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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마 1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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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한 제자가 대답했는데, 그 대답 속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주님을 외곡 된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세례요한으로, 더러는 엘리야로,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이유는 그 지식이 우리의 믿음을 결정해 주고, 앎으로 갖게 된 믿음이 우리의 구원과 전 인생 그리고 영생까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요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못 알게 되면 잘못된 지식은 우리의 믿음을 외곡 되게 만들고 외곡 된 믿음은 우리를 영생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알게 되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건강한 믿음을 형성하게 만들고 그 건강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축복만이 아니라 현세의 복까지도 누리며 살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마 16:17에 보면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향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주님은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천국 열쇠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베드로가 고백한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성경 전체에 비추어서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몇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어떤 분으로 고백해야 합니까?

첫째,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400년 전에 희랍에 서양 철학의 창시자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특히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한 사발을 마셨는데 바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곧 죽을 것을 예상하며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 플라톤이라는 분이 그 대화를 모두 기록해서 "플라톤의 대화"(The Dialogue of Plato) 라는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무려 2천 3백 년 전의 책이지만 지금도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사약을 마신 직후에는 마치 물 한 모금을 마신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감옥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참 거닐다 보니까 독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걷지를 못하고 서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힘들어지자 앉아서 말을 계속 하였고, 그것도 힘들어서 누워서 이야기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약을 마셨어도 그 독이 온 몸에 퍼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독을 마신 후에는 죽음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입니다. 인류는 사단이라는 뱀에게 물려서 죄의 독으로 인하여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이며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 죽음에서 예외는 없었습니다. 외냐하면 성경의 기록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영영한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멸망에 처한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주님이 구원자라는 소식입니다. 주님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은 죄의 독이 영혼과 정신과 육체에 퍼지게 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멸망 받을 인류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다가 치료된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의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어디에선가 독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마구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따끔한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몸은 부어가고 고통은 심해져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빌어달라고 구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매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는 자는 살고, 외면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믿음으로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뱀의 독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순종하고 구리 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요 3: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죄의 독으로 멸망을 향해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광야의 놋뱀처럼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주님을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믿는다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병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8:16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만나셨고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치료자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2천년 전에 병자들을 고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

성경 벧전 2:24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고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병에서 자유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의 복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과거에 병든 자를 다 치유하셨다는 것은 믿는데 지금도 치유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믿지만 나를 치유하신다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정경포 목사님은 예수를 믿은 후 사단의 공격으로 몸이 뒤틀리는 희한한 병에 걸려서 몇 개월을 고생하다가 간절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다가 귀신이 떠나가고 치유된 간증이 있습니다. 정경포 목사님만 치유를 경험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이 치료되어 건강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유의 복음을 밥상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밥상을 차려놓았어도 먹는 사람만이 그 밥상을 통해서 배가 부르는 것입니다. 밥상이 잘 차려져 있어도 먹지 않는다면 그 밥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치유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이 나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함이라고 마음으로 확실하게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치유를 경험하고 건강한 것이고 마음으로 믿지 못하고 입으로 연약함을 고백하면 치유의 복음은 그 사람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셋째,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어른이 될 수록 세상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여러 종류의 슬픔의 감정들이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슬픔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큰 슬픔, 작은 슬픔, 많은 슬픔, 적은 슬픔...
사 53:4에 보면 주님을 소개하는데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시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 우리의 슬픔을 넘겨드리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적들과 사건들로 인하여 엄청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과정을 통과했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처지 때문에 늘 슬픔에 잠겨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의 고백을 보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자신의 앞과 우편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충만했습니다.

