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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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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방영되었던 코미디 프로 가운데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웃으면 기분이 좋고 모두를 즐겁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웃을 일어 거의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말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티브이 채녈은 웃 찾사  프로인 것 같습니다.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것이 성도의 표지라고 말씀 하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말씀이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애통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의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도 먼저 심령의 가난함이 먼저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입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빈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그것 때문에 심령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된다면 그것이 더 큰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복은 세상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가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는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하여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진정한 인생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상고하다 보면 하나님의 법칙과 사람의 법칙이 다른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눅 6장21절에 보면 “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6장25절 “ 너희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에서 말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역설적 입니다. 성경은  역설적 진리를 많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영적 원리 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개념과 전혀 반대가 되는 것임을 한 눈에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고 다른 존재 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비록 세상 사람들이 눈에는 어리석게 보여도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는 미련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눈물과 슬픔 이라는 말씀이 9가지 정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가장 큰 슬픔의 상태입니다. 가장 강도가 높은 표현입니다. 이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면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과 같은 것 입니다.
  이 애통의 모습을 우리는 창 37장에서 발견합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찢겨져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였다고 말합니다. 야곱이 당하고 있는 아픔. 가슴을 쥐어짜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 바로 애통에 맞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죄악 됨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바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애통해야 합니다. 이기심과 교만함과 죄악의 문제로 가득 찬 자신의 내면을 보고 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심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보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믿는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야 하고 ,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몹시 가슴아파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입니다. 예수 믿는 주의 백성들은 모두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되지를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자신의 부족 때문에, 연약한 믿음 때문에 , 무지하여서  다양한 걸림돌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주님중심으로 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패한 모습과 죄악 때문에 주님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애통하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때에  물들어 있는 영혼 때문에/ 육신의 허물을 제제하지 못하는 약하되 약한 심령이  몹시 안타까워 우는 상태가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슬픔입니다.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를 우리는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괴로워하는 한 사람 바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만난 후 오직 복음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치면 전속력으로 달린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슬픔에 빠져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만납니다.
스스로 고백합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장24절
매우 힘이 듭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바로 선을 행하기 원합니다. 좀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깊이 있게 교제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바울로 하여금 방해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육신 이었습니다.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도록 자꾸만 보채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영향력 입니다.  바울은 자신 속에 거하는 죄의 문제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안에 두 왕국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 속에 주님을 기뻐하는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마음 한편  저 구석에는  죄의 법이 자리 잡고 사망으로  내몰아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고 매우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신을 살필 때 거기에는 자신의 무능과 절망을 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한번 정도는 바울과 같은 체험이나 간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겪는 갈등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이것을 뛰어 넘고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까?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주 예수를 영접하라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리 많은 죄책과 허물이 있는 자라도 모두 용서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거절하거나 박대하지 않습니다.

시 51편에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 다윗을 만납니다.  다윗은 지은 죄로 인하여 애통하고 있는 모형을 보여줍니다. 상한 마음 통회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않으신다. 고 합니다. 바로 이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자세가 애통의 핵심이고 엑기스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영혼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 시키셨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죄악으로 애통하며 두손들고 주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우슬초로 깨끗케 함을 덧입습니다. 거룩케 됨을 회복합니다.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 하는 심령으로 온전케  세워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애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국가, 세계의 상태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보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인류 안에 이루어지는 모든  악의 근본원인은 무엇입니까?  지구촌에 발생하는 도덕적 혼란과 인류의 불행과  압제와 눈물과 고통 /이 모든 것의 직접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왕 됨을 거절한 것이 원인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든지 아니면 어둠이 지배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국이  내 이웃과 나라와 온 세계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훼방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시대를 보면 이런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사 시대로 이어지면서 육신적 풍요는 전수되었습니다. 각 지파에게 약속의 땅이 분배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적인 대 물림에 실패하였습니다. 사사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사 시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 입니다.

