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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주인 (눅 1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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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종이라는 개념은 고대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 사회는 소유가 지극히 일부에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 구조가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50년 전만 하더라도 농촌 부자는 대부분 주인과 머슴이라는 이름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여자들에게는 마님과 하녀라는 이름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촌의 대부분이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형태로 경영되었기 때문에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은 정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위대함은 노예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지도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노동력을 포기하기 싫었던 남부 사람들은 이 링컨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남북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흑인들은 사람이면서 사람의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흑인은 모든 일들을 다하면서도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식도 자기 자식이 아니었고 노예시장에 파려갔습니다. 이러한 비극을 담은 글들이 당시에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연예인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계약이 바로 노비문서라고 사회에 고발하면서 이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연예인 세계의 고질병이 이 사회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 내용에 관하여는 다 알 수도 없고 또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도 혼란이 있지마는 그러나 계약서가 노비문서라는 말에는 너무 과격한 언어적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노비문서란 그 생명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문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하고 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땅문서는 땅에 대한 재산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집문서는 집에 대한 재산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노비문서는 사람에 대해서 재산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란 어떤 소유권보다도 가치가 높은 재산이었습니다. 땅에 대한 재산권도 대단하고 집에 대한 재산권도 대단하지만 노예란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재능과 힘과 시간까지도 자신의 소유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노예는 가장 충실한 주인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노예제도가 쉽게 없어지지 않았던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예보다 더 좋은 제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종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구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 없어서 노예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측면에서 보면 동일한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종이 된 사람도 그 주인에 대해서 섬겨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 된 사람도 그 상대를 섬긴다는 측면에서는 같습니다.

가령 아내라는 위치는 이 두 가지 종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남편에 대해 노예처럼 할 수 없이 매여 사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남편에 대해서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스스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갈 5:13)『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섬김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종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으로 사는 두 인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비문서는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노비문서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의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돈은 사람들에게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말세에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힘과 시간을 돈을 얻기 위해서 바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현대인에게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은 마치 노비문서와 같은 권리와 힘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인생에게는 두 주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주인의 이름을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재물의 종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많은 인생에게 재물은 그 영적 성격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재물은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듯이 우리가 재물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생에게 어떤 관계보다도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관계인 것처럼 물질과 바른 관계 정립도 어떤 관계보다도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다른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사람이 물질과의 관계에 실패하게 되면 그 잘못된 관계가 그의 한 평생 다른 모든 관계의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삶은 누가 주인이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종의 삶은 주인을 섬기는 삶이기 때문에 종은 주인을 잘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인이 선한 사람이면 종은 저절로 선한 삶을 살게 되어집니다. 주인이 악한 사람이라면 종이 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악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종은 그 자질이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가령 컴퓨터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는 성능이 좋고 하나는 성능이 나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자체는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날마다 게임만 한다면 그것은 게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성능이 조금 나빠도 그것으로 말씀을 준비하는데 사용하게 되면 그것은 거룩한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주인의 개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했습니다. 주인이 둘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 주인은 미워하고 저 주인은 사랑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주인은 중히 여기고 저 주인은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섬김의 대상이 둘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인의 개념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으로써 주인입니다. 이 주인은 미워하고 저 주인은 사랑한다면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처럼 행세하지마는 실제로는 재물의 종으로 살고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은 자기의 사랑을 바치는 대상에 대해서 종이라는 말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했습니다.

사람이 재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재물을 얻기 위해서 한 평생 수고하며 땀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의 종으로 사명을 맡기기 전에 먼저 사랑을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었고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충성은 바로 주님께 사랑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노예로 복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종노릇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식의 종이 되어 살지 않도록 모리아 산의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사랑하는 자의 종이 되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 대상이 잘못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입는 손해는 치명적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 집에 개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주인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잘못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쾌락은 인생에게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제물을 사랑하면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제물은 사랑하는 자의 사랑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만듭니다. 제물은 인생에게 사랑의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섬기러 오신 분이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종으로 사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종으로 사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의 종으로 살아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주님의 해답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종으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물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종이 일정 기간을 지나서 자유자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을 때 종이 주인을 사랑하므로 스스로 종이 되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이 종은 자유보다 주인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사람이 있고 그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고 세상에 종이 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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