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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불가능의 강은 없다 (수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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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어느 대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왜 믿기 어려운 기적은 자꾸만 믿으라고 하십니까?
  제가 성경은 공부하겠는데
  성경에서 기적 같은 이야기만 빼놓고 믿으면 안 될까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든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가셨다는 이야기,   
부활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빼놓고 성경공부를 할 수는 없을까요?”
이 때 내촌감상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생 성경에서 인간이 이성으로 수락하기 어려운
  그런 기적들을 다 제거하고 성경을 공부하면 성경에서 꼭 두 가지가 남네.”
“뭐가 남습니까? ” “ 이쪽 뚜껑과 저쪽 뚜껑만 남네.”
“왜 그래요?”
“창세기 1:1 성경은 어떻게 시작되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적이지.”
마지막 계21:21절 구절은 어떻게 끝니지? `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 위해 부활하신 그분,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니. 이것이 기적이 아닐까.
기적을 빼놓고 믿으려고 해 봐.
뭐가 남아? 이쪽 뚜껑하고 저쪽 뚜껑하고 남지.”
그렇습니다. 성경은 기적을 배버리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가능의 강 앞에 서야할 때가 있습니다.
홍해가 그러했고 오늘 본문말씀의 요단강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지 못하면 새역사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는가를 통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요단강을 건너야만 이스라엘의 새 역사는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강에 다리가 없습니다. 배도 없습니다.
혼자라면 모르지만 이스라엘 200만이 어떻게 건널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의 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가능의 강을 건너기를 원한다면
여호수아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불가능의 강을 건널 수 있는
        원리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기 위해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기 위해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1절)
1절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불가능의 강을 건넌 여호수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원리는
  그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반복되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주의를 요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무엇이든지 반복되면 그 말씀은 변치 않는 원리가 됩니다.
여호수아 생애 가운데 반복되는 말씀은
      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무너질 때도 수6:12절에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 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
아이성 정복의 실패 후에도 수7:16절에
[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
아이성을 다시 정복할 때도 수8:10절에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 
성경이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반복 기록할 때는
    소위 현대성공철학 - 아침형 인간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는 거룩한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무엇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불가능한 문제를 골돌히 묵상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영적거장들은
    바로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러한 인물입니다.
시46:5절에 [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
시57:8절 [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예수님께서도 막1:35절에
[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새벽을 깨우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은 훈련된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다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가지치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불가능한 강도 건널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 위해 꼭 준수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 위해 꼭 준수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2-4절)
2절에 [ 삼일 수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
지난 번 시간에 그랬지요.
    의논하고 회의할 때는 장로들을 모았지만
    순종해야 할 때는 유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토론이나 이유가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오직 순종해야할 일임을 말합니다.

그 순종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3절 [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 
하나님은 광야생활 가운데서는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널 때부터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의 언약궤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입니다.
언약궤가 앞서 갈 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믿었습니다.
11절에 보면
[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언약궤 안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 십계명의 돌비,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담아 두었습니다.
이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들의 언약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4절에 [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에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
여기에 규빗이란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팔꿈치 밑에서 손끝까지 잰 길이로서 약 45cm입니다.
그러니 이 천 규빗은 약 900m를 말합니다. 
약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900m 앞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천 규빗 거리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바라보고 따라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200만 명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거리가 바로 900m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불가능의 강이 가로 놓여 있을 때
불가능의 강을 바라보지 말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바라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카우보이 같이 우리를 몰아가는 분이 아니라
앞서 행하시는 목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목자를 따르는 양같이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신명기에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방향만 가리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앞서 싸우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신1:30절에
[ 너희 앞에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 ]
하나님은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멀리 보십니다. 전체를 봅니다. 더 세밀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의 인생은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때 불가능의 강도 건널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단강을 건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바로 5절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 왜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할까요?(5절)
5절 [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사를 행하시리라 ]
3일 동안 요단 강가에 유하면서 성결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병법에는 도무지 맞지 아니하는 명령입니다.
차라리 D-day 3일이라 써 붙이고                     
    최종 점검을 하든지 마지막 강훈련을 하든지 해야 할 것인데
그 반대로 3일 동안 조용히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왜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역사는 거룩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혼합되어지면 사람들은 결과를 늘 합리적인 것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멜산 엘리야 제단에도 불로 응답 하는데
    번제물 위에 열두 통 물을 갖다 부어라 합니다.
    왜?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지면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역사하십니다.
혹 나의 삶에 축복을 가로막고 있는 강이 갈라지기를 원하십니까?
인간의 가능성 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  우선 바쁜 것 멈추고
    회개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짐 엘리어트>는
“사탄은 적어도 세 가지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
소음과 조급함, 그리고 군중이다”고 말했는데 백 번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이스라엘들에게서는
    소음과 조급함, 대중주의 같은 것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험난한 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분은
    조용히 천천히 묵묵히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징조와 특징은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위하여 고요한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성현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이 있습니다.
무위에 반대되는 생각이 인위라고 할 수 있는데
무위가 매사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라면
    인위는 사람이 꾀와 솜씨를 보태서 꾸미고 모양내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날은 인위가 너무 성행하여
    오히려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을 잃게 하고
그 타고난 성격을 일그러뜨리는 우(遇)를 범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런 풍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현대인들인지라
오히려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에 두드러진 호기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위도 아닌, 무위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신위(神爲)의 길이다.
인위가 사람의 꾀로 일을 꾸미는 것이고,                   
무위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그냥 두는 것이라면
신위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렘33: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바로 신앙세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때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조용히 스스로 성결케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생각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섯 번 이나 건축하면서 한 번도 돈 가지고 지은 적은 없습니다.
4번째 두류동 교회당 까지는 잘 지어 봉헌했는데
이번 장동 교회 건축은 건축 준공이 11월 7일 날 났는데
    그해 11월 21일에 I.M.F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건축대금으로 약속어음을 발행해 놓았는데 어음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1억 5000만원 수표가 열흘 전인데도 대책이 없으니 세상이 조용해지더라고요.
교회에 엎드려 그저 주여, 주여 한숨 반 간구 반, 이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 주일에 한 집사님을 통해 잘 해결된 것 있지요.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바로 불가능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
                  3일간 스스로 성결하라고 한 시간 같아요.
2차로 또 1억 5천만 원이 돌아왔는데 대책이 없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서문교회를 통해 1억 이성헌 목사님 통장 2천만 원
    성명교회 정준모 목사님을 통해 2천만 원 - 해결된 것 있지요.

