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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 되신 왕의 섬김 이야기 (막 10:45, 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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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신학자인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말씀이 막10:45 말씀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섬기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섬기려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입니다.

  저는 2000년 7월 영국 케직에서 열린 케직 사경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모인 수 천명의 영국 성도들이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이란 복음 찬송을 온 몸으로 뜨겁게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This is our God the Servant King"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이 구절이 얼마나 저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는지 모릅니다. 그 후부터 저는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이란 복음 찬송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난 월요일 오후 차를 운전하며 교회에서 집으로 일찍 돌아가는 길에 저는 혼자서 그 찬송을 흥얼거리면서 불렀습니다. 이승일 목사 가족이 월요일 저녁 필리핀으로 떠나기 때문에 좀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This is our God the Servant king" 이 구절을 반복하며 불렀을 때 저는 또 다시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 되셨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 되셔서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어루만지시며 섬기셨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종이 되신 우리 주님은 잡수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셨는데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종이 되라고 섬기라고 설교만 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저의 가슴과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신음 소리로 변했습니다. 차 안에서 소리를 내어 흐느끼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맛있는 것 사 먹기를 좋아하는 내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동태 전골도 좋아하고 삼겹살도 좋아하고 보쌈도 좋아하는 내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무엇을 사 먹고 들어가면 좋을 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싸고 제일 소박한 것을 사 먹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잡수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반찬도 없이 밥을 먹는 우리 교회의 몇몇 아이들을 생각했을 때 내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결국 나는 김밥 집 옆에 처를 세웠습니다. 한 줄에 천원 하는 김밥 한 줄을 사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줄에 이천 원하는 김밥을 한 줄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차를 타고 오면서 김밥 한 줄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종 되신 왕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이천 원짜리 김밥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부끄러운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이번 주에는 억지로라도 무슨 섬기는 일을 좀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교회와 외국인 노동자 교회에 전화를 걸고 내가 가서 노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나는 지난 금요일 강변교회 성도들 15명과 함께 광야교회에 가서 450여명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이 그날 너무 추웠는데 점심도 먹지 못하며 식사 준비와 배식을 하느라 수고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를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과 사역의 모습을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역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모습(style)의 삶을 사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목사와 선교사의 귀한 사역을 하면서도 부자와 같은 부요한 모습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와 선교사의 귀한 사역을 하면서도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좋은 음식을 먹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화려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런 스타일의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실 집도, 사실 집도, 쉬실 집도 없었습니다. 태어나시자 마자 쫓겨 다니시며 피난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예수님은 잡수실 음식이 없어서 밀 이삭을 잘라서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는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고 지적했습니다. 가난을 예찬한 성 프랜시스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을 닮으려는 간절한 소원이 프랜시스로 하여금 가난을 예찬하게 되었고 가난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동휘 목사님은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정하고 한 평생을 목회를 하셨습니다. 우리 동혁이는 친할아버지인 이동휘 목사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친할아버지 집은 가난한 것 같아. 그래서 교인들이 된장 같은 것을 선물로 가져오나 봐.” 우리는 성 프랜시스나 이동휘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한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 분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의식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가난한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밑바닥의 삶을 사셨습니다.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끌려갔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가야바에게로 가니"(마26:57).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 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 바닥으로 때리며"(마26:67).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희롱하고 침을 뱉고 머리를 쳤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26:28-30).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메시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사53:3).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저는 대학생 때 메시야에 나오는 이 가사를 묵상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Despised and Rejected. 이것이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삶의 스타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삶을 사셨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밑바닥의 삶을 사셨습니다.

  둘째,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사역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사역은 설교 사역이나 목회 사역이나 신학교 교수의 사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존경을 받는 좋은 자리에 앉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몸으로 병자들의 몸을 어루만지며 치료하시는 긍휼과 치유와 섬김의 사역을 주로 하셨습니다. 사실 병자들의 몸을 만지는 일은 유쾌한 일도 아니고 기분 좋은 일도 아닙니다. 더욱이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는 일은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천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가까이 가기도 싫어하는 문둥병 자들의 몸을 만지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한 문둥병 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8:2,3). 오랜 후에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은 만지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4,15).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을 때 예수님은 저들의 눈을 만지시며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 회당장의 딸이 죽어서 집에 누어있었을 때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으로 가서 죽어서 누어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므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라”(막5:41,42). 귀신 들려서 자주 땅에 엎드러지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그를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막9:27).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6).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대부분의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저들의 병든 몸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는 제자들의 발을 친히 손으로 씻어주시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5).

  예수님은 또한 먹을 것이 없어서 기진하여 쓰러질 광야에 모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음식을 먹이시는 음식 제공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막8:2,3). 광야교회에서 매일 450여명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 봉사의 사역과 비슷한 사역이었습니다.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사역은 철두철미 병자들의 몸을 어루만지며 치료하시는 긍휼과 치유와 섬김의 사역이었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는 음식 제공의 봉사 사역이었습니다.

  셋째,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라고 분부하신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5-27).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마10:9,10).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0-12).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사역의 모습은 주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너무나 부요하고 너무나 풍족합니다. 너무 높은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너무 힘이 강해졌습니다. 아마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종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섬기는 섬김의 삶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지극히 가난하고 수고로운 삶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성도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피를 쏟아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1:1).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전4:5). "내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빌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디1:1).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허비하리니"(고후12:15).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채우노라"(골1:24).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 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나”(고후11:27).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종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또 한 사람은 성 프랜시스일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버림과 청빈을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나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사람은 형제단에 들어 올 수 있다. 거친 수도복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불의한 재물을 버려야 한다. 남을 헐뜯고 미워하는 악마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세상을 즐기는 쾌락을 버려야 한다. 사람을 속이는 거짓을 버려야 한다.”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지식과 학문도 버렸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또한 모두를 사랑하는 동정과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동정하고 품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마땅히 섬겨야 할 주인이었고 특히 문둥병자나 버림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산적 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아니 이단들에게도 미쳤고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아니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는 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귀신이 쫓겨가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기적을 그의 전도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만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기적은 모두 그의 사랑에서 비롯한 부산물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종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또 한 사람은 손양원 목사일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냈다. 틈만 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다. 보통의 나환자들보다 훨씬 병이 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14호실이다. 아버지는 14호실 환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많이 쏟았다. 환자들이 거부하는데도 그들의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피고름 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자주 스스럼없이 나환자들과 어울리는 아버지였기에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극구 사양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피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피가 더 맑다는 것이다. 검사 결과를 전해 들은 아버지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그래? 그러면 이번에도 틀린 건가?' 할 뿐이었다. 자신의 나병 감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손양원 목사는 또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종 되신 왕 우리 주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삶과 사역에 비추어볼 때 우리들의 삶과 사역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프랜시스와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와 손양원 목사의 섬김의 삶과 사역을 바라보시면서 만족의 웃음을 웃으셨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소원은 우리도 섬기려고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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