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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기쁨(가치관의 발견) (마 1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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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이 기운이 다 빠진 채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복음을 위해, 구원을 위해 피를 토하듯 외치고 전해도 실제로 심방하며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10원 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뭐 좌 중이 폭소를 터뜨렸지만, 웃고 난 후에는 왠지 씁쓸함이 밀려 왔습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적인 기쁨을 소유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그가 거룩해지고자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이 세상에 생명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가지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삶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주의 말씀을 붙잡고 오늘도 주님의 성품을 닮으려는 거룩한 소망을 가질 때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구원받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옛사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마치 탕자가 오랜 세월 방탕한 생활로 젖어 살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에겐 여전히 방탕한 생활 속에서 가졌던 음주벽이나 상한 몸이 순식간 씻은 듯이 나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 역시 아작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새 성품과 함께 옛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와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달라야합니다. 전에는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처럼 땅의 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모를 때에는 세상의 힘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알고 거기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을 가지니까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보는 자세가 달라지고, 기도, 찬양, 물질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기쁨이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이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릴까요?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버릴까요?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사와 생각들이 세상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로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고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서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비유와 값진 진주를 찾아 낸 사람의 비유, 이 두 가지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시면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남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가 밭을 일구고 있을 때 무언가 그 밭 속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어보니 밭 속에 항아리가 있는데 항아리 안에는 보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항아리를 다시 묻고 집에 와서 모든 물건을 팝니다. 판돈으로 그 밭을 사서 밭의 숨겨진 보물을 자기 소유로 삼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귀한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구하기 어려운 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팔고는, 판돈으로 발견한 그 크고 좋은 진주를 소유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바로 밭에서 농부가 발견한 보물과 같고 진주 상인이 발견한 귀한 진주와 같다는 것입니다.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전쟁은 잦고 은행은 없었기 때문에 부자들이 보물들을 자기 소유의 땅속에 깊이 묻어서 숨겨 두곤 했는데, 묻어두고는 그냥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삽니다. 어떤 것인들 소유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사연이 있는 물건이 없었겠습니까?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미친 사람 소리 들으며 가장 소중한 것까지 팔아버리는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소유한 기억과 사연, 값나가는 모든 물건보다도 밭에 있는 보물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팔고 사는 도매상에게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유한 진주 중에서도 요긴하고 소중한 보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정성을 쏟았을 것이고, 또 팔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설득도 하고, 먼 곳까지 찾아가야만 얻을 수 있었던 진주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상인에게는 보석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소중한 진주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소유를 다 팔아버립니다. 왜냐하면 '극히 값진 그 진주'야 말로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죄로부터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더불어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동행해주시는 것의 가치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나라를 바로 대하게 됩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바로 대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 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주는 유익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947년 봄, 무함마드 앗디브라는 타아미레족의 베드윈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서 여리고 남쪽 13.6km 지점의 사해서쪽 해안을 돌아다니다가, 심심풀이로 많은 동굴 중에 한 군데에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던진 돌이 동굴 속으로 굴러 들어가 쨍그랑 소리를 내었습니다. 소년이 동굴 안에 들어가 보니 여러 개의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항아리에서 글이 쓰여있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서 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는 그 가죽으로 신발 끈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2년쯤 그냥 두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20파운드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후에 두루마리의 가치를 알았던 히브리 대학교 수케닉 교수가 3개를 샀고, 그의 아들 야딘은 아버지가 사지 못한 나머지 5개의 두루마리를 25만 불을 주고 구입하였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성경의 가치와 하나님 말씀 전승의 신비를 더하는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본인 사해 사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두루마리 성경을 신발 끈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소년에게 사해사본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정말 훌륭한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잘 구별이 안됩니다. 사람은 그래서 잘 속습니다. 보물의 가치를 아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면 귀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의 보물 정도일 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말 인생의 영원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놓치는 것이 얼마나 인생에 치명적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겉모습만 보고 말씀 안에 있는 진정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을 잃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요한복음 1: 9-11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왔지만 그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스스로 구원의 길을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22절에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 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청년과 대화 중에 이렇게 제안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직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청년에게 그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떠나 버렸죠. 그 젊은 청년에게는 주님이 많은 재물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 있는 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여기 44절을 보세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46절도 보십시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여러분!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농부가 그 가치를 알지 못했다면, 상인이 귀한 진주를 보았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몰랐다면 모든 것을 팔아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에 보물을 발견한 농부를 보십시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자신이 낮에 일하다 보

았던 그 어마어마한 보물 항아리가 천장에 왔다갔다합니다. 그 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밭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영감님 저 건너 마을 비탈길에 있는 그 밭 말입니다. 제가 오랜 시간동안 그 밭을 일구다보니 그 밭이 내 자식놈처럼 사랑이 들고 정이 들었습니다. 이제 제 나이도 들어가고 하니 밭 마지기 정도는 가져야 되겠다 싶어서요." 주인님이 허락하시면 그 밭을 제가 이제 샀으면 합니다. 그리고 값을 부르는데 터무니없이 값을 부릅니다.