우리도 살아가다가 인간적으로 대책이 없을 때
대책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일간 성결케 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너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가능의 강 요단을 건너는데 하나님께서 주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요단을 건너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명령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6절,8절 11-17절)
먼저 6절 말씀 보세요.                             
[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 가니라. ]
8절에 [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13절 [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지리라 ]
여호수아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발로 요단물을 밟으면 요단물이 끊어지리라.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고,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의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믿음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인지
        아니면 시뮬레이션 믿음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뮬레이션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테네의 한 언덕에 있는 고대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신전에는
      예로부터 각 나라에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드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기념으로 그곳의 흩어져 있는 대리석 조각들을 집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리석 조각들을 아무리 집어가도 다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몇 달에 한번 씩 수마일 떨어진 채석장에서 대리석 조각을 트럭으로 가득 실어와     
아크로폴리스 근처에 뿌려놓는 것입니다.
그 결과 관광객들은 그 대리석 조각들을 고대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쩌면
운반돼온 대리석 조각에 희희낙락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가짜 믿음은 가짜 인생을 만듭니다.
말씀 앞에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믿음은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4절 이하 말씀에서                               
놀라운 사실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서 발을 요단 물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요단물이 갈라 쌓이고 제사장이 앞서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가능의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불가능의 강을 건너면
  수많은 다른 사람에게도 불가능의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그런 면에서 앞선 자들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보고 자랍니다.
앞장 선 지도자의 믿음은 사람들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육상경기에 있어서 가장 뛰어넘기 어려운 기록은
1마일 경주에서 마벽의 4분대였습니다.
인간이 4분 이내에 1마일을 달린다는 것은
    당시 보고에 의하면 도저히 물리적인 힘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54년 <로저 베니스터>라는 의학도가
    4분 이내에 1마일을 주파했습니다.
그날 이후 1956년까지 무려 213명이 4분대 벽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선수들 까지 이 기록을 달성합니다.
어떻게 이 기록이 달성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의 믿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짐을 믿습니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믿음을 심어주는 줍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불가능의 강을 건너게 할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으로 말한다면
    바로 히11:2절에 믿음의 선진이라고 합니다.
              선진이란 앞서가는 자를 말합니다.

요단강 건넌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할까요?
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7-10절)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7절에 [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어려운 역경을 통해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 주십니다.
오늘 교회가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불가능의 강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선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들 목전에서 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가능의 강을 만날 때                     
믿음으로 설 수 있는 영적 거장들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항사 역사가 토인비 말대로
      믿음의 창조적 소수를 통해 세계 역사를 주도하십니다.

2) 10절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심을 나타내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입니다.
12절에 보면
[ 이스라엘 지파 중에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 고 합니다.
왜? 열두 명을 택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후에 4:19절 이하 말씀에 보면
그 열두 명이 요단강 가운데 있는 열두 돌을 취하여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후일에 너희 이 돌이 무슨 뜻인냐? 묻거든
24절  [ 이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케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은 10절에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 주신다는 징표로
      눈앞에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부도를 막아주실 때
        제 마음 속에 확신과 용기가 오더라고요.
        내일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교회다. 할렐루야!
기적은 더 큰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의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 에 걸려서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5개월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책을 썼 습니다.
<디바인 예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예`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예`가 있을 뿐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 게 부탁했답니다.
자다가 일어나면 자기에게
[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 고 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는 말씀이
      귀에 확실하게 들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실로 그는 그렇게 듣고 그는 일어났고
그 후 20년 동안을 계속해서 선교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불가능의 강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여호수아 제사장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내일교회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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