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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신앙의 기쁨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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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고양이”에서 연기했던 탤런트 정다빈이 자살했답니다. 수건으로 목을 매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은 순간적인 우울증에 의한 충동적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신문은 연예계의 자살 중, 이은주, 유니, 정다빈에게서 묘한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세 사람 모두 목매어 자살했다는 것 외에도 자라온 가정이 순탄치 않다는 것과 어린 나이에 연예계를 데뷔 했다는 겁니다. 이들은 거의 집안에서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곤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세 사람 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겁니다. 정다빈은 자살 전날 자신의 미니 홈피에 하나님의 품에서 쉬고 싶다는 글을 올렸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고 싶다기보다 그만치 힘들다는 표현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은주와 유니 역시 일요일마다 교회를 빼먹지 않고 다닐 만큼 믿음이 신실했다는 겁니다.

어떻든 정다빈까지 자살이라고 본다면 이들은 모두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보고들 있습니다. “정상에 올랐다가 떨어진 뒤의 허탈감이나 대중으로부터 잊어져가고 있다는 상실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그 원인이 된다.”고들 합니다.”
이들은 연예인들이니 매스컴을 타는 겁니다. 일반인들의 우울증에 의한 사고사건은 엄청 많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크리스천까지도요.
어떻게 해야 하나? 저는 사살한 연예인이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탓하거나 비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데이비드 싱크(David H. Cink)박사에 의하면 날카롭게 납을 비판하는 사람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 신경과민증에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요.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 3:17-18,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비록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찬송가 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 찬송이 그냥 남이 부르는 찬송 입니까? 우리 곧 내가 부른 찬송이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가 자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 다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단 1명만 예수님께 나아와 사례하며 감사했을까요? 예수님 말씀처럼 나머지 9명의 어디에 갔을까요?
나명환자 시절. 그것은 곧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고통은 없지요. 고난당하는 욥의 부르짖음은 “차라리 죽었더라면!”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깨끗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생활은 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은혜에 감사하며, 그에게 맡겨진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은, 빌립보서 4:11-12이었습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사도바울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1-7)에서, ‘나도 사도다. 나도 먹고 마시는 권리가 있다. 나도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나도 그럴 권리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데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기 위해서 그럴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상이 있다면 그럴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의 분명한 고백은, 자기도 먹고 싶을 때먹고, 마시고 싶을 마시고, 쉴 때는 쉬고, 갖고 싶은 것 갖고, 다 그럴 수 있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에서 자족하기를 배웠기에 그런데다 욕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바울께서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 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6 이하,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자족하면 경건이 있지만 욕심 부리면 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은총”(Grace)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볼품없는 빵 한 덩어리와 콩국 한 그릇을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 옆에 성경책과 돋보기안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그 그림에서 봅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187장 “너의 죄 융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등 9천 편의 찬송시를 작사한 사람은 홰니 제인 크로스비(Fany Jane Grosby, 1820-1915)라는 여자 소경입니다. 어려서 감기를 알았는데 식모의 잘못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할머니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듣고 신앙이 생겨 하나님을 알게 되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크로스비가 아홉 살 때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고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렵혀지지 않는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처지가 형편이 아니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이들이 바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힘들고 짜증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는 줄 아십니까? 지금의 나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홉 보다는 내게 없는 하나에 아쉬워하고 안타까워  하고 그 하나까지 갖기 위해 안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고, 그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며 되었다.” “만족하며 살자” 그게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뭘 해야 합니다. 만족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하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입니다.

본문 18절, 돌아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붙드시고 예수께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 되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사람 한 명 밖에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무엇 했는데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다.”(16절)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여러분의 생명을 바친다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보답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인데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또한 주십니다. 시편 50:23,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감사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감사는 무엇을 받거나 무슨 도움 또는 무슨 혜택을 받았을 때 그냥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오히려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시작이라는 겁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들추려면 한도 없을 것 같은데, 또 하나는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홍해 건넜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감사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늘 불평만 늘어났습니다. 만나도 먹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 것을 마시면서도 걸핏하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났다.”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으로 끌고 왔느냐?”하고 불평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해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 자는 망합니다. 그러나 작은 은해라도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배운 망덕한 사람에게 더 주고 싶습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감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 주십니다.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의 말씀, “캄캄한 밤하늘에도 자세히 보면 별이 보인다.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신다.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신다.”

본문,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려하며 감사한 사마리아인. 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그리고 보니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사마리아인. 그는 나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는 믿음이 생겨서 예수님께 감사하러 나온 것입니다. 나머지 9명은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고 믿지 못한 겁니다. “어쩌다 고쳐진 것” “그동안 이 약, 저 약 써 보다보니 고쳐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고쳐주셔서 나았다는 믿음 없는 겁니다. 어쩌면 그중에 분명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예수님 앞에 감사하러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믿음 없는 겁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 감사 할 줄 몰랐고 그것은 곧 믿음이 없는 까닭이었던 겁니다.

전 별로 헌금 강조를 안 합니다. 당연히 가르쳐야 할 일이니 때를 따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래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왜 해야 하느냐?”를 말하기는 하지만, 안 한다고 책망하거나 재촉 하지는 않습니다. 헌금 드리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라고 믿는데,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는데, 예수님께 드리는 게 무엇이 아깝고 무엇이 망설여지겠습니까?

9절,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믿음이 구원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도 행복해 지고 남도 행복하게 해준다.

‘데이비드 맥카시’는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인생 전부가 잠든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적은 일에도 감사하며 인사할 때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감사할 줄 알 때 그 가정을 행복하다.

“낮은 대로 임 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목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37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수 1:5-6) 그 순간 37년 동안 하나님을 부인한 죄를 회개하고, 육신의 눈은 못 보지만 영의 눈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도 나오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의 간증은, “저는 장님 되고 수지맞았지요. 눈으로 보는 37년보다 앞 못 보는 7년이 오히려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온 천하를 가져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기에 행복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잃어도 하나님을 찾은 사람은 감사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8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하십니다.

요엘 2:21-27, “땅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큰일을 하셨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광야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 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주셨다. 이제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가득히 쌓이고,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 메뚜기와 누리가 씹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버린 그 여러 해의 은혜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오엘 선지자. 농사를 망치고 통곡 할 수밖에 없는 그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 풀이 자라고 곡식이 나며, 온갖 동식물들의 낙원이 되는 것을 보았다. 때를 따라 적당한 비를 내려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일을 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 풍성한 것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시며, 그에게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시마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요엘 선지자의 더 큰 기쁨이며 감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때를 따라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메마른 대지와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 창조의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우리 곁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요엘 2:26,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복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세상에 이렇게까지 여러분을 사랑하고 복 주시는 분이 누구며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복과 은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진심으로 경배하고 감사 하십시오. 진심으로 찬양 하십시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m Swift)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 릴리풋션(Lilliputian)이란 난쟁이 나라가 나옵니다. 그 나라의 특이한 것은 배은망덕을 가장 큰 죄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공동의 적이 되게 해서 그에게는 은혜도 베풀지 못하게 하고, 어떤 요구도 들어 주지 못하게 해서 고립되어 살 가치가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한다. 지나친 처사 같지만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조차 악을 행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악한 일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그 토록 크고 엄청나건만 그 은혜에 감사치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아무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보혜사와 능력이 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감사, 그것은 곧 신앙의 기쁨입니다.
감사, 그것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 그것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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