그래도 어떡하겠습니까? 흥정이 되어 계약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건너 마을 비탈길에 있는 밭을 샀다구. 내일이면 송아지도 팔고 집도 팔구 가재도구 다 팔아야 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내가 펄쩍 뜁니다. 이 양반이 퇴약볕에서 오랫동안 일하더니 머리가 돌았나보다고. 그리고 아이들은 길길이 뛰면서 우리는 어디서 살아?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더니 송아지를 몰고 밖으로 나갑니다. 복덕방에 집을 내놓습니다. 가재도구까지 다 내다 팝니다. 주섬주섬 돈을 챙기더니 영감님을 찾아가 마지막 남은 돈을 다 치루었고 계약문서를 받아 들었습니다.

진주장사의 예도 살펴볼까요? 자기가 찾던 값진 진주를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주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 겨우 살 만한 것입니다. 어쩌면 돈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는 고가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비장의 진주들을 봅니다. 돈이 아니라 일평생 수집한 골동품과 같은 것입니다. 진주 하나하나에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죽음의 위기도 넘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팔 수가 없는 돈 이상의 가치를 포함한 바로 자신의 지난날을 설명해주는 보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진주를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진주를 삽니다.

밭의 보화와 진주의 주인은 가치를 아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갖기 위해서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희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왜 보화와 진주를 사야만 했습니까?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리는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삶에 구원의 가치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데 대한 가치를 알고 내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기 재산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자들의 밥이 된다할지라도, 왕궁 뜰의 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어 죽어간다 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간직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우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그렇게 희생을 많이 치루면 누가 그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농부가 보물을 발견하고는 집에 가서 물건을 팔 때 갈등과 괴로움으로 하였습니까? 진주장사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진주를 팔아버릴 때 괴로워하고 억울해했습니까? 아닙니다. 농부와 장사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고,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를 믿을 때 인생이 바뀐다는 사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잠시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유익은 장차 올 모든 영광과 비교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얼마나 우리의 삶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세속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고 그것들이 영원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 사고에 익숙해지면서 인스턴트 문화가 자리잡고 이에 따른 가치관의 변질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물이 있습니까? 그것이 진짜 보물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엉뚱한 것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살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보물로 알고 그 천국을 이루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 때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하늘의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이번에 부산에서 열렸던 한 영적 훈련집회에 우리 교회 부 목사님들과 함께 3박4일 동안 다녀왔습니다. 해운대에 있는 에이펙이 열렸던 벡스코에 8000천 명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늦게 나오면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기다리다가 입장을 합니다. 나는 조국 한국 교회가 다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열어서 밤 11시가 가깝도록 집회를 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제 인생에 있어서 믿기지 않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화장실도 '나라비'를 서야 하는데 제 앞에 분이 뒤돌아 서는 순간, 저는 가슴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저의 여동생의 남편, 그러니까 매제를 화장실에서 만난 것입니다. 제주도에 사는 데 집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도저히 제 판단에는 죽었다 깨도 이런 곳에 안 올 사람인데 와 있습니다.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왔나고," 아내하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제 동생은 적당히 믿어야지 다른 사람도 안 가는데 굳이 가야 하냐고," 그 소리를 뒤로하고 여기까지 비행기 타고 돈을 써가며 온 것입니다. 