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신칭의 (창 15:1-6)

  • 잡초 잡초
  • 248
  • 0

첨부 1


여러분의 사랑과 뜨거운 기도에 힘입어 신학교 강의를 잘 마치고 은혜가운데 돌아왔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늘 부족함이 있어도 나는 참 행복한 목사다라는 것을 항상 느끼는 것은 공항에 와 보니까 장로님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구요. 너무 힘든 일정이었지만 그 분들을 뵙는 순간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누구나 익숙해진 환경을 떠나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할 때는 무척이나 망설임과 또 일말의 두려움도 함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중국에 가기 전까지 그 동안 수 차례 강의할 학교에 대한 사정을 이곳에서 들었던 차라 다짐을 몇 번씩이나 하고, 심지어는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몰라 저는 혹시 사고라도 일어나면, 거기에 대해 몇 가지를 당부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마치 유언을 하고 떠난 셈입니다.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까 저에게는 모든 게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 만해도 넓은 농장에서 2년 과정의 수업을 하던 저들에게 엄청난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안에 의해 신학교가 문을 닫고 배우던 학생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홍콩에 한 분이 한 장소에 공장 건물의 기숙사를 임대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신학생들을 공장의 직원처럼 위장 취업을 시켜서 제가 오기 한 주전부터 낮에는 그 공장의 근로자로 그리고 새벽에6시에 일어나 2시간 수업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6시30분부터 4시간에 걸쳐서 수업을 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말이 안 통하고 무엇보다 언제 공안원이 들이닥칠지 배우는 사람들도 가르치는 저 자신도 모두가 편치 못한 마음으로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통역하는 형제가 제가 강의하는 도중 목소리를 낮추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전혀 찬양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마치 저가 가진 조그마한 기쁨 마져 다 빼앗기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올 때 가져왔던 찬양 몇 곡을 가방에 쑤셔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첫날 강의를 했습니다. 저를 초대한 양선교사님과의 약속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그 분은 수배령이 나서 이곳에 올 수도 없고, 그래도 며칠 함께 벗이 되 주었던, 오목사님도 이젠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첫 강의를 4시간하고 2층에 강사인 저를 위해 조그만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중국식 침대가 있었고, 거기엔 누군가가 가져온 전기 담요를 딱딱한 침대에 깔려 있었는데 한쪽만 작동이 되는 담요였습니다. 수도가 있는데 찬물 밖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웠는데 눈물이 핑 도는데 참 묘하더라구요. 고생을 각오하고, 또 어려움을 감수하고 온 길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한밤에 깊게 깔렸습니다. 내일도 사역은 계속 할 수 있을는지, 공안은 들이닥치지는 않을는지, ...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나 고민이 돼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이리 저리 뒤척대면서 지새워본 경험이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적어도 나이 삼십 대 중반 이상을 살아온 이들 가운데 한번도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인생을 아직 모르는 분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시면 아브람이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15:5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오십니다. 이 상황은 아브람이 기쁨으로 자원해서 쫓아나간 모습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억지로, 겨우겨우 이끌려서, 목덜미를 잡혀서, 잡아끄는 대로 딸려 가는 심정으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브람은 사실 밤새도록 뒤척였습니다. 1절 중간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이르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으로 비춰볼 때 아브람이 밤새도록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질식할 것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첫째, 두려움입니다. 그는 왜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14장에 보면 아브람은 특공대 318명을 이끌고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네 왕의 연합군을 멸절시켰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롯 때문에 괜스레 이 싸움에 끼어들어서 평지풍파를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틈탄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그 동방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까?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침공해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자기는 미약하며 아무것도 없는데 물러난 적들이 다시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복수심에 이글거리는 그돌라오멜이 언제라도 다시 올라와 자기를 칠 것만 같습니다. 다시 싸운다면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대개 공포심이 생기면 몸과 마음이 오그라 붙습니다.
