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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이를 주께 드리니라! (눅 1:6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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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주께 드리니라!
(눅 1:66~79)

시작하는 말

아이들은 귀중품을 반드시 어른에게 맡깁니다. 어른에게 맡기지 않으면 혹여 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현금이 많으면 은행에 맡깁니다. 은행은 고객의 돈을 받아 다시 그것을 금고에 넣어 안전하게 보관해 주기도 하며 적당한 이를 남겨 주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갑부들은 자기들의 귀중품을 은행에 보관해 두고 1년에 한 두 번씩 가서 확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귀중품을 집안에 보관하다가 강도나 도둑을 만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것은 반드시 안전한 곳에 맡겨 특별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안전한데 보관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질을 몽땅 하나님께 바치거나 헌금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보물이나 물질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물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의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에 내 슬하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의 슬하에서 자라도록, 살아가도록 맡겨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자녀들이 내 것이라 생각할 때 이미 그 자녀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므로 내 맘대로 안 됩니다.  더구나 자녀들을 외국에 보내어서 외국 문화에 익숙하게 만들면  부모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진짜 내 자식이 아니고, 외국 문화의 유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자식들이 집안에 같이 살든, 분가하여 살든, 외국에 나가 살든 그 자녀들은 비로소 진짜 내 자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자녀들에게 목맬(all in all)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거두고, 관리하고, 도와주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적인 관리를 잘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that's all" 즉 그것이 우리 부모들의 전부여야 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삼손의 아비 마노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13:12)라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삿13:14)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이 공부나 잘 하고, 좋은 대학이나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이나 하고, 좋은 집이나 사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뼈가 저리도록 느끼는 것은 자식들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부모에게서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했음

이름이란 유형무형의 사물을 말로 나타낸 호칭을 말합니다. 개념을 대표하고 그 사물과 딴 사물과 구별하기 위한 칭호를 말합니다. 처음 이름을 붙일 땐 낯설고, 발음도 설지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사물의 모든 특징이 함축됩니다.

성경 창세기 2:19-20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의 이름 짓는 것을 아담에게 명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각 생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이름이 오늘날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담은 인류 최초의 작명가였습니다.

만물의 이름에는 그 종의 특징, 특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처음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사람의 본성, 성격, 성향, 사상, 성품, 인격, 행동, 모습  등이 깃들어 있게 됩니다. ○○○씨 하면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사람의 전부를 피부로 느끼게 되고, 골수로 감촉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한자식(漢字式) 이름이었기에 조금 부르기 어렵고, 어감이 좋지 않아도 뜻이 깊다고 하여 돈을 많이 주고라도 작명가에게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 속에는 불교식 이름, 동양철학적인 유교식의 이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미신적인 이름들이 있기도 합니다.

가끔 길가에 토정비결(土亭秘訣)을 펴놓고 개명을 유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은 조선왕조 명종 때의 사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지은 책으로서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을 숫자적으로 따져 그해의 신수를 풀어보는데 쓰는 책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검은 안경을 낀 노인이 “당신의 그 이름은 태세, 월건, 일진이 좋지 않으니 이름을 바꾸시오. 싸게 지어드리지오”라고  회유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옛말에 “이름이 좋아 불로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름이 좋지 않으면 망초라”는 말입니다. 이름만 좋았지 사실은 이름값을 못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부모와 친족이 지어준 고상한 이름을 하나님이 신앙적인 이름으로 고쳐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갈대아식 이름을 아브라함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야곱이라는 출생 모습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은혜 받은 자의  이름으로, 사울이라는 유대교식 이름을 바울이라는 기독교식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고 나서 신앙생활이 달라졌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씌워졌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 주신 경우도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물과 구별하여 “사람(아담)”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고 말했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이 계시하신대로 “요한”이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의 이름,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께 부탁드려 보는 것도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닌 듯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자로 양육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는 저가 주앞에 큰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1:15)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나실 인으로 쓰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여 요한을 자기의 아들로 기르지 않고, 하나님께 바칠 나실 인으로 길렀습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실 인으로 구별하여 길러서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자를 품에 안고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엘리사벳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자의 어미라는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자기는 인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 요한의 입을 통하여 인류에게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엘리사벳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겠습니까? 요한은 어미 엘이사벳의 젖을 먹고 살았다기 보다는 기도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자식을 통하여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미들이 자식을 길러 나라를 만신창으로 만드는 대통령, 정치가들, 붉은 사상가들, 폭력배들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인 위치가 아무리 굉장하더라도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그러나 자식을 통하여 인류에게 복음을,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병든 자들에게 건강을,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인가 나누어줄 수 있다면 엘리사벳이 뭐이 그렇게 부럽겠습니까?

한나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사무엘”이라했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온 집안으로 더불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한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삼상1:22)라고 말했습니다. 한나의 기도의 눈물이  어린 사무엘의 뺨을 얼마나 적셨겠습니까?

나실 인으로 하나님께 드림

한나는 사물엘을 젖 뗀 후 아이를 하나님의 성전에 데려가서 나실 인으로 바쳤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제사장과 레위 인들이 이것저것을 봉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들을 길러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혹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낸 듯 합니다. 

엘리사벳은 아들을 자기의 손에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손으로 넘겨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서 넘겨받은 요한을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쓰실 자를 받으셔서 주의 손으로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합당하게 기르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우환질고가 많다해도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주시면 안전합니다.

끝맺는 말

다윗은 시3: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고 고백했으며, 이어서 시37:23-2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아들 요한을 잘 길러서 하나님께 바쳐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부모에게서 넘겨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로 잘 길러내셨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66절에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라”(눅1:66)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앞으로 생각 중에 있는 아이, 태중에 있는 아이, 젖 먹는 아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초, 중, 고,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 교회 안에 있는 자녀들, 교회를 멀리하고 있는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주의 손이 함께 하셔서 세례요한과 같이 큰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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