 선생님을 만나자 마자 나아만에게 있던 그 나병이 온몸에 다 퍼지게 되었습니다. 참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아무리 인사를 하고 싶어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나아만이 이제 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 5:1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가 차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런 일이 생겨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 라는 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다가 앉은뱅이를 낫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온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를 잡아 오고 꽃을 가져와서 제사를 드릴테니 앉으라고 하니 바울과 바나바가 펄쩍 뜁니다. 옷을 찢고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4~15).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14: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라고 말한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 제사를 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떻습니까?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큰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주목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 14절, 15절에 이어서 계속해서 예수가 신이며 예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며 예수에 대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그 이름 예수를 믿음으로 그 이름 예수가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앉은뱅이를 성하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너무너무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 바나바 그리고 엘리사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틈만 나면, 어떤 기회를 얻기만 하면 모든 지혜를 써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십니다. 너무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하십니다. 본인에게 원래 능력이 있었든지 없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위대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더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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