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욘 4:6-11)

  • 잡초 잡초
  • 453
  • 0

첨부 1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우리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히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창조하였고,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켜 인간들의 죄를 없이 하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귀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시키시는 방법을 잘 살펴보면 매우 조심스럽고도 단계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흙으로 지으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체험하셨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나의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거나 모르신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아니 내 자신보다 나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선한 방법으로 가장 결과가 좋도록 인도해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선한 인도하심이 요나에게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잘못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고, 어리석은 고집을 고치기 위해서 요나의 성난 발악을 한 번도 노하신 음성으로 야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시종 타이르는 부드러운 자세로 교육하시는 일에 일관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설교제목처럼 '세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본문에는 요나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요나의 환경에서 접하는 두 가지 사물을 통하여 인도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하나 까지도 교육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자신의 구원 목적을 위해서 택한 자녀들을 간섭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6-8절).

세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1.박 덩굴을 통한 교육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본문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라고 하였으나 요나의 태도에 대하여 본문 이전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나서 4장 1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이런 태도를 보인것 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신 사실로 인한 것입니다. 요나는 단지 니느웨가 이스라엘의 적대국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무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 성읍이 구원받은 기쁜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드러냈습니다다. '심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그돌라'는 문자적으로 '큰 악'(a great evil)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는 이 단어가 니느웨 사람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줄곧 사용되었지만 4장 1절에 와서는 요나의 심령상태를 나타내는 특성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분노를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런 악한 모습을 나타내는 요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간섭하고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롬8:31절에 "그가 너희를 위하시면"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위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자신의 의지로 찾아와 하나님의 음성은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해서 니느웨와 정반대인 다시스로 향한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갑자기 만난 폭풍우와 풍랑에서 배에 탄 사람들이 '누군가 신의 노여움을 받은 사람이 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제비를 뽑아 가려내기로 하였는데 요나가 뽑히게 된 것이었고,??바다 속에 던져 졌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스올'이라는 큰 고기에 삼키게 된 것이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했을 때 자신을 토해 놓은 땅이 니느웨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는 적국이었던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구원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요나에게는 전말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사흘 길을 성에 다니면서 "40일 후면 이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며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성이 멸망하는 과정을 보기위해 자신을 위해서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깨닫게 만들기 위해서 박 넝쿨에 벌레를 준비하사 줄기를 씹어 죽게 하였고, 뜨거운 햇빛과 동풍을 통해 초막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요나서 4장 3절에 요나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원방했습니다. 요나가 호소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온 감정적인 표출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드렸던 말씀을 의도적으로 흉내 낸 듯처럼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과 선지자로서 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체험한 하나님과 이 세상의 질서는 너무 괴리가 심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저의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더 살아서 무엇합니까?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깨달음이 있게 해주십시오." 그만큼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목도 하면서 세상 현실에 대해 상당한 괴리감을 맛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 덩굴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박 넝쿨을 준비하사...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라는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면 요나는 이미 초막을 지어서 그늘을 만들어 두었기(5절)때문에, 박 넝쿨의 그늘이 주는 시원함으로 인해 기쁨을 맛보았다기보다는 녹색 식물성 감상하며 그로 인해 기뻐한 것이 분명합니다.

"준비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만'은 '정하다.','제공하다.','준비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로, 이미 '물고기'(1:17)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본문맥과 관련하여 '박 넝쿨, 벌레(7절), 바람(8절)'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주권과 결정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원래 목적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심판에 처하지 않고 용서해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박넝쿨의 교훈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더위로 부터 요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간섭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지 모릅니다. 마치 박 넝쿨의 사건은 우연인 것 같지만 우연이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뜻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우연도 없습니다. 마치 건축가가 대형 빌딩을 짓기 위해 복잡한 설계도를 일일이 그려놓고 건축해 나가듯이 하나님의 선한계획에 의해 치밀한 설계에 의해 진행되어져 나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는 기쁜 일들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져 가는 것도 단지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결코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아침 일찍 누우며, 저년 늦게 누우며, 수고하는 것이 모두 허사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슬픔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슬픔도 허락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찾아 온 고통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특수교육 연구소의 '김일권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비교적 무난하게, 적절한 속도로 부흥시키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뇌성마비의 딸아이를 주셨습니다. 결국 그 아이로 인하여 그는 목회자로서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그는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의 정성으로 뇌성마비인 딸아이를 정상으로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개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라 이 땅의 불행한 뇌성마비 아이들을 한 특수 교사가 되는 것이었음을 그는 고백했습니다. 결코 고통은 불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뜨거운 동풍을 통한 교육을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요나는 불평했습니다.

박 넝쿨의 잎이 벌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초막도 뜨거운 동풍으로 말라 버려 그늘이 없는 상태에서 뜨거운 바람과 태양은 요나를 더욱 괴롭게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라고 하였는데 소위 '시로코'라고 불리는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었습니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여 열대아의 밤을 만들기도 하며,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도 까다로워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아무 이유 없이도 서로 싸우며, 온갖 초목은 메말라 버리기 마련입니다.

