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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닭 울음소리 (마 26:69 - 마 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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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울음소리 (마 26:69-27:10) 

예수님의 체포와 판결 과정에서 마태는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를 삽입합니다. 신앙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두 제자의 회복과정과 그 삶의 결국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네 신앙을 비춰보고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배반은 한 순간 얼떨결에 일어난 사건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배반의 징조가 있었습니다. 26:5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베드로는 언제나 누구에게도 주님의 옆 자리를 빼앗기려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멀찍이” 따릅니다. 아예 달아나지 않았던 까닭은 체포후의 “그 결국”을 보려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직후부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서 사형 판결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다시 넘겨져 능욕과 채찍질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하실 것과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반복해서 계시하셨습니다(16:21, 20:18-19). 베드로가 그 말씀들을 받아들였다면, 주님의 체포 이후 어떤 결국이 되리라는 것은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돌아가시지 않으시리라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멀찍이’ 주님을 따랐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아직 완전히 식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예 달아나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다른 제자들보다는 한결 나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열정’과 계시된 말씀에 근거한 ‘냉철한’ 상황 판단은 멀찍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천수 같은 뜨거움도 냉수 같은 시원함도 없는 뜨뜻미지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어정쩡한 신앙을 한결같이 경고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반면에 성경은 성도들이 어떤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려는 자세를 가지도록 독려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에 빠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사라져있다면, 혹은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냉철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멀찍이 있을수록 그만큼 죄에는 가깝습니다. 주님과 함께 당당히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고난 앞에서 그분을 부인하기 쉬운 상태입니다. 적극적으로 주님께 헌신하지 못하고 있다면, 죄에 헌신되기 쉬운 상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베드로는 슬며시 바깥뜰에 앉았습니다. 그 때 하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표준새번역, 69). 베드로의 신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통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쉬운 상태에 있었던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말합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70).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버렸습니다. 재판정에서도 자신의 신분에 대해 당당하셨던 주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앞문까지”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주하는 병사를 향해 총탄을 날리는 저격병처럼 거기 있던 하녀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71). 매우 다급해진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말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2) 한층 더 강하게 주님을 부인하면서 베드로는 신앙의 무릎을 굻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향해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표준새번역, 73). 마치 적군에 포위되어 집중사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최후의 비명을 지르듯 “저주하며 맹세하여” 외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 그는 완전히 쓰러졌습니다.

교회사에서 신앙을 배반하도록 할 때 박해자들이 성도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주님을 저주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자부했던 베드로는 가장 먼저 주님을 저주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철저히 파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 하셨고, 또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소망 둘 수 없는 순간, 더 이상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순간, 철저한 실패의 그 순간에 주님의 은혜가 역사했습니다. 74b절을 보십시오.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는 베드로의 회복을 위해 닭울음소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75a). 예수님의 말씀이 한 마디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어도 그 분의 생각과 그분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반복된 경고를 무시하고 깨어 있지 못했음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75b).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닭울음소리’조차 사용하십니다. 어거스틴에게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회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는 억울하게 따귀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어 회개한 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이 외에 꿈이나 다른 사건들도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닭울음소리’ 자체는 아무런 신비할 것이 없으며 그냥 계기일 뿐입니다. 꿈도 꿈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계기’를 통해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는 일입니다. 

신앙의 공격 앞에 맥없이 쓰러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심령이 몹시도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인식하고 심히 애통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회개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닭울음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밤이 물러가고 새벽이 동트는 일이 그 영혼에 일어납니다. 이후 베드로는 실패한 제자로 생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소망두신 대로 교회의 기둥 같이 쓰임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실패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를 신뢰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도록 일깨우는 또 다른 ‘닭울음소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께서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본 것 같습니다(27:1-2). 그리고는 “스스로 뉘우쳐” 예수님을 판값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3).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a).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은전 소리가 베드로의 ‘닭울음소리’처럼 유다의 양심을 찔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러한 계기에서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뉘우치다’(metamevllomai)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회개하다’(metanoevw)는 단어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는 적극적인 방향의 전환의 의미보다는 가벼운 감정적인 후회에 가깝습니다. 두 단어 사이에 별 차이점이 없다고 해도, 유다는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먼저 그가 주님의 말씀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서 애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 행동이 후회스러웠고, 자신이 범한 죄를 스스로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또 다른 증거는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 죄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고자 했다는 점입니다(5).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철저히 깨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깨닫는 일 조차도 ‘닭울음소리’에 의해 수동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시퍼렇게 살아서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책임지려 했습니다. 그 결국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죽음입니다(행 1:18).

성도의 신앙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지 않았다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단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는 우리도, 안타깝지만 전혀 실패하지 않을 수는 없고 어떤 모양으로든 실패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닭울음소리’를 통해 우리를 일깨우실 것입니다. 그러한 계기가 주어질 때 베드로처럼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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