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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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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올라온 참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올리신 기사였는데 1983년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채플 시간에 김흥겸이라는 학생이 대표 기도를 한 것에 대한 기사였는데 그 학생의 기도는 ‘하나님 이제는 당신이 회개하셔야 할 때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92년도 살림이라는 잡지에 그 기도문이 본인에 의하여 실려지게 되었다는데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 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 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학교를 보세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은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 것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우리를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보라니까요.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당신, 바로 당신 야훼 하느님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사실 당신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처럼 살다 그렇게 죽기 위해 있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이렇게 예수의 처참한 죽음을 예배드리며 팔아먹기 위해, 또 예수의 그 고통스런 삶과 당신의 이야기를 강의하며 팔아먹고 살기 위한 무리들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신앙을, 신학을 선택한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고맙지요. 당신과 예수가 있어서 그것으로 여러 사람이 2000년 동안 먹고 살게 해주시니….

불쌍한 하느님, 우리 같은 것을 앞세워 하느님나라를 만들겠다는 하느님, 당신이 그래도 절 사랑한다면 이 길을 가다가 변절하기 직전에 죽여주소서. 당신에게 간구하는 당신의 사람은 이 길을 가다 지쳐 쓰러져 돌아서려 할 때, 그 직전에 죽여주는 잔인한 축복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기도였기 때문에 그 기도에 아멘이라고 한 사람은 몇 사람이 안 되었다고 그 기사를 올린 목사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역사와 사회를 위하여 투쟁하고 싸우다가 지친 신학생의 절규였습니다. 그 기도를 한 김흥겸이라는 분은 36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그렇게 불손하고 불경스러웠으니 천벌을 받아 요절 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그렇게 불손하고 불경한 것이 잘 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그 김흥겸이라는 학생이 그와 같은 불경 때문에 하나님께 맞아 36살에 요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김흥겸이라는 청년의 좌절과 절망과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고 함께 아파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리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계신다고 하여도 무능하신 것처럼, 전능하시다고 하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아무 관심도 애정도 없으신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다윗에게도 그와 같은 어려움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고, 그 어려움이 얼마나 힘들고 절망적인 것들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러분들은 김흥겸이라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시지는 않으실겁니다. 아니 겁나서 못하실겁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충분히 이해가 되실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절망이 그의 아픔이 느껴져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수요예배 때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 때 창세기 39장을 읽다가 새삼스러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와 같은 묘미가 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그 때마다 새로운 은혜가 있습니다. 39장 1절에는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편애를 받고 채색 옷을 입고 지내던 귀공자 같은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어떤 역경과 고난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9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노예로 팔려가 종이 되었는데 형통은 무슨 형통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요셉이 종으로 팔려갔다는 말입니까?

22절에도 보면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없습니다. 노예가 된 것도 부족하여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내용을 기록한 22절 다음 23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어” 그냥 형통도 아니고 범사에 형통이라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도 너무 안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만일 글을 쓰면서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면 사람들은 제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 정신이라면 글을 그렇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고난을 당한 그 시점만 끊어서 생각하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생을 다 알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요셉의 일생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면 2절과 23절의 말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만 끊어서 생각하면 그 말씀이 정신 나간 말씀인데, 요셉의 일생을 풀어서 길게 놓고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기막히게 맞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정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당한 모든 힘든 일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은 그 형통을 위한 포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냥 채색 옷을 입고 가나안땅에 있었다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7년 흉년 때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팔려 갔기 때문에 애굽에 가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과 민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억울했지만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지 못했었더라면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것을 해몽하지 못해 애를 쓸 때 왕을 만나서 그 꿈을 해몽해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 간 것도, 옥에 갇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다 보니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둑실력이 한 10급 정도 됩니다. 급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 우리나라 기사가 외국 기사와 큰 타이틀을 놓고 대국을 벌이면 관심을 가지고 바둑 텔레비전을 보기도 합니다. 보기는 하지만 이해는 못합니다. 왜 그때 거기에 바둑돌을 놓는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해가 됩니다. 십여 수 지난 후에 왜 그가 그때 거기에 바둑 돌을 놓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10급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전투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9단은 앞을 내다보고 미래의 전투를 위해 미리 바둑돌을 놓아둡니다.

그런데 10급짜리가 9단 바둑 놓은 것을 보고, 이해가 되네 안 되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우리의 인생도 바둑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급수는 고작 10급 정도가 될 겁니다. 하나님의 바둑은 9단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수로 우리 인생의 바둑을 두십니다. 10급짜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잠잠히 지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믿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이 요셉을 보고 두려워할 때 요셉이 말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믿음은 그 때 총리가 되었을 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요셉은 종이 되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옥에 갇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형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종이 되어서도 열심히 종노릇을 잘 했습니다. 억울해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았습니다. 옥에 억울하게 갇혀서도 죄수 노릇을 잘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자기가 이해는 못하지만 그와 일 속에도 고수의 하나님의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기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자기가 결국은 형통한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살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편만 놓고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십니다.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시며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수의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잠잠히 고난을 이겨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늘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간증을 하시면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83년 광주민주화 항쟁 이후 암담한 시대에 절망하여 지금은 하나님 당신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신학대학교 공중 기도시간에 기도했던 김흥겸이라는 학생이 살았던 시간과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갈 때의 시간 그리고 다윗이 오늘 시편 13편에서 ‘하나님 어느 때 까지입니까?’라고 절규하는 시간이나 다 비슷한 시간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김흥겸이라는 청년은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요셉과 다윗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김흥겸이라는 청년은 믿음이 무너짐으로 살 힘을 잃어버리고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습니다. 요셉과 다윗은 그 어려움의 시간을 다 이겨내고, 이겨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삼아 다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상황은 같았는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상황이 달라서 결과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똑같았는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1-2)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으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62: 5-8) 아멘.

평생을 믿었어도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일이 늘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평생을 믿어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무능하시거나 아니면 나에게 관심이 없으시거나 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김흥겸이라는 청년처럼 사시렵니까? 요셉과 다윗처럼 사시렵니까? 어제도 탤런트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을 하였다고 뉴스가 나왔습니다. 불과 20여일 전에도 가수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 하였습니다. 둘 다 다 기독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음’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절규하면서도 다윗은 그의 시편을 이렇게 끝냅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며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김흥겸과 같은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 회개 하십시오.’라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주의 사랑을 믿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결국을 찬송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김흥겸은 김흥겸의 믿음대로 되었고 다윗은 다윗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절망 중에도 소망하며 그 소망을 이루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자가 되었다는 간증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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