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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있는 사람 (눅 15: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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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는 사람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1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세리를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며 죄인 취급을 했지만 예수님은 평소에 이들을 배척하거나 멀리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을 영접하고 이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와 죄인들이 자신에게로 나오는 것을 기뻐하시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그 비유의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며, 둘째 아들인 탕자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아버지를 떠나 사는 탕자입니다. 로마서 3:10을 보면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사람마다 그 차이가 있을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8:5이하를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영의 생각입니다. 더구나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영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8:7~8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영을 좇아 영의 일을 할 때도 있으나 육신을 좇아 육신의 일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생각에 좀 더 치우쳐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영의 생각을 좀 더 많이 하며 살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탕자와 같이 아예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처럼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집을 떠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면 완전히 믿음을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이 소재한 도시에서 수도원 학교를 다닐 정도로 신앙이 투철하고 부모님의 믿음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찬양을 잘해서 소녀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려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잘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부분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에는 비교적 예수님을 잘 믿다가 고등학교 때 입시공부에 매달리다 보면 신앙마저 흔들리고, 대학생이 되면 자유로운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히틀러도 청년의 때에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국가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웅변에 능한 그는 청년들을 선동했고, 애국심에 호소하며 대중 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후 총통 겸 수상으로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독일 민족에 의한 유럽의 재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을 수립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독일은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한 인간에 의해 전 유럽과 독일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나치스의 마크는 매우 독특한 문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양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끝부분을 꺾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 뜻대로 호령하려 했던 그의 권세도 십 년, 이십 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되자 불행하게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단코 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인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가진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궁핍한 몸이 된 그는 들에서 돼지를 치는 고달픈 일자리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실컷 먹고 주린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 조차도 주는 사람도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너 같은 인간이 살아서 뭐하겠느냐 차라리 죽어버려라.”라고 속삭이는 사탄의 거짓말에 결단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탕자도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탕자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는?
1.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그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럴 때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어느 실험실에서 빛을 차단한 어두운 독에 쥐들을 집어넣었더니 3분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독에 한줄기의 아주 작은 빛을 비추어 주었더니 쥐들이 36시간 동안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쥐들이 독 안에서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은 체력이 다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으로 죽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영국군과 미군 포로 20,000명이 수용되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무려 8,000명의 포로가 죽었는데 그 사인이 영양실조나 질병이나 과로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품군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탕자가 곤궁한 중에서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은 죽는 길이나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살 길입니다.
말레이시아에 파송된 이순희 선교사는 경주의 양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양동은 우리나라에서 손 안에 꼽히는 양반들만 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나라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몇 백 년 된 고가의 집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마을에 이씨 가운데서도 이순희 선교사 집은 종가 댁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교사는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어른들로부터 매도 많이 맞고 욕도 수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정없이 매를 맞아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으나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가 댁인 이 가정에는 깊은 슬픔과 절망의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이때 학교를 다니던 이 선교사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동생이 살아요. 죽지 않고 꼭 살아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살려준다면야 무엇이든 못하겠니 네 동생이 꼭 산다면 믿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선교사는 “할아버지! 기독교는 그런게 아니예요. 믿어야 살지, 살려주면 믿는게 아니예요. 할아버지가 교회에 나와야 우리 동생이 살아요. 할아버지가 믿으셔야 우리 가정의 환난이 끝납니다”라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하시던 할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돌아가신 조상 보기에는 송구스럽지만 조상보다 살아 있는 이 가정의 손자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온 가족이 교회를 나왔고 동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 동생이 지금은 목사가 되어 LA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품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저주가 끝납니다.

3.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둘 다 배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어느 가정의 아들이 대학에 가더니 그만 신앙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부모는 그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남북전쟁이 터지고 청년들이 군에 갈 때에 이 청년도 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권세 있는 집안이라서 아들을 군에 안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열심히 훈련을 받던 아들은 어느 날 전투중에 큰 부상을 당하여 군대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좋은 병원으로 옮기지도 않고 기도만 했습니다. 청년은 비로소 죽음을 앞두고 회개했습니다. 군목에게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살려주시면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후에 그는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템플대학을 세우고, 템플침례교회를 설립하고 종합병원을 세 개나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기독교 교육가로 유명한 ‘러셀 콜 웰’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타락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던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한없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가복음 15:7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탕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멀리서 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며 반갑게 영접해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라고 머리를 조아렸으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못들은 체 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추궁하거나 잘못을 책망하지도 아니하십니다. 본문 22~23절을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에 아들만 봐도 기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17).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주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끝까지 용서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 백성들과 같이 악독한 사람들도 그들이 회개했을 때 용서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지만 용서해주셨으며, 다윗의 큰 죄도 용서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삽니다. 여러분 중에 탕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속히 하면 할수록 축복입니다. 늦게 하면 그만큼 손해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기억도 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겨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너무 기뻐한 나머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온 동네에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이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결심이 굳고 의지가 강해도 우리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항상 깨어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 할 때 우리는 또다시 탕자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서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면류관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필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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