완전히 꺼꾸러 됐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남편이 믿음이 없다고 한탄하던 동생하고 꺼꾸러 된 것입니다. 목사인 저 한테도 설교를 합니다. "형님, 예수를 믿으려면 바르게 믿어야지요. 내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 순위가 아닙니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속에 이상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사보다 낫다.) 평소에는 말도 잘 안 하는 사람이 변소간에서 설교를 합니다. 오줌은 마려워 힘이 드는데, 형님, 저는 아침에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 마치고 여기 6시에 와 줄을 섭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한번 뜨겁게 목사님 말씀 앞에 내 인생을 걸어 보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상상도 못했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분의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군 생활에서도 보면 대령으로 있다가 별을 달게 되면 50가지 이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숱 가락부터 별이 붙습니다. 예우와 특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즘 좀 부진하기는 하지만 박찬호 선수의 몸값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LA다저스에서 텍사스로 이적하면서 6년 계약에 906억을 받았습니다. 평균 연봉은 우리 돈으로 156억 원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얼마짜리입니까? 연봉이 얼마 안 된다구요? 직장에서 쫓겨나 요즘 아내에게서 용돈을 타 쓴다고요? 그런 기준을 가지고 여러분의 값을 매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제자 된 사람을 두고, 성경은 보배가 질 그릇 속에 담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질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우리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몸값은 예수님 덕분에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500원을 주면 500원 짜리라고 합니다. 만 원을 주고 사면 만 원짜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짜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짜리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보배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은 우리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세상은 멸시할지 모릅니다. 회사에서는 나가 달라고 하고, 집에서는 늙었다고 구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자존감을 가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복음에 미친 사람들로 한 생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때문에 "미쳤다"라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행26:24). 사람이란 존재는 마치 물이 끓어야 밥이 되듯이 자신이 손대는 일에 물이 끓는 열정을 갖지 못하면 그 일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도 내가 미쳤다 하는 느낌이 들만큼 열정을 갖지 못하면 어떤 일이든 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 미쳐도 좋을 일에 미친 사람들도 많습니다. L.A.에서 라스베가스로 실어 가는 관광버스들을 잠깐 미국에 머물 때 몇 번 보았는데 도박장에 데려가는 차량들이랍니다. 한국에서 동남아로 가는 남자들의 일행이 공항에서 종종 눈에 띄는데 향락을 즐기러 동남아 특정지역으로 몰려가는 미친 사람들이랍니다. 잘 못 미친 사람들의 안타까운 행렬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미쳐야 만족하는 특별한 존재들인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원히 면류관 받을 일에 흠뻑 미친다면 이야말로 얼마나 더 미칠수록 더 가치 있는 일들입니까!!

오늘은 3.1절을 기념하는 날입니다만, 그 당시 나라를 사랑했던 분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소중한 생명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숱한 고문과 총칼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가 있음을 알고 인생을 거기다 던진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치를 깨달았다면, 세상이 죄와 악으로 미쳐 돌아가는데 우리 성도들 역시 복음에 더 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미치지 않으면 사단이 미치게 만들고 있는 영혼들을 구해낼 힘이 딸리게 됩니다. 저 역시 복음과 선교, 영성훈련과 영혼 사랑에 미치지 않았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주님께 미친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교회에 발을 디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힘들고 지칠 때가 있더라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조급한 마음이 황우석 박사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조급함을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100리 길을 가야 합니다. 신발 끈을 잘 매야 합니다. 100리 길을 가는 사람과 10리 길을 가는 사람은 신발 끈을 달리 묶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선한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땅의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가치를 두고 영혼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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