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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 제단을 다시 수축하기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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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눅12:49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를 원하셨다. 그 불은 거룩한 불이다. 죄악과 정욕의 불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의 불이다. 그 불이 붙어야 죄악을 이긴다. 그 불이 붙어야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다. 그 불이 붙어야 축복의 인생이 된다. 그 불이 붙어야 부흥의 주인공이 된다. 이 불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여 사람의 심령을 타게 했을 때 120문도의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교회를 확산하는 생명 공동체가 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들어가는 지역 마을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든든하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부흥의 불길이 로마에까지 퍼져나갔다.

조선 땅에도 1885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의 어두움의 시대에 하나님은 1907년 평양에 불을 던져 주셨다.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회개로 시작된 말씀 집회는 통회와 자복, 합심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한 달 뒤인 1907년 2월 10일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의 부흥회에 2,000명이 모여 회개와 자복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각 간증을 하였다. 한 주간 더 연장된 이 부흥의 역사로 학교는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문을 닫았다. 불이 심령에 떨어지고 교회에 떨어지고 평양에 떨어졌을 때 이 불은 전국으로 옮겨 붙었고 1919년 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저력으로 승화되었다.

이 불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주님이 부흥의 불을 다시 한번 더 내리시도록 갈망해야 한다. 이 시대는 죄악의 시대다. 어두운 영들이 판을 치고 생명을 팔아버리는 시대다. 학교 교육이 무너져서 가정의 공동체가 해체되므로 청소년들이 신음하고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술과 마약, 알콜 중독, 음란과 사치, 방탕이 판을 치는 패역의 시대다. 교회마저도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성직자, 교회 지도자들도 길을 잃어버리고 다같이 방황하는 시대다. 표류하는 시대, 겉만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만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다.

그래서 불이 더욱 임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본성이 자비와 긍휼이시기에 렘3:22~23의 말씀처럼 이 땅을 진명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더욱 강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불을 내려주실 것이다. 마치 오늘 본문 엘리야가 고군분투하는 갈멜산 위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드러내시려 태우는 불을 내려주시듯 믿음의 부흥, 야훼 신앙의 부흥을 위해 불을 주실 것이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진멸하는 불을 갈망하며 그 불이 떨어지는 현장에 서 있었는가?

Again 1907을 사모하는 우리는 “이 땅에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겠다. 불로써 응답하시는 역사는 바로 왕상18:30의 말씀대로 단을 수축하므로 일어났다.

왕상18:30~31은 바로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과정이다. 불은 바로 회복된 단 위에 임한 것이다.


첫째, 용서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1)

엘리야는 백성을 모아 놓고 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라고 하였다. 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라 하였다.

북왕국 출신인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남왕국 유다를 상징하는 유다와 베냐민의 돌도 취하였다. 분단의 벽, 정치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화해와 일치, 연합의 단을 쌓아 올렸다. 바로 벽이 없는 용서의 단이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단은 용서가 있는 단이다. 용서는 예배를 성공시키는 열쇠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다. 용서는 곧 부흥의 시작이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하였다. 예물을 드리려거든 먼저 사과하라. 용서보다 급한 일이 없다.


둘째, 예배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3)

왕상18:32을 보면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만들었다. 이것은 여기가 예배의 단이라는 구별의 표시다. 예배의 단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보호하는 울타리 표시이다. 그리고 왕상18:33을 보면 “또 나무는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다. 제물과 제물을 사르는 장작, 그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예배의 본질 중의 하나가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불로 임하는 단은 단을 수축하되 예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제물과 장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부흥회에 불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제물과 장작을 준비하여 예배의 단을 쌓는 주인공이 되자. 구약시대의 제물과 장작은 신약시대의 헌금이다. 찬송이다. 마음이다. 불이 붙는 불쏘시개가 되어 구별된 헌금, 구별된 뜨거운 찬양, 구별된 헌신의 마음이 단에 올려질 때 야훼 신앙을 세우는 회복과 부흥의 불로 타오르게 될 것이다. 헌금이 드려지지 못하고 찬송이 드려지지 못하고 헌신이 드려지지 못하는 단은 형식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불을 원하지만 인색하고 땀 흘리는 대가를 올려놓지 못하는 단을 고쳐야 한다.


셋째, 거룩함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5)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게 하였다. 그리고 왕상18:33~34을 보면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한다. 모두 세 번을 명령하였으니 12통의 물을 부었다. 이것은 백성들 가운데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 구경꾼처럼 갈멜산에 있었지만 12통의 물을 붓는 일에 나선 무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3년 6개월간의 가뭄,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 그런데도 12통의 물을 제단 위에 붓는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치 내 혈관 속에 있는 피를 쏟아붓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물 붓기가 있으므로 단이 정결케 되었다. 송아지의 각을 뜨느라 더러워지고 어지럽혀진 단과 단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은 물로 씻어내릴 수 밖에 없다. 단은 질서가 잡히고 더러운 것은 씻겨 도랑에 채워졌다. 단은 깨끗해야 한다.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하는 것이다. 비록 장작과 제물과 돌과 흙이 씻어내리는 물로 젖었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는다. 젖은 장작, 젖은 돌도 태우므로 하나님은 더욱 큰 영광을 받는다.

우리는 단 위에 물을 부어 정결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의 단이 눈물로, 보혈로 정돈되어 깨끗하고 청결하고 순전하게 정화되도록 하자. 거기에 불이 임한다.


넷째, 기도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6)

왕상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하였고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하였다.

눈에 보이는 제단이 수축되자. 그 제단에 나아간 엘리야는 기도의 단, 부르짖는 단을 쌓았다. 그 기도 내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내 가족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불로 응답 받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엘리야 자신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으로 족한 겸손한 기도였다.

기도가 있을 때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다. 본래 기도는 성령의 불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눅11:13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성령은 기도로 받고 기도는 성령의 약속으로 인해 더욱 간절하게 된다. 매일 매일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0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단을 쌓을 때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불을 받았다. 집에서, 숲에서 기도의 단을 쌓은 그는 육체의 질병을 돌아보지 않고 뜨겁게 사역하였다. 29세의 나이에 절명한 그의 기도 일기는 훗날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붙였다. 기도의 사람의 글만 읽어도 뜨거운 불이 임하였으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의 단을 쌓으면 누구나 불이 떨어질 수 있다. 불이 내려와야 한다. 불이 오면 부흥이 시작되고 그 부흥은 대적자를 물리치는 승리의 삶이 된다. 더 나아가 그 부흥은 축복의 비를 내리는 회복의 시작이다. 뜨겁게 기도하자.

20세기 전도자 빌 그레함 목사가 말하길 “부흥의 열쇠는 세 가지이다. 그 첫째와 둘째는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도 기도다.” 라고 하였다. 기도는 절대적이다.

금번 강화에서의 부흥회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힘들었다. 월요일 아침에 먹은 음식에 탈이 났다. 식구들도 같이 탈이 났다.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 그리고 기도의 지원이 없는 사역, 거기에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1907년의 부흥은 기도의 단을 쌓으므로 불이 점화되었다. 금번 Again 1907을 갈망하는 “부흥이여, 다시 오라!”의 부흥집회는 기도의 함성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자.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수원 오목천의 부흥으로, 수원 오목천의 부흥이 제주 한라를 넘어 갈멜산까지, 열방 족속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도록 불을 구하자. 위로부터 불이 내리는 응답,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기 위해 모이자. 제단 중심으로 달려나오고 어린이로부터 중학생,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 나오자. 모두 다 기대감을 가지고 무너진 제단을 쌓아 올리므로 마음에 불이 붙는 축복을 받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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