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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그늘로 나아오라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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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중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잘 알려진 말씀이다. 특별히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들에게도 유명한 말씀이다. 전도 할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이기 때문일것이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실 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초청의 말씀은 25절부터 한 문맥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외에 또 한 무리를 말씀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다. 25절 말씀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했다. 하나님 구원의 초청을 어린아이들은 이미 받았고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대비된다. 어린아이들이란 의존적임을 표현한다. 아이들은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부모를 통해 얻는다. 아무리 작고 순수한 것일지라도 부모에게 의존해서 얻는 것은 아이들의 특징이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비유하신 이유도 인간은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려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가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가장이다. 가장은 여러 부분에서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은 또 가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능력과 힘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어려움과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이런 수고과 짐이 없다. 아이들은 ‘아버지’ 라는 존재 때문에 어떤 환경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누린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아버지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세상의 어느 피조물보다 가장 독특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인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어느 누구도 고칠 수 없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 사람 스스로 고치려고 하면 모조품 밖에는 될 수 없다. 후유증이 생기고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유발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무거운 문제들을 갖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초청하신다. 유일한 답이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길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우리의 고장난 모습을 보시고 심판이나 책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시는 사랑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또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고 초청하신다. 예수님이 지신 멍에는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거였다. 즉,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십자가 그늘 아래로 부르신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갈 때 모든 무거운 짐들을 해결 받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기 원하신다. 

본문은 불신자들뿐에게만 아니라 믿는 우리들에게도 교훈을 준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십자가 그르 아래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많은 경우 불신자들 중에 이 말씀에 매료되어 교회 따라왔다가 믿게된 사람이 있을 줄 안다. 교회만 나가면, 예수만 믿으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것 같은 착각을 갇기도한다. 그것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말씀이 우리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문제는 여전히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줄 알았는데 말씀을 보면 사실상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준다는 암시는 없다. 특히 29절 말씀을 보면,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더러 당신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렇게될 때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고 하신다. 삶의 모든 형편과 문제들이 백 팔십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이것을 근거로 30절에서 말씀한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29절의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는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지 않고 멍에를 매지 않으면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함을 말한다.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가장 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쉼을 얻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무거운 마음은 ‘억울함’ 이다. 또한 세상을 살면서 무거운 짐을 지는 이유는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 때문이다. 비교함을 통해 느끼는 열등감이 억울함이된다. 바로 이런 마음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 즉 십자가는 결코 쉽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다. 힘들고 고난스러운 골고다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길을 두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처참한 고통이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했기 때문에 기꺼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쉽고 가벼운 짐이라고 말씀 하신다. 이런 멍에를 우리가 배울것을 원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갖고 있다.

사업을 하는 어느 집사님을 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사업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사업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사업이 한창 어려워지고 있을 때 심방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집사님에게 도움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런 기도에도 불구하고 얼마후 사업은 완전히 망했다. 하나님의 뜻과 법대로 사업을 했는데 망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집사님은 그 일을 통해 영적으로 큰 회복을 얻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물리적 환경이 더 나아지진 않았다. 대신 그는 마음에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그가 한창 어려웠던 시절 하나님을 원망하고 상황을 시기했던 마음이 다 해결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보상되지 않고 삶에 전화위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가끔은 정직한 나보다 정직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더 형통하는 것을 본다. 억울하다.

사역자들도 그렇다. 목회자들은 작고 사소하고 치사한 일로로 억울함을 갖는다. 신앙이 깊어질 수록 큰 문제는 잘 해결하데 작은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함을 본다. 외히려 작은일에 넘어진다. 작은일에 마음을 상하고 억울해한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데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억울함이 마음속에 깔려있다. 하나님 외에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하나님은 침묵뿐이다. 성경 속에 많은 인물들은 ‘악인들의 형통함’ 을 보며 정말 하나님은 계시는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을 사는 일은 때로는 너무 억울했다. 대표적으로 하박국 선지자가 그랬다. 그는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 것에 많이 억울했다. 하나님은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고백했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신앙생활을 하며 많이 요구하는 부분은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포도나무의 소출과 같다. 양과 소를 구하지만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불편하고 억울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나 보상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박국 선지나는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의 억울함과 모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항의했던 것중 하나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가 봤던 악인의 형통함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바랬던 자신의 보상은 하잘것 없고 하나님 자신을 주신 사랑을 발견한 순간 여호와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는 것은 내가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 자신으로 기뻐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동등하게 교제해 주심으로 인해 믿음의 선지자들은 그 비결을 배웠다.

바울이 험난한 고난과 많은 질시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심령 가운데 기쁨이 가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해결되지 억울함에 대한 기도제목이 있다. 그런 우리의 심령을 십자가 그늘 아래에 무릎 꿇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깊고 넓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어려움과 문제들은 사소한 일이 되고 말것이다. 십자가 그늘 아래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쁨과 힘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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