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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당장 지금 (출 8: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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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자동차 왕으로 알려진 헨리 포드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처음 발명했을 때 친구들은 포드를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만든 자동차는 참으로 유용했지만, 그 차에는 후진 기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드는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서 이번에는 그 자동차를 개조하여 후진 기어를 만들고 친구들을 공장으로 불렀습니다. 친구들이 그 차를 구경하러 온 날 그는 친구들로부터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공장 문이 차보다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포드는 공장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발명품인 자동차를 꺼내야 했습니다.

  사람은 뛰어난 것 같아도 부족한 부분들이 다 있습니다. 아무리 천사 같은 미모와 마음씨를 가진 사람도 지독한 방귀 냄새를 풍길 때가 있습니다. 사자보다 강하고 황소처럼 힘이 셀 것 같은 용사도 감기에 넘어져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부터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천국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난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1. 하나님은 묶인 것에서 자유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집트의 왕인 바로가 있습니다. 바로는 사람의 이름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왕을 파라오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파라오에게 큰 재앙이 찾아 왔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 땅에 묶어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할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순간부터 보혈의 은혜를 통해 마귀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8: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를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부터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백성이라고 선언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이곳에서 나를 위해 예배하기 위해 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아니라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갈라디아 5:1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처럼 마귀는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너는 자유자가 아니다. 너는 아직 내게 속해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발목을 붙들고 계속해서 죄의 노예로 살게 합니다. 옛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 선생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바울 선생의 고백처럼 우리는 진실로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관하시며 순종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계속해서 육신의 정욕에 붙들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죄의 일을 행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입에서는 온갖 저주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마음에서는 분노가 가득하고, 낙심하면 안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이미 마음은 낙심하여 한숨이 섞여 나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지긋지긋한 어둠의 권세에 붙들려 저주 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왜 과거의 일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에 상처로 받고, 고통 받으며 아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우리 자신들이 애굽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있었던 원수 마귀의 땅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의 땅에서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나자, 마귀의 땅에서 벗어나자!”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날 힘이 있습니까? 그럴 능력이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우리 모두는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같은 육체의 정욕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임한 하늘과 땅과 공중의 어떤 인생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신 분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할렐루야! 따라합니다. “마귀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자가 되었다”

  2. 지금 즉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유를 요구하지 바로는 아주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 있는 모든 맑은 물과 하수를 피로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마귀를 섬기는 애굽 인들에게 피는 저주와 멸망과 고통의 상징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권세입니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쓴 이야기 중에 '진홍 가슴 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새 한 마리를 만드셨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진홍 가슴 새' 라고 붙이셨습니다. 진홍이라는 것은 아주 붉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새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고 이름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너는 네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홍 가슴 새가 살던 둥지 근처 언덕에 어느 날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어느 사람이 매 달렸는데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던지 진홍 가슴 새는 십자가에 달린 그를 보기 위해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의 이마에는 가시관이 씌워졌는데 그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진홍 가슴 새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그 조그만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작은 부리고 깊숙이 박혀 있는 가시를 뽑아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는 솟구쳐 올랐고, 진홍 가슴 새는 그 피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참고 참으며 가시들을 뽑고 또 뽑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진홍 가슴 새는 슬픈 마음으로 십자가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목덜미와 가슴에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그 새가 낳는 새끼마다 목덜미와 가슴에 자신처럼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라게를뢰프’라는 분이 쓴 진홍 가슴 새라는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저주와 고통과 죽음의 상징인 피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상징이 바로 첫 번째 재앙인 피의 재앙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진홍 가슴 새가 자신의 모든 몸에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덮어 썼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피가 내 마음과 영혼과 정욕으로 가득 찬 육신까지도 적시고 적셔서 정결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재앙이 지나가자 바로는 다시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재앙이 바로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 온 애굽 땅에 개구리들이 가득 찬 것입니다.