말씀의 기준과 율법의 다림줄을 벗어나서 마음의 소원대로 살았습니다. 내 멋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결국 멸망을 자초하고 심판을 불러 왔습니다. 여러 차례나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를 잃고 / 오갈 데 없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실 때만 그들이 태평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최대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스스로가 왕이 되고 하나님의 왕 됨을/ 하나님의 통치와 주재권/ 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들이 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온 인류는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움이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창조주 보다 더 경배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금송아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무가치한 것으로 대체하여 버린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d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겪고 있는 최대의 실수입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강도사 고시를 볼 때 논문 제목이 복제인간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당시 한창 이슈가 된 것이 복제 인간 이었습니다.  서울대 황우석 박사가 주도한 복제 개와 복제 인간에 관한 것은 21세기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현재도 인류는 하나님의 주권을 향한 도전과 침략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가슴을 치는 행위 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내 신앙과 내 삶만 잘 하면 그만이지 나하고 관계없고 이익이 없는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서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존 스토트 는 복음주의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복음주의 란 ?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 전도- 즉 창조, 타락.  십자가 , 부활, 승천, 재림 등의 핵심적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책임- 즉 사회를 맑고 건강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에 따라 다스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일생을 바쳐서 이루기 원하였던 것은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다. 라고 말하였다.  조국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이 백범이 일생을 바쳐서 추구한 가치 였습니다.  민족이 분단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평양을 방문하며 3.8선이 그어지는 것을 그토록 반대하였던 인물이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 인물이었습니다.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없는 작금의 시대에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요 진정한 지도자가 바로 백범이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애통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애통한 심령의 대표주자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웃으셨다는 기록보다 우셨다는 기록이 더 많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상한 마음으로 슬퍼하는 마리아를 보면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화려한 건물로 지은 성전을 보고 우셨다. 겉은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머지않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처절하게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겉은 그럴 듯하고 껍데기는 화려한데  그 안은 온통 죄악의 덩어리요, 외식으로 가득 차 있는 성전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몹시 슬퍼 하셨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성전에 장사치들의 무대가 되는 것을 보시고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하나님이 마땅히 경배 되어야 하는데 육신의 썩어질 것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
성도의 영적 시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야 합니다. 편협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치우치거나 편견된 마음을 가져서는 그리스도의 큰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애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슬퍼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 졌는데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의 세계를 보면 몹시 쓰린 가슴을 가져야 한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 도착한다. 바울이 아덴의  영적 기상도를 보니  아덴 이란 도시는 철학의 도시입니다.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  17장 16절에 보면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분개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심정이 나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이기주의적 성도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바램을 알고/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효자 신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은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로를 받게 됩니까?  죄를 용서해 주고 무거운 죄 짐을 풀어 주는 위로 입니다.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과를 멀리 옮기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어떤 힘을 공급 받습니까?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주님과 함께 날아  오르는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성도는 가슴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애절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돌아 볼 줄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나라와 민족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 였습니다. 말씀을 외면하는 패역한 자기 민족을 보면서 그들이 당할 고초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하지 못한  종 이었습니다.  아픈 가슴을 끌어 앉고 주 앞에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한  선지지자 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마찬 가지 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알고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였습니다. 짐승 가운데 가장 슬피 우는 동물이 들개와 타조. 라고 합니다. 그토록 그의 마음이 통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혼의 진통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 목사. 목자. 교사는 학생의 영혼을 놓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된 자는 불신자를 향한 뜨거운 눈물이 있을 때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것입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쏟아지면 사막이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습기가 없으면 사막만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 8장 6절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바위위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어서 말랐고 라고 말씀합니다. 눈물이 없어서 씨가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은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다져집니다. 인격이 바르게 빚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흘리는 눈물을 기억하신다.  계 7:17절에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이라 하신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고 눈물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하여도 죄로 인해 애통하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슬퍼하는 영혼은 하늘의 위로, 천국의  복된 소망을 가진 자 이다.  그의 눈은 땅을 것을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애통하는자는복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항상충만하기때문이 그렇습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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