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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독 핍박하는 이유는? (행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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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상한 세상입니다.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도 그렇다 보니까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흔히 짝퉁이라고 말합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방 회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고객이 A/S를 맡겼습니다. 분명 자기네 제품과 똑같은데 자세히 보니까 가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놀란 것은 가짜가 진짜보다도 더 정교하고 질도 더 좋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확인을 해 보니까 한국에서 만든 짝퉁이었습니다. 그래 그 회사 사람이 한국까지 와서 짝퉁을 만든 회사를 찾아냈습니다. 당연히 붙잡아 고발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줄 알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의외로 계약을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계약이냐고 했더니 이제부터는 짝퉁이 아니라 정식으로 자기들과 계약을 해서 자기들에게 납품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짜가 진짜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을 가리켜 짝퉁 천국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짝퉁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아주 대놓고 백화점에서조차 짝퉁이라며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항의도 못합니다. 워낙 중국 시장이 크다 보니까 괜히 시비했다가는 전혀 중국에는 발도 못 디딜까봐 짝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도 말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짜가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가 진짜를 핍박합니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려고 하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부터 이고니온으로 온 바울과 바나바는 여느 때처럼 유대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믿었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오랫동안 이고니온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표적을 행할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은혜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한쪽은 유대인 편을 들고 다른 쪽은 사도들 편을 들었습니다.

분명 바울과 바나바가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표적을 행할 능력을 주셨고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은혜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추겨서 형제들을 대적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유대인 편을 들고 다른 쪽은 사도들 편을 들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기에 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듣는 이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기적과 표적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해도 그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표적과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러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예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를 보여주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다 고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누가 했습니까? 물론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렸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문둥병자 나아만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문둥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모두가 다 인정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그들도 인정을 했고 그래서 열왕기와 역대기에 다 기록이 됐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이 하실 때는 아니라고 합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기적과 표적이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져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보는 것조차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못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주님의 말씀 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의지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요 더욱 말씀으로 무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아무리 악한 마귀가 말씀을 들을 때 믿지 못하도록 훼방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에 작정을 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저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선택한 사람을 우리 마음속에 품게 만드시고 그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시고 때를 기다려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선택한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던지 간에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낙심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이 믿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에게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친밀한 교제를 이루어나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그 사랑 안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도록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선택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함께 하나님을 섬겨나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복음이 핍박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유독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토록 핍박과 어려움이 닥쳐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그렇게 심한 반발을 하지 않습니다. 뭐 부처를 믿는다던가 유교를 믿는다던가 아니면 천주교를 믿는다던가 할 때 별로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 굿을 한다던가 점쟁이를 찾아간다고 해서 비난하는 사람도 별고 없습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들이 불교나 유교나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도 않습니다. 한데 유독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그렇게 힘들게 합니다. 거기다가 집안에 무슨 우환질고라도 생기면 꼭 하는 말이 그건 교회를 다녀서 그렇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단순히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단순히 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조상의 뜻을 기리고 더 아름답게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하는 것일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를 않습니다. 그때 로마의 정책은 자기들이 점령한 땅에 그 어떤 종교가 있든지 자기들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어디서 살든지 유대인의 회당을 세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허용을 했습니다. 다른 종교들이야 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니까 그렇다고 해도 유대교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우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조차 앞장서서 기독교를 대적하고 그토록 힘들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종교가 다 그렇듯이 유대교 역시 행위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내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 앞에 절하며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그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유대교는 비록 우상은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해야 하고, 왜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며,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고 끊임없이 사랑의 손길을 펼쳐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생이 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죽어 주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나의 모든 죄가 다 용서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악한 마귀는 이걸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두었다간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왜 너희들만 유독 그렇게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같은 길을 가는데 왜 너희들만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그 자리에 주님도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리입니다. 나와 너 우리가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하나가 되어 살아갈 때 주님이 함께 계시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아닙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가지고도 우리가 마음 상하도록 만들고 서로 시비하도록 만들려고 얼마나 수작을 하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우리가 속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왜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까? 왜 끊임없이 베풀어 주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 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먼저 내가 살고 봐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향락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젊을 때 인생을 즐겨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먼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생각할 때 자식이 무엇을 해 주어서 자식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먹을 것이 없어 비록 굶을망정 자식에겐 먼저 먹이지를 않습니까? 내게 있는 마지막 하나까지도 더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식보다도 내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이 있고 나서 자식도 있고 남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 풍조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내 인생도 중요합니다. 내 수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내 길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많은 것을 모아들여도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면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 수고만으로 할 수 있다고 사탄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좀 더 쉬운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가기가 쉬워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길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생명으로 가는 길이 정말 그토록 힘든 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도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한다면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간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를 축복하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서로를 섬기는 일에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이상하게 본다고 해도 그래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소위 왕따를 시킨다고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과 한 패가 되어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며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의 두 도시인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처의 마을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위축이 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곳을 피하십시오. 오직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시며 서로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며 서로를 세워나심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에 베푸시는 은혜로 풍족히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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