둘째, 의심입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통하여 은혜를 입었습니다. 의와 평강의 왕을 만남으로써 힘을 얻어 영적인 독립심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영적인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소돔 왕이 주는 물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에 돌아와 보니 그 물품들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당시 문명이 가장 발달한 도시의 호화품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집이라는 건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 친 텐트가 고작인 겁니다. 을씨년스레 바람이 불고, 그 모래 섞인 바람이 텐트 속까지 불어오는 것을 보면서 아브람은 너무도 답답해하지 안겠습니까? 예수 믿고 주님 섬기는 생활을 하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해놓고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면 마음이 울적해지는, 그런 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물건들을 안 받은 게 과연 잘한 일일까?' 이런 후회가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이런 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심천 공항을 빠져 나와 인천 공항에서 짐을 찾는데 거의 1시간 30을 소요했는데 보니까 우리 일행중에 골프를 치고 왔는지 골프 가방이 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씁씁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러나 아브람이 가졌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따로 있었습니다. 공포도, 의심도, 재물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도 아브람을 많이 괴롭혔지만 가장 큰 중압감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지 않은 데서 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다준 원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3:16에 나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이 땅의 티끌같이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래서 그 약속을 붙잡고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십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후손은커녕 아들 하나 없습니다.

사람이 희망을 품고 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법입니다. 잠언 13:12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마음에 상처가 일어납니다. 뭐, 아브람도 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고 서서히 영혼이 연약해지자 그에게 시험이 찾아왔고 힘이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맥풀린 모습은 본문 2, 3절에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여기서 '주시려나이까'로 번역된 문구를 히브리 원문의 어법 그대로 따라 풀자면 "하나님, 내게 주신 게 뭡니까? 아무것도 안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입니다. "제게 뭐 자식 하나 줘보셨습니까?" 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나는 무자하오니"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을 원망하며 호소하는 듯합니다. "티끌 같게 하시겠다더니 도대체 뭡니까? 십 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 이제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못 박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은 다메섹, 그러니까 지금의 다마스커스인데 이 다마스커스를 지나오면서 노예로 사온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 아브람을 강타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볼멘소리로, 공포와 의심, 깊은 실망감에 휩싸여서 자신의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가하자 서운하고, 외롭고, 버림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엄습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아브라함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1절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나옵니다. 말씀이 임했는데 '이상' 중에 임했습니다. 이상 중이란 이상하다(strange)는 뜻이 아니고, '비전(vision) 가운데로'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서 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비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킨 초대 교회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불과 120여명 남짓한 저들이 어떻게 거대한 세상을 복음 앞에 무릎을 꿇게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한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 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비전이 있다는 겁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요,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 가슴속에 비전이 심기워지니까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굳게 닫혀있던 에배소가 열렸고, 고린도 도시가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마침내 로마가 그들의 비전 앞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을 데리고 나가십니다. 자! 5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밤새 고민한 아브람을 데리고 나간 시간은 이른 새벽쯤 됐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이끌어내신 후 하늘의 뭇별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늘에 뭇별을 보았을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하늘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지난번 미국의 몬타나를 방문했을 때 레이크 사이드 호숫가에 있는 수련원에 머무는 동안 그곳은 공해가 없어서 그런지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하늘이었습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보이고, 별자리 하나 하나를 알아볼 정도로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한참보고 있다 보니 별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달려가서 주워 담아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격에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오염되지 않은 하늘이 이렇게 장관인데, 아브람이 쳐다본 하늘은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사천 년 전의 하늘, 대기오염이나 스모그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을 말입니다. 아브람은 은하수가 무리 지어 흐르는 그 찬란한 광경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으며 가슴 벅찬 감격을 맛봤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손끝으로 지으신 저 숱한 별들도 저렇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나를 갈대아 우르와 하란 땅에서 이끌어내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내 고민 하나 못 풀어주시겠는가? 저 별들을 지으신 능력으로 어찌 나와 맺은 언약을 이루지 않으시겠는가?' 아브람에게 이렇게 믿음이 발화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영적인 눈이 확 뜨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운행케 하시는 별들을 보면서 친히 오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약속을 진실하게 지켜오신 하나님에 대해 다시금 눈뜨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그의 삶의 '터닝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을 보게 하신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본문 창세기 15:5은 구원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말씀입니다. 