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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이 일어나려면 (행 3:12~16, 행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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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일 본케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회가 케냐에서 열렸는데 150만명이 모여 새로운 부흥이 아프리카에 임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성령님의 축제」라는 책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표적들, 특히 신유의 기적을 소개한다. 21세기의 지금도 의학과 과학을 뛰어넘어 하나님은 병든 자를 필요에 따라 고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금세기의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보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어 일으키는 모든 이적에 관한 이야기는 구원을 증거하기 위한 것인데(히2:4) 사람들의 귀가 가리워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 김익두 목사는 1919년대부터 신유의 부흥사로 쓰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쳤는지 신유로 나음을 받은 사람의 책이「이적 명증」이란 제목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는 1920년 5월 17일 부산진교회 부흥회 이야기이다. 이 부흥회에서 나면서 8개월 만에 앉은뱅이가 된 아이가 8년 만에 일어선 일이다. 부산진 좌천동 446번지에 사는 김낙인 씨의 아들 김두수 군이라고 동아일보 58면에 소개했는데 동아일보 기자는 이 신유의 사건을 재미있는 놀라운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 정도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본문에 나오는 고침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40세 된(행4:22)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의 손에 잡혀 일어나 걷게 되었을 때 모든 백성이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보이게 되었다.(행3:11) 그때 행3:10을 보면 백성들이 이 신유의 사건에 대한 반응이 적혀 있는데 이 일을 기이히 여겼다. 그래서 베드로는 행3:12에서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고 되묻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베푸신 고침의 사건을 두고 의혹과 의심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고치는 역사는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난다. 문제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을 보고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신유의 사건을 통해 부활의 예수가 전해질 때 믿는 자는 남자의 수만 오천이나 되었다.(행4:4) 그러나 유대교에 종사하는 지도층은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고 (행4:3) 사도들을 경계하여 협박하였고(행4:21)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다.(행4:18)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집에서 이 신유의 사건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믿고 순종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가 있으며, 의혹하여 기이히 여기든지,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로 만들며 오히려 하나님의 기적을 폄하하려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이 일으키신 신유와 기적의 사건을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내가 바로 앉은뱅이임을 알고 일어서는 사람, 걷고 뛰고 찬미하는 사람으로 고침 받아야 한다.

이런 신유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고침을 받는 회복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한다. (행3:6)

행3:6을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베드로는 외쳤다. 바로 외친 것이다. 앉은뱅이는 미문이라는 성전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기에 금전과 은전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금과 은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외쳤다.

예수의 이름을 앉은뱅이에게 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배고픈 자에겐 빵을, 아픈 자에겐 약을, 공부를 못하는 자에겐 과외공부 교사를,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나침반이나 지도를 주는 것이 인생의 해답이다. 그렇다면 앉은뱅이에게는 병원을 소개하든지 재활 센터로 데려가는 것이 해답일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참으로 베드로가 예수를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예수 이름이 삶의 해답이라는 것이다. 예수 이름이 빵을 뛰어넘어, 약을 뛰어넘어, 교사를 뛰어넘는 인생의 진정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믿었고 확신했다. 예수 이름을 자랑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란 예수의 몸이다. 그리고 예수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다. 예수의 이름은 오직 죄 사하는 사죄의 권세만 있다고 믿고 예수 이름이 병든 자를 고치고 낫게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중세 토마스 A 켐피스는 중세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시작할 때 금과 은은 없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에 예수를 줄 수 있었지만 중세의 교회는 금도 있고 부자가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주어야 되는 예수가 없다”

오늘 우리의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의 지체된 우리들이 자랑하지 못하고 이웃에게 주지 못하고 확신에 넘치는 예수의 권세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회복은 보여주는데서 온다. 우리는 죄 사하는 예수만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예수 이름을 담대히 제시하는 성도가 되자.


둘째, 그 이름 예수를 믿어야 한다. (행3:16)

예수는 유대 백성들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졌다. 빌라도가 놓아주려고 해도 의로운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였다. 예수는 의인이었으나 실인한 자를 대신하여 죽었다.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바로 우리를 낫게 하기 위해서 당한 고통이다. 그 십자가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은 이렇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베드로는 바로 예수가 고난 받는 종의 예언대로 오신 분이요 그가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았기에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낫게 한다고 믿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는 그 이름 예수를 절대적인 확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믿었다. 아니 스스로 다시 사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고백하였다.

행3:13, 행3:14, 행3:15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가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다시 사신 부활을 눈으로 본 자요, 귀로 들은 자요, 몸으로 체험한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예수에 대한 믿음, 결코 감출 수 없는 에수에 대한 소망, 결코 남 몰래 할 수 없는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뜨겁게 불타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하였고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로 인해 주어지는 믿음이 있으면 신유의 기적은 온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낸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다. 그것으로 신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예수에게서 얻게 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이 부으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행2:33, 4:8)

누구든지 성령을 받기 전에는 신앙 생활에 담대함이 없다.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지만 환난이 왔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고난을 겁내는 자였다. 복음의 겁쟁이가 무슨 용기로 예수가 인생의 해답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는다.

행2:1 이하를 보면 120문도에게 성령으로 인한 불같은 역사, 바람같은 역사가 나타나서 각 나라 말로 알아듣는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을 때 술 취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담대히 설교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는 자가 되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베드로는 영혼이 보였다. 일거리가 보였다. 복음이 전하고 싶어졌다. 앉은뱅이를 향해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오늘 본문 말씀인 행4:7~8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는 가운데 주어진 대답이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앉은뱅이가 회복된 것을 설명하는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 충만하기에 베드로는 담대하였다. 위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령 충만, 성령에 사로잡혔기에,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지배를 받았기에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 얻는 이름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행4:12)

교회의 성도들과 목사는 모두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받아야 한다. 바울을 보라. 세계 3차 전도 여행을 하며 사역을 감당한 그는 롬15:18에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도 성령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령에 사로잡혀 영혼을 위해 전도자가 된 예수님의 증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사역에 얼마나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는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빌립보 지역의 귀신들린 아주머니를 고쳤다.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는 병든 자가 앉으면 병도 낫고 악귀도 떠나갔다. (행19:12) 밀레도에서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고 살았고 어떤 독도 해치지 못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병, 마음의 병, 육체의 병, 그 어떤 것도 못고칠 질병이 없다. 하나님께 받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대로 보내시는 성령 (행2:33) 보혜사를 사모하여 먼저 성령 충만을 받으라. 성령에 사로 잡히면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게 되고 뭇영혼들에게 예수 이름을 담대히 줄 수 있다. 그것이 고침의 원리이고 회복의 원리이다. 병든 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담대하게 받으라.

예수 이름을 주라.
예수 이름을 믿으라.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으라.

오늘 이 말씀들을 다시 거꾸로 생각한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 이름의 확신을 가진다. 확신이 있으면 누구에게든지 예수 이름을 줄 수 있다. 바로 거기서 회복이 시작되고 살려내는 사람, 살려내는 교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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