  애굽 인들에게 개구리는 부와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개구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을 찾을 수 있는 안내자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개구리를 냇물과 샘물의 수호신이요 수행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도 개구리를 우상으로 만들어 복 두꺼비라고 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섬기는 그 개구리는 더 이상 축복의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는 이제 그들 앞에서 저주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개구리들은 떠들어 대었고, 시끄럽게 울부짖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크루르’라고 말하는데 이는 나일강 수위가 내려갔다는 의미로서  ‘흐루르’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합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물이 내려가면 농사를 시작하고, 그 땅은 풍요롭기 때문에 개구리가 울면 복이 온다고 믿은 것입니다.

  개구리가 운다고 복이 오는 것일까요? 우상 숭배자들은 많은 징조를 가지고 복을 따지고, 점을 치고, 자신의 운명을 따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그들이 그토록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복을 주는 도구로 생각했던 개구리는 그들의 인생에 저주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바로가 말하기를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고 했겠습니까?

  제사는 개구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6:13절 이하에는 개구리를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귀신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신천지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시온교회라는 명침을 쓰고, 총회장을 이만희라는 사람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데, 이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추수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신천지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뒤 각 개 교회에 들어가 충성을 하게 한답니다. 그리고는 청년회장, 부녀회장, 혹은 구역장 등의 주요 요직을 장악한 뒤에 목사님 몰래 교인들에게 성경 공부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신천지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가르쳐 이단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교회 외에 다른 곳에서 성경을 공부하자 혹은 말씀 배우러 가자고 하면 일단 의심해야합니다.

  심지어 추수꾼이라는 사람들은 절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는 기존 교인들을 대상으로 "이 지역에 처음 이사를 왔는데 어느 교회가 좋은지 모르겠다"며 접근해서 마치 그 사람이 전도한 것처럼 교회에 등록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일 년 정도는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교회의 일을 한 후에 성도들을 안심시키고 그동안 쌓아 놓은 정을 바탕으로 신천지 교리 공부 관계자에게 연결시킨 후에 이단 교리 공부방으로 빼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공부하는 교리공부방을 '복음방'이라고 부르고, 이 단계가 지나면, 무료신학원이란 곳에 들어가 본격적인 교리를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추수밭이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생명들을 추수해야 한다고 교회에 계속해서 침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말세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늘 개구리 영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 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고 하셨습니다.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결국, 바로는개구리의 재앙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불렀고, 그에게 개구리 재앙을 멈추게 해 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바로는 말하기를 “내일이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지금 저주가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큰 재앙이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곤고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낙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고통스런 일들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모든 것이 끝나야 합니까? “내일 끝나야 합니까? 지금 당장 오늘 끝나야 합니까?”

  혈루병 걸린 여인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의사도 포기했습니다. 돈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녀의 병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 때 그녀에게 “네게 언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입니까?

  내가 지금 물질의 문제로 고통을 당합니다. 내일이면 양식이 떨어집니다. 내일 아이들에게 줄 차비조차 없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물질의 축복을 언제 받고 싶으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오늘 당장 지금입니까?”

내 사업의 길이 막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언제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업이 어떻게 될 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사업의 문제가 언제 해결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당연히 “주님, 오늘 당장 지금 해결해 주세요”해야 하는 것이 정확한 답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참 육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해서는 안 될 세상의 문화에 빠졌습니다. 게임에 중독 되고, 술에 중독 되고, 3천 가지가 넘는 독이 있다는 담배에 중독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는 언제 그 길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지금 나는 너무나도 남편이나 아내가 밉습니다. 내 시부모가 밉습니다. 형제가 밉습니다. 내 자녀가 밉습니다. 보기조차 싫습니다.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미움이 일어납니다. 그들을 바르게 양육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 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마음을 언제 치료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마귀로 상징되고 있는 애굽의 왕 바로는 모세에게 대답했습니다. “내일이니라”

  내일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곧 오늘 이 시간에 나를 고쳐 주소서, 내 저주를 떠나게 하소서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더 이상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치료받고 가야 합니다. 해결 받고 가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로처럼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다시 완악하게 됩니다. 마음이 완강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지금 즉시로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날을 미루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미루는 것입니다. 지금 잡아야 합니다. 지금 해결 받아야 합니다. 당장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 시간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주님 내 문제를 지금 이 시간 오늘 즉시로 해결해 주세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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