보통 히브리어에서는 자손이 복수형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단수형으로 쓰였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15장의 신비한 내용을 전부 알기는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광활한 우주의 별들을 보여 주실 때, 어떻게 그의 마음속의 영적인 통찰력이 새로워져서 자신의 자손, 자기 씨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이 오시리라고 믿게 됐는지, 우리가 그 경로를 다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무엇 때문에 이 과분한 칭찬을 받는 줄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그가 다른 사람보다 특출 나서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 바로 오늘 이 말씀처럼 그가 한 것은 단지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사실을 믿은 그 믿음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이신칭의는 우리 기독교의 복음의 정수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어졌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새해부터 아브라함을 붙잡고 말씀을 묵상하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한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확신은 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창세기 15:1절 하반 절에 보십시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두려움 속에 한 동안 깊은 좌절감에 빠졌던 그는 다시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 설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깨어진 꿈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래서 아직도 깨어진 꿈의 파편들을 붙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어 보십시오. '하나님, 나 이렇게 두렵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큰 상급으로 여긴다는 이 말씀 앞에 나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묻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주실 만큼 모든 것을 다 주신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저는 이번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를 보면서 전율에 떨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모여든 그들은 대부분 20대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자본주의 물결이 광풍처럼 불고 있습니다. 길거리에도, tv매체에도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광고들이 홍수를 이루는데 왜 그들이라고 그 현란한 광고에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왜 그들처럼 돈벌고, 또 쓰고 싶은 유혹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 줄을 알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을 구원하겠다는 그 일념하나로 배고픔을 참고,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말씀을 붙잡고 아예 자신들을 십자가의 줄로 묶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소리도 지르지 못했죠. 통역을 세워 강의를 했죠 찬양은 아예 부르지도 못했죠. 거기에 무슨 역사가 있고 또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학생들이 제가 강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외우고 자기 것으로 삼는데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수업 때, 흐르는 눈물과 우는 소리 마져 절제해가며 마지막 수업을 아쉬워했던 그 현장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저를 공항까지 바래다 준 통역을 하던 '요나'라는 27살 먹은 청년에게 조그마한 사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사례를 안 받습니다. 그럴려면 애초 이 길을 안 들어섰을 것입니다." 돈을 건넨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번 강의를 듣고 저의 사명을 다시 한번 도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꼭 와 주십시오. 우리는 말씀에 목말라 해 있습니다." 그 한족 청년과 헤어지고 그의 가는 뒷모습을 볼 때 그의 가는 길에 온통 환한 빛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걸음은 작은 거인의 모습이었고, 그 가는 길에 주님의 영광이 온 땅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드러날 꿈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 아침! 여기 모인 여러분도 이 아름다움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축복을 주시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프리 패스를 주신 것, 이것이 바로 은혜요 믿음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서 이런 자들을 일컬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내 인생을 거듭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방패가 되시고 나를 당신의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마음이 숨쉬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빚을 갚는 인생으로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고전 15:10절에 보면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전력을 다해 주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마치 하루 종일 일거리를 찾지 못한 어느 일꾼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을 만나, 하루 일당을 받기로 하고 남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게 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꾼이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포도원 일을 한 것처럼 너무 감격해서 다른 사도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게 된 것은 자기의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거나 자기의 능력과 학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파격적으로 대우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과 12장 1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라고 실토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헌신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울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할 일이 많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에 주신 표어처럼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야합니다. 축복의 통로는 축복의 유통자로 멋지게 쓰임 받아야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아직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땀 흘려 번 돈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직장, 학원의 복음화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약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가난한 자를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거나,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교회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고하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수고들은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귀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평생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한 일에 모든 것을 털어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조차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쌓여지는 알곡이요, 우리의 면류관에 달일 보석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은 일에 쓰임 받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숱한 문제 앞에 좌절할 때도 있고, 두려워하며, 영적인 방황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됨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 앞에서도 주저 않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