마땅히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할 한 여인이 주님을 만남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 간증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청소년시절 어머니의 이혼과 재혼의 반복으로 상처를 받고 집을 나온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외로운 마음을 기대려고 이성교제를 하고 동거까지 하였습니다. 영영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을 줄 알았던 애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러다 6년 만에 다시 나타난 애인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큰 상처와 충격을 받은 여인은 살고 싶은 생각도 살 의욕도 잃어버렸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 남자 저 남자 사귀고 헤어지는 과정에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우울증, 정신분열증, 대인기피증 등 정신적인 질환이 점점 심해져서 정신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고아원에 가서 봉사하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가볼까?'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와서 봉사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아이들과 함께 설교를 듣다가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목사님이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외면해도 심지어 여러분의 부모, 친구들이 여러분을 버려도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는 말씀에 눈물이 터지고 엉엉 소리 내어 울게 된 것입니다. 여섯 시간이나 같이 붙잡고 기도하고 상처를 나누고 하다보니 모든 정신질환이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정신분열증, 대인기피증, 우울증.. 그리고는 "예수님이 이제 제 신랑입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매는 피아노를 전공하였는지라 교회에 출석하며 반주를 하였습니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며 악신이 떠나는 것처럼 이 자매가 반주를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미국에서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목사님을 따라 총각집사님이 함께 왔습니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분인데 의학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본 교회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한다고 하니 참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이 총각이 반주하는 자매를 소개시켜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매를 불러 말을 꺼내니 '목사님, 이젠 상처입고 싶지 않아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버림받았어요. 예수님 만나 다시 살아났는데 더 이상 상처입고 흔들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목사님이 한 번만 만나보라고 설득해서 만났는데 세 시간 만에 결혼약속을 하였습니다. 자매가 자기 인생을 다 이야기 했어요. 과거의 허물까지 다 털어놓으니 총각집사님이 듣고 확신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된다.' 그래서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답니다. 남편이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고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며 감동을 받습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들어가 보면 아내가 자지 않고 거실구석에서 무릎 꿇고 남편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합니다. '우리 남편 수술 잘 하게 해달라고' 서로 세상에 이런 아내가 어디 있느냐고? 이런 남편이 어디 있느냐고? 감사하며 삽니다. 아내는 말하기를 "제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어두운 방구석에서 벽이나 긁으며 증오하고 비참하게 끝나버렸을 인생인데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변화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 여인이 가진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가진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주님은 우리가 가진 어떤 슬픔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으로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슬픔대신 희락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늘 풍성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에만 부요했던 것이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풍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부요함이지만 사람들이 범죄 한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는 환경적인 저주까지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환경의 저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제시하신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고후 8:9에 보면 주님이 가난하게 된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신자들은 풍성하고 넉넉하게 살아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확실합니다.

신자가 부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여전히 가난 때문에 고통당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불신앙 때문입니다. 나는 부요할 수 없다는 불신앙이 부요함의 축복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제가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다룰 때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는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불신앙을 깨고 축복의 신앙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둘째, 사단의 역사 때문입니다. 부요했던 욥에게 사단이 역사하자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는 가난함이 찾아왔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차원의 도둑놈인 마귀에게 은혜와 축복을 도적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부요함의 은혜를 믿지만 부요함을 가로막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게으름, 가난을 부르는 언어생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경제생활 등이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넷째,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지만 아직 믿음의 열매를 따기에는 좀 이른 것입니다. 씨는 뿌렸지만 열매 맺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섯째,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 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발전하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단체, 국가와 국가간에 전쟁과 싸움이 됩니다.
관계에 금이 가면 교통이 그치게 되고 단절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통의 단절은 분쟁으로, 냉전으로 나타납니다. 부부 간에도 관계가 단절되면 분쟁이나 냉전으로 이어집니다. 부딪혀서 싸우는 것도 문제요, 상대에게 냉정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 단절된 교통을 이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엡2:13,14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단절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연결해주셔서 상호 교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단절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입니다.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고, 인간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역할입니다.

영국 사람이 그린 「개통」(開通)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한 통신병이 부대 간의 교신을 하는 전화선을 수리하러 갑니다. 적진에 총탄이 빗발치듯하는데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전화선이라 목숨을 걸고 뛰어갑니다. 드디어 끊어진 데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전선을 이어줄 아무런 기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양쪽 전선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지만 두 손을 움켜쥔 채로 사력을 다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단절된 관계를 이어서 교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이유로든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죽고 남이 사는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럴 때 분쟁 대신 평화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세속적인 정신을 붙잡으면 관계의 골은 더 깊어지고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유심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 나뭇조각을 물 위에 띄운 후 그 물통을 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물었습니다. “왜 물 위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무겁잖아요.”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그냥 지고 가면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며 쏟아지죠. 그런데 나뭇조각을 얹어놓으면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에 물이 넘치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말을 들으면서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동요되고 출렁일 때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갈등이 일어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에 주님의 평화가 충만히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분쟁과 냉전이 일어나면 그 때 관계의 중심에 십자가를 띄우십시오. 내가 죽고 남이 사는 십자가 정신으로 무장할 때 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충만할 것입니다.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희 집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 보일러수리공이 우리 집을 다녀간 뒤에는 보일러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됩니다. 왜냐하면 보일러 전문가가 보일러를 손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인생의 수리공의 역할을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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