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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 (느 13: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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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도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하면 내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지만 그가 나보다 더 옳고 바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더 기뻐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적으로 여기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보거나 배신으로 여기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당 역사가 10년을 넘기는 당이 없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시고 각각 다른 사명을 주셨는데 나와 다르다고 해서 너무도 쉽게 배격하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심지어는 같은 교회 안에서도 왕따 시키고 냉대하여 실족하게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나로 인해 실족한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그 일에 대하여 심판 하실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여러 지체가 있어 각자 자기 역할을 하여 온전한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손의 역할, 발의 역할, 눈의 역할, 귀의 역할 등 다양한 은사와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왜 너는 나와 같지 않냐고 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발이 손과 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귀와 눈이 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지만 서로 돕고 협력할 때 온전한 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넘어 틀린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와 불교는 다를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입장에서는 틀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의 냄새가 나야합니다.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인지 비 기독교인인지 구별이 안 되면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틀린것을 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15:19을 보세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자이기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삶의 목적과 방향은 세상 사람과 너무나도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자기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꼭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기독교인의 標識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보내진 존재입니다.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 성도가 끝까지 지켜야 할 몇가지를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무엇을 반드시 지켜야 할까요?

1. 주일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포로로 붙들려가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왕때 왕의 최고의 신임을 받은 고위 관료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루살렘성이 다 훼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밤잠을 안 자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소원을 듣게 되고 느헤미야가 요청하는 대로 왕명으로 유다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명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때 그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운동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꼭 지켜야 할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백성들에게 꼭 지켜야 할 것 몇가지를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제일 먼저는 십일조 생활을 강력히 권면했습니다(10-14절). 그 다음으로 강력히 권면한 것이 오늘 본문 15-22절 말씀에 나오는 주일성수입니다.
저는 오늘 십일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회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꼭 말씀 드려야 할 것은 주일 성수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안식일에 민정을 살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을 만들고 있었고 곡식 단을 운반하고 여러 짐을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또 16절 말씀을 보면 이방인 상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안식일에 물고기와 각종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에게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심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한 것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합니다. 

결국 19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1)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문을 닫게 합니다. 2) 성문마다 자신의 심복들을 2-3명씩 배치해서 성 안으로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3) 그래도 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잠을 자는 장사꾼들에게 다시는 성 밑에서 잠자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4) 22절에서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이토록 안식일을 지키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까?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삶이 축복된 삶의 기초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안식을 누리지 않으면 포로로 붙들려가 영원토록 누리지 못하는 노예 신세가 되는 것을 자신들이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주님의 날을 잘 지키는 것이 축복의 탑을 높게 쌓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삶은 단순히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의 그 어떤 것 보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도 주일을 잘 지켜야 하고 남들도 잘 지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남들에게도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음식점도 가능한 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으면 그 주인들이 주일을 범하게 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에 전기도 쓰지 말고 차도 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세 문제입니다. 부득이한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일이어도 의사는 응급환자를 수술해야 합니다. 주일이어도 소방수들은 불이나면 불 끄러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에는 세상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님 안에서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내가 하나님 백성됨을 들어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의 날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체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날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성도의 표시가 됩니다. 이날을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여기고 동일하게 지낸다면 구별된 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 주일 성수를 못하는 경우는 부득이한 일이 아닙니다. 욕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세상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얻으려는 욕심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대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요? 전문가가 말하는데 대나무에 마디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주일을 지키는 삶은 우리 영혼의 마디와도 같습니다. 주일을 건너뛰어 보세요. 힘이 없습니다. 몇 달만 건너 뛰어 보세요. 쓰러집니다.

그러기에 주일은 이 땅에서 천국 삶을 연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삶 자체에는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저의 삶에 최우선 순위로 두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언제든지 순종하길 원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주일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이날을 지키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도 잡고 하나님도 잡으려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 하신 것을 들어보세요.
마 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무엇을 하라고요? 먼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세상 욕심을 벗어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쉽지 않습니다. 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미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지킬 때 성도됨의 표시가 되기 때문이고 제대로 신앙 고백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수시로 찾아와서 조선왕조 이방원이처럼 노래할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바로 그때 우리는 정몽주처럼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지고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되는 길이고, 그처럼 영혼이 잘되면 그 다음에 범사가 잘되고, 동시에 육신의 건강도 주어질 것입니다.

2. 영적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켰습니다. 본문 23-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그 당시 유대 사람들 중에는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 중에 유다 말을 못하는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그처럼 자녀들이 히브리말을 못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 말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리고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통혼한 사람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다시는 통혼을 하지 않도록 맹세시켰습니다.

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 시켰나요? 하나님은 혈통을 중요시 여기시기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혈통과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성도가 이방인이 우상을 가지고 들어온다거나 불신앙적인 사상을 가져 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성결을 유지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을 멸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방인이 유대인과 결혼하여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을 몇군데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룻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다만 이방인과의 결혼을 할 경우 신앙을 잃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위대한 왕 솔로몬도 이방 결혼을 통해 타락하였습니다. 결국 그 타락은 가장 파탄으로 끝나지 않고 국가 분열로 연결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불순종할 경우 처단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가정의 신앙, 우리 개인의 신앙의 성결을 잘 지켜야 합니다. 사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회복은 근본적으로 모두 가정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신앙을 가진 자녀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또 식구들이 모두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힘쓰고, 자녀를 기도로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개인의 영적 순결을 목숨처럼 귀하게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가장 큰 사회문제는 가정이 세속화되어 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속적인 것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가정을 잘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이들이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인터넷게임과 오락물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주일에 한번 나와서 말씀 듣는 것이 무슨 영향력을 끼치겠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적 가치관이 가슴 깊이 자리 잡습니다. 그러니 기성세대와 부딪칩니다. 말도 다르고 문자도 다릅니다. 얼마나 자극적인 말들이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보고 들으면 같이 물들게 됩니다.

무엇으로 여러분의 영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또 무엇으로 우리의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요? 세상의 그 어디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습니다. 미완성이고 부족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주님이 머리되시고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 교회만이 가정을 치유하고 그 교회만이 가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마16:18절 하반절을 보세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엄청난 권세를 가졌고 그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에 속하면 우리는 우리 가정과 자녀를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3. 직분과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한 것은 영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자신의 성도다움을 지키라는 뜻도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대제사장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산발랏은 하나님 성을 건설하는 것을 방해한 자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대제사장 자식은 레위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 자식이 불신자와 결혼할 뿐 아니라 이단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타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자기 사명을 버려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 제사장의 손자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왜 당시 유다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을까요? 그들은 신앙보다는 외모에 현혹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멋있고 그 집안이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략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버리고 사명도 버리고 미모와 권력을 갖기만 하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신앙을 팔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하나님의 배신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파는 일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러다보니 직분도 사명도 다 잃게 되고 결국 세상과 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성형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취직을 하려 해도 성형 수술해야 하고 남자도 수술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쌍가풀 수술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영성과 거룩함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예배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정말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막중한 사명을 주어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감당치 않고 그냥 왔다 그냥 가는 인생으로 살다 끝나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도 바울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세요.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성도됨의 표지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세가지 만은 꼭 붙잡고 지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마16:27을 보세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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