오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본문에 요나에 대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교육방법은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방법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박 덩굴은 벌레가 줄기를 씹어서 죽게 하셨고, 뜨거운 낮에 초막의 그늘도 없는 곳에 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뜨거운 동풍을 보내었습니다.

따라합시다. "고통은 깨달음의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이성과 양심과 영혼이 무디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깨닫지 못하고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모르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해도 독생자를 보내시어 나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박 덩굴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습니다. 알려고도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이 망하는 것을 자신이 원했기에 니느웨로 가지 않고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었으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읍까지 물고기에게 역사하사 토해 내게 하시어 니느웨에 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니느웨 성이 멸망받기 원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은 전하기는 했지만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인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기 원하는 자신의 뜻에 동의해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을 심판하여 그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돌이켜 그 성의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시키는 일에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박 덩굴을 벌레를 보내시고, 뜨거운 동풍을 보내셔서 식물의 생명이 귀하듯이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려고 박 넝쿨을 죽게 하시고 동풍을 보내어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요나는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생각을 모르면 원망 밖에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원망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의 자기 푸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는 자는 우매한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원망은 마귀가 찾아오는 징검다리요, 불평은 지옥을 가는 고소도로요,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은 옥토의 밭에 뿌려지는 사탄과 마귀 원수의 가라지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요나에게 박 덩굴을 주신 목적은 햇빛에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이성을 되찾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을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고 형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곤고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육방법이 놀랍지 않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교육을 하십니다(9-11).

하나님께서는 일연의 시험 과정을 거친 후에 요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셨습니다.
9절에 "네가...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헤이테브 하라'는 앞에서(4절)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보고 성냈을 때, 질문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박 넝쿨이 시들자 이것도 못마땅하게 여긴 점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한 이 표현은 요나의 극도로 화가 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보면, 뜨거운 시로코 바람과 태양열로 인해 요나가 화를 낸 이유가 넝쿨이 제공하는 그늘이 없어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요나가 '초막'을 지은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단지 그늘 때문에 그러했다고 볼 수는 없고, 녹색 식물을 바라보는 기쁨을 상실한 것에 대해 분노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는 자신의 유익이 사라지자 성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화낼 이유가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인간들과는 달랐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다고 생각할 때 가차 없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배반 중에 있는 자식이라도 변함없이 살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나를 보면 그는 선지자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나님께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꼭 같이 처신하는 엄연한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서, 불끈 치밀어 오르는 성난 말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는 사실에서 요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자가 축복을 받을 때, 이웃의 라이벌이 되는 사람이 잘 될 때 나의 솔직한 감정은 어떠합니까?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자의 인기를 볼 때 나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요나의 경우 자신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푸념했습니다. 신경질은 인격체의 노폐물이다. 신경질적인 성냄은 아무리 명분이 합당해도 우리의 생활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점을 고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해서도,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세밀하게 배려하셔서 교육을 하십니다. 박 덩굴은 요나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저절로 생겨난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박 덩굴이 생겼다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혀 무관심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요나는 다만 박 덩굴 자체에만 만족했습니다. 영적교훈을 몰랐습니다.

나의 박 덩굴은 무엇일까? 건강, 재능, 명성, 부모, 처자식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박 덩굴은 언젠가 시들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니느웨이 성에는 당시 약 12만명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11절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라고 한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에 대한 해석은 주로

1) 니느웨의 모든 인구를 가리킨다는 해석과
2)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유아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또한
3) 이 두 견해를 종합한 해석으로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아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합니다. 즉, 인간적인 관점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듯한 사람들의 부류를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시는 관심이 어떤 것인지 잘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과연 12만명의 생명이 귀합니까? 아니면 생명 없는 박 덩굴이 더 귀합니까? 요나는 시들어 버린 박 덩굴이 귀하게 여겨 그 덩굴을 죽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만하면서도 심판받을 니느웨이 성의 영혼들을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12만명의 생명의 가치는 박 덩굴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식물이 아무리 귀해도 인간의 생명이 더욱 더 귀하지 않습니까?

10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아꼈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세타'의 원형 '후스'는 다음 절에 나오는 '아끼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는 요나의 내적 상태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교훈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나가 하찮은 박 넝쿨을 아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니느웨 성의 사람들을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그런데, 그까짓 박 덩굴 하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1절에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과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철회한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니느웨가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은 유대인의 우월주의를 반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민족적인 제한이 없는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암 9:11,12; 행 15:16-18).

요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한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교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금년 한 해해를 시작하면서 태신자들을 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정기도를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요나처럼 가기 싫은 발걸음이라도 옮겨야 합니다. 나의 뜻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신앙이 되시고, 내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시고, 무엇보다 생명을 귀하게 여김으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